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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평점 :
정유정,『7년의 밤』, 은행나무, 2011.
‘한국형 스릴러’에 대한 명상으로 독후감을 시작해보자. 한국형 스릴러의 뿌리는 과연 무엇일까.
신호탄은 영화에서 기인되었다.《추격자》의 성공은 남자 VS 남자라는 영화 시나리오 구도를 만들어냈고, 잔혹 스릴러의 재생산을 촉진했으며, 생생한 날것의 이야기들(주먹으로 이뤄지는 복수극, 적나라하고 증오에 찬 대사들, 정의가 이뤄지는 난폭한 방식들)을 양산해냈다. 마치 뱅코우의 뒤를 따르는 왕의 행렬처럼 말이다.
일억 원 고료로 유명한 세계문학상을 수상한 정유정이 이 년 만에 내놓은『7년의 밤』이 영화 판권으로 일억 원을 받자 감독 캐스팅을 둘러싸고 충무로가 들썩거렸다고 한다.『7년의 밤』을 두고 “그림이 그려진다”던 그들은 제 2의 추격자를 연상했던 모양이다.
이 작품이 그렇게 그림이 그려지는 작품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대목이 있다. 일종의 쾌감을 선사하는데, 이는 생생함 때문이다. 문장이 매우 빼어나다는가, 마음을 사로잡는 서술보다는 탄탄한 자료조사와 함께 (매우 좁은 공간이긴 하지만) 세령호를 작가가 완전히 의식구조에 갖춘 채 글을 썼다는 인상을 받았다.
인물이 주는 재미는 반씩 자리한다. 아내와 딸을 폭행하는 권위적인 사디스트로 나오는 오제영과 프로야구선수 출신의 사회 부적응자 최현수가 대립각을 세우는데, 오제영과 달리 최현수의 내적고통은 그리 만족스러운 울림을 주지 못했다. 특히 그가 등장하는 대목들은 매우 지루한데, 과거로 빈번히 돌아가는 서술 방식과 적확하지 못한 서술이 원인이다.
이 소설은 여러 화자를 두고 있는데, 1인칭 시점에서는 주인공인 서원이, 3인칭으로 서술되는 ‘세령호 I, II, III’에서는 승환, 서원, 현수, 영제 등의 입장에 매우 가깝게 서술자가 서서 서술을 풀어낸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전지적 위치를 점하며 인물들의 마음을 상당히 직접적으로 서술한다. 드러나지 않는 인물은 제영의 딸인 세령 뿐이다(나는 작가가 세령을 통해 드러낼 수 있을 게 별로 없었기에 사용치 않았다고 여긴다. 세령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던 건 제영이라는 인물, 그 안에 잠재된 폭력과 악 뿐이다). 이렇게 인물과 매우 밀착된 서술 방식을 통해 작가는 인물의 내면에 폭넓은 접근권을 가지며 스릴러 장르 특유의 속도감과 예측불허를 다각도에서 시도할 수 있게 된다.
스릴러로써 이 작품은 성공적인가? 전문적인 취재를 거쳐 쓴 대목이나, 충분한 대립각을 세워둔 점, 악한 인물의 내면과 그만의 독특함을 잘 부여한 점은 매력적이나 그 이상이 없다. 정유정은 레이먼드 챈들러와 스티븐 킹의 작품을 좋아한다는데, 그에 필적할 만한 작품은 아니다. 특히 스티븐 킹은 인간 내면의 드러나지 않은 악을 잘 관조하는 편인데, 정유정이 그러낸 오제영이라는 인물은 (그 충분한 매력들에도 불구하고) 빤하다.
이 작품의 가장 큰 약점은 통속성과 지루함이다. 과연 최현수의 슬픔에 대해 그렇게 지루하게 써놓을 필요가 있었을까. 앞서 언급했지만, 최현수의 트라우마에는 허점들이 있다. 대학 때까지 좋은 선수였으나 프로의 중압감을 이기지 못했다는 서술이 있었고, 실제로 그런 선수들도 많다. 그렇다면 최현수의 소심함과 내성적인 면모들은 프로 초창기에 성립되었던 걸까. 잠복되어 있던 트라우마가 프로 적응 실패로 도드라졌다? 그렇다면 대학 때는 이런 성격이 아니었는가. 아니면 적응 실패 때부터 이런 성격이 시작된 걸까.
이 부분을 집요하게 따지는 이유는 이 대목에서부터 최현수라는 인물이 탄생했고, 그 지점의 서술부터 인물에 대한 이해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최현수가 자신의 범행을 고백하지 못하고 끙끙거렸던 측면도 이해되는 구간을 넘어섰기에 뒤쪽으로 가면서는 급기야 짜증스럽기까지 했다. 갓 태어난 아들을 받아들고 하는 최현수의 행동도 이해되지 않았다. 나는 이러한 지점이 감정적으로 과잉되었다는 인상을 받았다. 내가 볼 때 정유정은 최현수를 덩치가 크고 어리석으나 아들은 끔찍이 생각하는 녹색 괴물 정도로 구축했던 것 같다.
이런 어수룩한 반대편 인물을 보완하는 게 아주 명민한 아들 서원(약속이라는 의미인데, 이는 지켜주겠다는 현수의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과 그를 돕는 승환이다. 아마 남자작가는 서원이라는 인물을 이 정도로 똑똑하게 그리지 않았을 것이다. 근래 출간된 김애란의『두근두근 내 인생』에서의 한아름(이 역시 남자 작가라면 절대 짓지 않았을 이름이다) 만큼이나 영특한 서원을 보며 똑똑한 남자아이를 내세우는 게 요새 트렌드인가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웃자고 하는 얘기다). 서원은 오제영의 무례한 어투에도 쩔쩔 매는 최현수를 당돌한 행동으로 지원하는 아이이며 7년 동안의 온갖 사회적 핍박을 견뎌내는 인물이기도 하다.
소설의 막판에 이 인물이 오제영과 대립하는 부분은 매우 좋았다. 긴박감이 느껴졌는데, 소설의 대미까지 이러한 긴장이 잘 이어졌다. 과정은 아쉬웠지만, 결말은 장대한 셈이다. 하지만 정유정이 레이먼드 챈들러 대신에 존 카첸바크나 마이클 코넬리를 사숙했다면 어땠을까 싶었다. 좋은 결말이긴 하나, 충분히 만족스러운 결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생각보다 빨리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소멸되었다. 어쩌면 10위권 밖에서 선전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어쩌면 판촉 광고의 수사에 내가 너무도 (혹은 아직도) 홀려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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