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알파의 시간 - 2009년 제54회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
하성란 외 지음 / 현대문학 / 2008년 11월
평점 :
품절
하성란 외,『2009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 현대문학, 2009.
오랫동안 미뤄두었던 2009현대문학상을 이제야 집어 들었다. 다른 책들이 밀려 있기도 했고, 그간 한국단편들에 지쳐있기도 했다.
나는 하성란이라는 작가에 대해 의구심을 지녔다. 무엇이 그녀를 작가이게 만드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어쩌면 나는 아직도『A』로 인해 생긴 화를 풀지 못한 걸지도 모른다). 우선 김숨에 대한 평으로부터 이 글을 시작해야겠다.
나는 이번 작품인「모일, 저녁」을 통해 김숨이라는 작가가 불안의식을 통해 일종의 공포를 들여다보는 작가라는 인상을 받았다.「막차」에서 어두운 차창 밖을 내다보는 나이든 여인의 을씨년스러운 표정에서도 그랬고,「국수」에서 애증의 대상이었던 의붓어머니를 위해 국수를 미는 여인의 날 선 독백에서도 그러한 작가 특유의 시선이 느껴졌으며,「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밤」에서 빚어진 인물의 고립감이 그러했다.「모일, 저녁」에서 김숨은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가족을 통해 만남을 만들고 있지만, 지연시키던 그 식사를 끝내 무산시킴으로써 회합을 가로막는다. 등장하는 인물은 고시에 실패하고 방에 틀어박힌 삼촌과 고시촌 생활을 하고 있는 서술자, 하룻밤에 꼬박 백 마리의 뱀장어를 잡아야 하는 서술자의 아버지 등이다. 못 박힌 문 너머의 삼촌은 물론이거니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서술자와 부모들 간에도 미묘한 층위로 차단막이 자리하고 있다. 이것에 작가는 어떠한 이유를 서둘러 붙이지 않고 있는데, 이것이 작가를 더욱 미덥게 만든다. 인물이 파편화되고 서로 간에 융화될 수 없는 것은 어떤 무엇에 까닭이 있는 게 아니라, 인간은 원래 단독자로서 고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등장한 실성한 노인네는 이러한 두려움을 이해하는 최초이자 최후의 인간이다. ‘실성’은 일종의 한계를 넘은 ‘달성’이기에, 노망난 늙은이는 서술자의 공포를 차라리 이해한다. 은행을 줍다 트럭에 치일 뻔한 어머니의 에피소드와 뱀장어를 죽이며 돈을 버는 아버지의 상황을 통해, 그것에 대한 연민어린 서술자의 시각을 통해 작가는 평범한 삶을 위협하는 일상의 덫을 은연히 가리켜 보인다.
박민규가 하성란을 위협하지 못한 것인가? 일종의 중립성을 지키기 위해 심사평을 읽지 않은 나로서는 현대문학상이 지닌 엄격한 완고함이 조금은 우습다.「누런 강 배 한 척」의 뒤를 잇는「근처」는「낮잠」과 함께 일종의 박민규식 만년문학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근처」는 죽음을 맞이하려는 외로운 인물을 통해 인간이 끝내 떨칠 수 없는 환멸을 보이는 동시에, 그렇게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존재들이 빚어내는 아름다운 향취의 역설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위에 언급한 작품들과 함께「아침의 문」을 떠올려보니, 박민규가 지난 몇 년간 죽음이라는 주제를 파헤쳐 온 게 아닌가 싶다. 자기만의 방식을 지닌 박민규는 그 형식의 독특함으로 인해 작품에 담긴 내용의 적절성과 깊이에 대해 정당한 평을 받지 못해왔다. 나는 박민규식 파격을 현대문학상이 감당하려 들지 않았다는 생각을 한다.
