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시사의 즐거움 - 17~19세기 유럽의 일상세계
위르겐 슐룸봄 지음, 백승종.장현숙 엮고 옮김 / 돌베개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260페이지의 분량이니 그리 많은 편은 아니지만 소재 때문에 자칫 흥미를 잃을 수도 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당연히 가능하다. ^^)

이 책은 독일의 저명한 역사연구가 위르겐 슐룸봄이 쓴 7개의 논문을 모아놓은 책이다.

부제에서 볼 수 있듯이 17~19세기 유럽의 일상세계를 엿볼 수 있다. (특히 농촌사회)

책을 보면서 놀랐던 점은 가족재구성이라는 방법으로 사회적 관계망을 수치적 자료로 환산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소규모 집단을 표본으로 하기 때문에, 표본의 수가 너무 작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속에서 의미를 발견해나가고 기존의 거시적 통설과는 다른 모습들이 현실감있게

살아나고 있는 것은 참 인상적이었다.

슐룸봄 교수가 책에서 이미 말하고 있듯이 그는 미시사 연구 대상 중에서도 특히 '평범한 사람들'에게

주목을 하고 있다. 긴츠부르크의 '치즈와 구더기'와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누가 옳다 그르다를 떠나서 슐룸봄 교수의 접근법도 분명 의미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단, 기존의 (경직된) 역사학 입장에서 보면 해석(부정적으로 말하면 추측)의 영역이 너무 넓고

명확한 '결론'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에 부정적인 인상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그러하듯, 명확한 삶의 모습은 그리 쉽게 드러나지도 않으며

또 어찌보면 그런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을런지도 모른다.

 

글 전체 중에서도 착취구조의 농업사회에서 적극적인 불평(?)을 했던 소작농의 편지를 다룬 논문과

한 재단사의 자서전에서 그 시대를 살던 한 인간의 모습을 생생하게 살리는 시도를 하는 논문,

그리고 출산의 주체에 대한 인식과 주체가 되지 못한 임산부들의 '전략'을 다룬 마지막 논문이

참 흥미로웠다. (그 전략이 조금더 구체적으로 살아났으면 더 흥미로왔겠지만)

 

사실 이 책은 소재 자체가 우리와는 너무 거리가 먼 듯 하고 또 말 그대로 '논문'이기 때문에

재미로 읽기엔 약간 거리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읽기 전에 그러한 생각이 든다면

이 책의 번역자와 슐룸봄 교수의 대담에 나오는 한 구절을 인용해 드릴까 한다.

 

 

백승종 - 자, 그럼 이제 마지막 질문입니다. 방금 이 책을 끝까지 독파한 한국의 독자들에게 선생님이 바라는 점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지 궁금합니다.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슐롬봄 - 한국의 독자들에게 저는 무엇인가 막연한 바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한국의 독자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이 책을 읽은 한국의 독자 여러분은 지리적으로 대단히 멀리 떨어져 있는 독일의 어느 한 마을, 또는 어느 한 도시에 살았던 농민과 소작농의 세계에 대하여 호기심을 표하였습니다. 이름 없는 어떤 재단사의 삶이나 미혼모의 일생에 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져주었습니다. 이제 저로서는 도리어 궁금한 점이 없지 않습니다. 한국의 독자 여러분은 이 책을 읽고 나서 근대 유럽의 일상세계가 낯설게 느껴지는지, 아니면 한국의 역사와 꽤나 비슷한 점이 많다고 생각하시는지 저는 그 점을 여쭤보고 싶습니다. 독자 여러분이 이 책에 적용된 문제 의식이나 연구 방법을 이용해서 한국의 역사를 직접 연구해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셨다면, 저로서는 그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사실 '현미경으로 보는 역사'라거나 '능동적인 과거 속의 인간'이라는 말보다도

슐룸봄 교수의 이 말 속에 그의 역사관이 잘 드러나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꽤 낯설었다. 내가 아는 한국의 역사에 비해서도, 내가 아는 유럽의 역사에 비해서도.

자, 그럼 내가 알고 있는 한국의 역사에는 또다른 '낯선 부분'이 존재하지 않을까?

'낯익음은 배우는 자에게 있어 毒과 같다'라는 엉터리 말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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