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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섬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135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9월
평점 :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보물섬』, 머핀 피크 그림, 최용준 옮김, 열린책들, 2010.
꿈에 본 섬으로. 바다 타고, 물결 넘어. 바다로 가자……로 이어지는 주제가를 가진 애니메이션 ≪보물섬≫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원작과 얼마나 비슷했는지 세세히 기억나진 않지만, 언제나 스티븐슨의 대표작인『보물섬』생각을 하면 그 주제가가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곤 한다.
어릴 적에 행복하게 읽은 책들을 장성한 뒤에 다시 펴는 일은 첫사랑을 찾는 일에 견줄 수 있다. 그녀를 다시 만나는 일이 행복하려면, 그녀와 나 사이에 적당한 망각이 필요하다. 속속들이 아는 상대를 다시 만나는 일에 자극이 따를 리가 없다. 불가피하게 그녀와 나 사이엔 추억도 공유되어야 한다. 서로 완전히 잊을 정도의 사람이었다면 굳이 ‘재회’여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를 통해 서로가 지난 사랑에 버금가는 감동과 기쁨과 만족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그 혹은 그녀가 어떤 인간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나랑 맞는 이성(혹은 책), 읽을 때마다 조금씩 다른 인식과 감동과 재구성의 기쁨을 주는 책(혹은 인간)이 있다.
물론,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 것과 달리 인간관계는 쉽게 덮이지도 않고 덮은 책을 열듯 끊긴 관계를 일방적으로 새로이 하기도 어렵다. 확실한 것 하나는, 출판된 책과 (어느 정도)나이 먹은 인간은 변하지 않으며, 따라서 얽히고 꼬인 책이나 사람은 좀처럼 맞아 들어가기 어렵다는 것이다.
서설이 길었다. 자, 이제 인정하자. 아이디어로 충만했던 스티븐슨은 결코 대가는 아니었다. 그는 착안을 솜씨 좋게 빚어 소설을 썼지만, 결코 대가는 아니었다(사망 십여 년 전부터 스티븐슨은 자신의 재능이 고갈되었음을 한탄했다고 한다. 그는 말년에 심각한 우울증을 겪었다). 위트로 무장한「악마의 호리병」은 좋았지만, 전적으로 스티븐슨 자신의 창작은 아니었다. 잭 더 리퍼에게 영감을 받은 게 분명한『지킬 박사와 하이드』에서 스티븐슨은 인간 본성에 대한 혜안을 보이지만, 결코 포가 쌓은 것 같은 음울하고도 기이한 문학의 성(城)을 완성하진 못했다.
물론『보물섬』은 아동문학이며, 이 정도의 서술만으로도 충분하다는 평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아이들이 먹기엔 충분한 영양을 함유할지언정, 어른들이 섭취하기엔 부족함이 있다. 갈등구조의 빈약함과 치밀하지 못함은 이 소설의 가장 큰 약점이다. 해적들이 죽음을 예고하는 방식은 흥미롭지만, 그것의 반복은 구태의연해 보였다. 듬성듬성한 서술은 독자의 상상을 자극하기도 하지만, 서술의 구멍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스티븐슨은 실버 선장이라는 매력적인 인물로 여러 부실한 지점들을 성공적으로 메워나간다. 좋은 인물을 창조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보물섬』은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실버 선장이 없었더라면, 이 작품은 지금까지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서평은 끝났다. 첫사랑을 만나는 것도 만나지 않는 것도 내가 제시하는 최종제의는 아니다. 다만, 옛사랑의 그림자는 길었지만 그가 지닌 달콤함은 길지 않았다는 것만 밝혀두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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