일종의 발랄함과 실험적인 형식에 있어 이기호가 박민규에 밀리진 않는다. 편지체를 통해 인물 너머의 병리적 현상을 보이는 사회 자체를 겨눈 이기호의「김박사는 누구인가?」는 무척 신선한 기운을 지닌 작품이다.『갈팡질팡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와『최순덕 성령 충만기』를 통해 이기호는 더채로운 형식에 색다른 이야기를 생기 있게 다듬을 줄 아는 작가임을 증명했는데,「김박사는 누구인가?」를 통해서도 그러한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고백하건데, 이장욱의「고백의 제왕」은 그다지 기대했던 작품이 아니었다(어디선가 읽은 그의 작품이 떠오르질 않는다). 인간의 허위가 드러날 때 느껴지는 당혹감이 실제로는 카타르시스를 동반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이장욱의 작품은 시린 예각을 지녔다. 이장욱은 이 단편을 통해 우리 모두가 실은 어둠의 공모자임을 교묘하게 폭로하고 있다.
최수철의 이인칭 소설은 김영하의 그것을 생각나게 만든다. 최수철은 당신이라는 단어를 좀 더 폭넓게 사용하면서 독자의 사유의 폭을 늘리려는 시도를 성공적으로 이뤄내고 있다. 황정은이 시도하고 있는 방식을 일종의 ‘최수철 식’이라고 규정해도 무리는 아니라고 본다.「모자」이후로 황정은의 작품은 두 번째인데, 나는 그녀의 시도가 이루려는 정도를 충분히 만족시키지는 못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사건 자체의 소소함 때문에 이러한 색다른 방식마저도 너저분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거꾸로 하성란에 대해 들어가 보도록 하자. 이 작품을 통해 나는 제목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우선 떠올렸다. 알파라? 오메가와 함께 하는 그것을 가리키는가? 어쩌면 R파(波)? 알파가 애매하기 때문에 뒤의 시간이라는 단어의 의미도 섣불리 규정지을 수 없게 된다. 모호함 속에 가려진 제목은 호기심으로 충만해진 독자를 재빨리 끌어당긴다.
그리고는? 없다. 나는 왜 이 작품이 빼어난지를 심사평을 통해 확인하려 했지만, 결국은 무엇도 알아낼 수 없었다. 삼과 시간에 대한 성찰만이 문학의 미덕인가? 그것은 꼭 가족의 틀 안에서 이뤄져야 하는가? 다른 작품들에는 삶과 시간에 대한 성찰이 드러나 있지 않은가? 드러나 있다면, 하성란의 것에 비해 어떻게 빈약한가? 나는 그것에 대해 알아낼 수 없었다. 흘러넘치도록 많은 가족 이야기, 딸과 엄마의 이야기, 아버지의 부재, 노망난 노인네에 대한 이야기들을 버무린 이 작품이 어떠한 문학적 성취를 이루고 있는지를 심사평은, 더불어 이 작품 자체는 설득하고 있지 않다.
나는 2009 현대문학상을 박민규가 수상했어야 한다고 본다. 심사위원들의 말을 그대로 적용시켜보아도 박민규가 이루고 있는 문학적 성취는 하성란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으며 오히려 더 깊다. 또한 기존의 방식을 파괴하고 새로운 도전을 통해 문학의 외연을 넓혀간 그간의 행보에 한국문단은 답을 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다음해에 박민규는「아침의 문」으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한다). 나는 하성란의 이 작품을 한 번 더 읽어봄으로서 심사위원들의 선택을 한 번 더 이해해보려 하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납득되지 않는다.
기수상작가들의 작품 평은 간단하게 하겠다. 윤대녕은 자신의 색을 잃어버리지 않은 채로 자신이 지닌 감성을 그만의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고, 성석제는 독특한 인물을 발굴해 특유의 입담으로 이를 희회화하였다. 얼마 전에 2012년 이상문학상 후보작에 수록된 김경욱의「스프레이」를 비판적으로 평했었는데, 이 같은 일종의 슬럼프는「러닝맨」에서부터 유발된 게 아닌가 싶다. 나를 움츠러들게 만들었던 김경욱의 섬뜩한 날 섬은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
사진을 포함한 리뷰와 더 다양한 글들을 http://blog.naver.com/anssjaj를 통해 만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