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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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이 아닌 '희랍인' 조르바였을 때부터, 워낙 많이 들었던 책이지만, 읽는다 읽는다 얘기만 하다가 이제야 완독.

조르바라는 너무나도 독특하고 매력적인 인물 하나만으로도 이 정도의 책이 완성된다는 건 작가의 능력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우리가 '이성'이라는 감옥 안에 갇히고서도 얼마나 '감성'과 '열정'이란 것을 흘끔대는지에 대한 증거이기도 하다.

 

조르바의 말이 옳다는 건 나도 알았다. 그러나 그럴 용기가 내겐 없었다. 나는 아무래도 인생의 길을 잘못 든 것 같았다. 타인과의 접촉은 이제 나만의 덧없는 독백이 되어 가고 있었다. 나는 타락해 있었다. 여자와의 사랑과 책에 대한 사랑을 선택하라면 책을 선택할 정도로 타락해 있었다.

 

  "그래요, 당신은 나를 그 잘난 머리로 이해합니다.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겁니다. '이건 옳고 저건 그르다. 이건 진실이고 저건 아니다, 그 사람은 옳고 딴 놈은 틀렸다…….' 그래서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당신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나는 당신 팔과 가슴을 봅니다. 팔과 가슴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침묵한다 이겁니다. 한마디도 하지 않아요. 흡사 피 한 방울 흐르지 않는 것 같다 이겁니다. 그래, 무엇으로 이해한다는 건가요, 머리로? 웃기지 맙시다!"

 

  나는 닥쳤다. 부끄러웠다. '진짜 사내란 이런 거야…….' 나는 조르바의 슬픔을 부끄러워하며 이런 생각을 했다. 그는 피가 덥고 뼈가 단단한 사나이…… 슬플 때는 진짜 눈물이 뺨을 흐르게 했다. 기쁠 때면 형이상학의 채로 거르느라고 그 기쁨을 잡치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직감했듯이) 이 책과 조르바에 깊게 빠져들지는 못했다.

그건 카잔차키스나 조르바의 탓이 아니라, 바로 내 탓인 것도 알았다.

나는, 방드르디와 조르바와 같은 제3 인간형들을 바라보며 동경을 하거나 스스로를 반성하는, 그런 인간형은 아닌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흔들리거나 괴로워하지 않는다'라고 볼 수도 있지만, '굉장히 보수적이다'라고 볼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조르바가 춤을 추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처럼, 나 또한 그러한 인간일 뿐인 것을.

 

오히려 내 관심을 끌었던 것은 조르바의 과거, 그러니까 지금의 조르바가 왜 그러한 조르바가 되었는가를 암시하는 부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방드르디보다는 조르바에게 더 친근감을 느끼는 듯하다.)

 

  "……내게는, 저건 터키 놈, 저건 불가리아 놈, 이건 그리스 놈,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두목, 나는 당신이 들으면 머리카락이 쭈뼛할 짓도 조국을 위해서랍시고 태연하게 했습니다. 나는 사람의 멱도 따고 마을에 불도 지르고 강도 짓도 하고 강간도 하고 일가족을 몰살하기도 했습니다. 왜요? 불가리아 놈, 아니면 터키 놈이기 때문이지요. 나는 때로 자신을 이렇게 질책했습니다. '염병할 놈, 지옥에나 떨어져, 이 돼지 같은 놈! 싹 꺼져 버려. 이 병신아!' 요새 와서는 이 사람은 좋은 사람, 저 사람은 나쁜 놈, 이런 식입니다. 그리스인이든, 불가리아인이든 터키인이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좋은 사람이냐, 나쁜 놈이냐? 요새 내게 문제가 되는 건 이것뿐입니다. 나이를 더 먹으면(마지막으로 입에 들어갈 빵 덩어리에다 놓고 맹세합니다만) 이것도 상관하지 않을 겁니다. 좋은 사람이든 나쁜 놈이든 나는 그것들이 불쌍해요. 모두가 한가집니다. 태연해야지 하고 생각해도 사람만 보면 가슴이 뭉클해요. 오, 여기 또 하나 불쌍한 것이 있구나,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자 역시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두려워한다. 이자 속에도 하느님과 악마가 있고, 때가 되면 뻗어 땅 밑에 널빤지처럼 꼿꼿하게 눕고, 구더기 밥이 된다. 불쌍한 것! 우리는 모두 한 형제간이지. 모두가 구더기 밥이니까."

 

  "……내 조국이라고 했어요? 당신은 책에 쓰여 있는 그 엉터리 수작을 다 믿어요? 당신이 믿어야 할 것은 바로 나 같은 사람이에요. 조국 같은 게 있는 한 인간은 짐승, 그것도 앞뒤 헤어릴 줄 모르는 짐승 신세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나는 그 모든 걸 졸업했습니다. 내게는 끝났어요. 당신은 어떻게 되어 있어요?"

 

무릇 이런 발언들은 굉장한 위험을 떠안고 있는 것이지만,

속마음을 툭툭 털어놓고 감정을 발산하며 모든 것을 경험하려 하는 조르바이기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릴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의 작품 속에서 괴상한 인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야 무릇 작가라는 자들이 그리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일이겠지만

그 '이상함'을 이상함 이상의 수준으로 끌어올려 독자의 동의(공감이 아니더라도)를 얻어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여튼 오래 묵혀둔 숙제 하나를 해결한 것 같아서 기분은 좋다. 아. 그리고 이윤기 씨의 번역도 꽤나 맛깔스럽게 되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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