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라, 토끼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7
존 업다이크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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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토끼』를 읽었다. 나는 이 책을 무책임한 성인 남자의 뒤늦은 방황기라고 요약했다. 그리고 이런 문장만으로 주인공 레빗의 성격과 행적을 묘사하려는 나도 참 요령부득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글을 쓸 때도 사소한 감상이나 줄거리, 더 나아가 작품 전체를 한 단위로 종합하고자 하는 욕구가 생긴다. 마찬가지로 레빗이라는 이 친구를 보면서 떠올린 인상들을 나는 글로 풀어쓰고자 시도했지만 참 쉽지 않다고 느꼈다. 애초에 그는 이해하기는커녕 호의적으로 보기 힘든 면모가 있다. 여기 한 남자가 있다. 한때 잘나가는 농구 선수 출신에 임신 중인 아내를 둔, 그러니까 이제 곧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될 해리 레빗 앵스트롬¹. 어느 날 그는 어머니께 아들 넬슨을 맡겼다는 아내의 말에 부모님 댁으로 간다. 그리고 불현듯 자신이 덫에 걸렸다고 느낀다. 그는 차를 끌고 고속도로를 횡단한다. 어디로 갈지 본인도 모르는 채로 - 그렇게 정처 없이 미국 대륙을 횡단하다가 레빗은 옛 농구 감독인 마티 토세로를 만난다. 그들은 여자 둘을 만나고 거기서 레빗은 루스라는 여자와 사귀면서 동거 생활을 시작한다.

존 업다이크는 소위 말하는 '레빗 시리즈'를 10년 주기로 발표했다². 레빗은 말하자면 업다이크의 생애를 - 그게 한 사람으로서의 생애든 전업작가로서의 생애든 - 함께 한 페르소나라고 볼 수 있다. 레빗이 업다이크, 업다이크가 레빗이라고 표하기란 아무래도 비약이 심할 테지만 미국 전체를 조망하고자 한 작가의 의도가 레빗에게 투영된 사실은 부인할 수 없겠다. 그래서 레빗의 눈에 비친 미국은 업다이크가 생각한 미국 그 자체였을 것이다 - 존 업다이크는 말한다. "래빗의 눈으로 본 것이 내 눈으로 본 것보다 이야기할 가치가 더 크지만, 사실 둘 사이의 차이는 미미하다.(본책, p.444 작품 해설 참고)" 내가 생각한 미국의 이미지가 있고 미국인들이 생각하는 미국의 이미지가 있고 그 둘은 당연히 다를 것이다. 물론 내가 한국인을 대표할 수 없기 때문에 한국인이 생각하는 미국의 이미지 또한 있을 것이다. 내가 생각한 미국은 『위대한 개츠비』였다. 샴페인과 축제 분위기 속에서 흐트러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홀로 와인 한잔 기울이는 이. 내가 생각한 개츠비와 미국은 그런 이미지였다.

물론 『위대한 개츠비』가 그런 내용도 아닐뿐더러 미국의 이미지와 동떨어졌음을 안다. 이건 내가 순전히 미국을 떠올리면서 연상하는 이미지이자 환상이 그렇다는 소리다. 업다이크가 바라본 미국은 어디에도 존재하는 미국이다. 그것은 당장 우리 주변에서도 찾아볼 수 있을 만큼 흔한 사람과 장면 속에 담겨 있다.³ 사람들은 일상 속에 걸어들어가 알아서 괴로워한다. 이유 모를 괴로움에 잠식당하고 불안감에 짜증을 부린다. 마찬가지로 처음 레빗의 일탈 행위는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다만 아내 재니스가 아이에게 무심하고 남편이 오기 전에 현관문을 걸어 잠가두며 임신 중에도 술과 담배에 찌든 모습에서 뭔가 그의 가정이 삐거덕거리고 있음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런 불쾌함이 레빗을 나가게 한 걸까. 말 그대로 덫에 걸린 느낌이 그를 도망가게 한 걸까.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레빗을 옹호하기 어려울 것이다. 오히려 독자의 입장에서 가장 가깝게 다가올 등장인물은 목사 잭 에클스다. 그는 작중에서 레빗을 다시 가족 품으로 돌아가도록 설득하는 역할을 맡는다. 레빗이 잠깐 차를 두고 옷가지를 챙기려 집에 들른 틈을 타 에클스는 그에게 도망간 이유를 묻고 함께 골프 약속도 잡는다. 그와 가까워질수록 에클스가 레빗의 마음을 다잡고 한 가정에 평화를 깃들게 해야 하는데. 그런데 나중 가서 에클스도 레빗을 어찌해야 할지 모른다. "해리는 분명히 돌아올 겁니다(본책, p.222)" 레빗의 장모를 만난 에클스는 말하지만 그 말을 본인도 확신할 수 없다. 아무래도 그의 도망에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복잡한 문제들이 꼬여 있다고 직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리의 문제가 감정의 부족이라기보다는 통제되지 않는 감정 과잉이기 때문에 섣불리 재결합을 하도록 밀어붙이면 안 돼요(본책, p.244 변형해서 인용)"

그렇다면 이 소설은 아주 웃기는 소설이다. 설명할 수 없는 걸 작가가 던져 놓고 독자들은 그걸 가지고 씨름하는 꼴이니 말이다. 차라리 레빗의 삶을 하나의 담론 거리로 받아들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레빗은 그 가출 행위를 제외하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보편적인 인물이다. 그는 조잡하고 무책임하며 충동적이다. 어쩔 때는 오만하고 금방 풀이 죽으며, 지나치게 소심하고 응석받이다. 그의 다른 점은 가정을 벗어났을 뿐이고 사람들은 그를 가정을 파탄 낸 무뢰한이자 파렴치한이라 부른다. 우리가 레빗을 불편하게 바라보는 이유가 거기 있다. 다 큰 평범한 성인이 가족을 내팽개치고 도망쳤으면 그것은 책임의 문제지 일탈의 문제로 보기 어렵다. 하지만 이 같은 결론에도 여전히 찝찝한 앙금이 남는 건 왜일까. 그 해답은 어렵지 않다. 살면서 방황하지 않는 존재란 없으며 사실 인생에서 방황하기 좋은 시기란 따로 없다는 점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래서 레빗을 옹호할 수도 비난할 수도 없다.

이 소설에서 레빗은 네 번 도망친다. 네 번의 도망은 곧 네 번의 덫이다. 그리고 그 덫은 갈수록 실체를 가지고 절망스럽게 그의 목을 옥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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