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돌프의 사랑 문지 스펙트럼
뱅자맹 콩스탕 지음, 김석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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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정치평론가 뱅자맹 콩스탕이 남긴 단 하나의 명작 『아돌프의 사랑』. 제목 그대로 ‘아돌프’라는 남자 주인공이 ‘엘레노르’라는 한 여성과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본문 외피의 글들에서 잘 설명돼 있듯 이 작품은 단순한 연애소설이라기보다 치밀한 심리소설에 가깝다. 그렇기에 낭만적이기보다 차갑고, 사랑스럽기보다 투쟁적이다. 아돌프는 끝없이 자기 자신, 엘레노르,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러면서도 ‘외부의 사물이나 사람과는 그 관계를 끊는 것이 아무 일도 아니지만, 자기 자신과는 관계를 끊을 수가 없는 것’(p.163)처럼 스스로를, 그리고 자신을 가장 사랑해주는 엘레노르를 연민하며 모순적인 결심들을 반복한다. 소설은 그 날선 반복들 속에 얼마나 많은 아돌프의 위악, 나약함, 동정심 따위가 깃들어 있는지 명료하게 비추어 준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주체는 다름 아닌 아돌프 그 자신이다. 이에 독자는 아돌프의 시선에서, 아돌프가 바라보는 엘레노르의 시선에서, 또 그들의 바깥에 있는 발행인들의 시선에서 그 심리를 훑어볼 수 있게 된다. 분량 자체가 길지 않기도 하지만, 무척 간명한 문체를 갖고 있는 이 소설의 핵심을 그 형식이 뒷받침한다. 아돌프라는 인물과 잘 어울리는 비-낭만주의적 문체는 그 주위의 불필요한 묘사들을 모두 줄이고, 스스로의 감정, 순간 불타올랐거나 금세 지루해진 것들에 천착한다. 이 인간적 심리는 몇 번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한편, 때로는 추악하고 고통스럽다. 서로가 알고 있는 것을 알고 있고 또한 그 사실까지 알고 있는 일련의 인간관계가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을까? 이는 19세기 초를 살았던 어느 젊고 비루한 남성에게도 마찬가지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함께 많이 언급되는 듯하지만, 문지 스펙트럼 시리즈로 함께 출간된 『인간 실격』과도 비슷한 궤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무수한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끝내지 못하는 인간들의 지독한 심리.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 희망 속에는 뭔가 알 수 없는 게 있어서, 희망이 인간의 생애로부터 물러설 즈음이면 그 생애가 보다 엄격하면서도 보다 극적인 성격을 나타내기 때문일까? 아니면, 마치 구름이 흩어지면 산봉우리가 지평선에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듯이, 모든 환상이 사라지고 나면 그만큼 인생이 더욱 현실적으로 보이기 때문일까? - P20

사람의 마음이란 항상 변하기 쉬운 것이어서, 어떤 감정을 위장하고 있으면 결국에는 그 감정을 정말로 느끼게 된다. 나도 슬픔을 감추다 보니 정말로 슬픔을 어느 정도 잊게 되었다. 쉴 새 없는 농담은 우울증을 덜어주었고, 엘레노르와의 대화 속에서 사랑한다고 다짐하는 동안 내 마음속에는 진정한 사랑과 비슷한 달콤한 감동이 가득 차게 되었다. - P91

당신은 나에게 너무 좋은 사람이었어요. 나는 불가능한 일을 바라고 있었어요. 내게는 사랑이 인생의 전부였지만, 당신 인생의 전부가 될 수는 없는 일이지요. 이제 며칠만 더 나를 돌봐주세요. - P144

외부의 사물이나 사람과는 그 관계를 끊는 것이 아무 일도 아니지만, 자기 자신과는 관계를 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환경을 바꾼다고 하지만, 그것은 결국 벗어나고 싶던 고통을 다른 환경 속에 옮겨다 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자리를 옮기면서도 제 자신을 바로잡을 수 없다면, 그것은 오로지 뉘우침 위에 양심의 가책을 보태고 고뇌에 과오를 덧붙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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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프 미 시스터
이서수 지음 / 은행나무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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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헬프 미 시스터』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한 가족의 이야기다.


젊은 중년 여성 ‘수경’은 자신을 포함해 총 여섯 명의 식구들과 복닥복닥하게 한집에서 살아간다. 남편인 ‘우재’, 엄마 ‘여숙’, 아빠 ‘찬식’, 조카 ‘준후’와 ‘지후’. 네 명의 성인과 두 명의 미성년자가 있는 집에서 제대로 된 경제활동을 이어나가는 사람은 0명. 상황이 그렇게 되기 전 집안의 실질적 가장이기도 했던 수경은 이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가장 먼저 일어나는 사람이기도 하다. “나 이제 괜찮아. 그러니까 다들 일하러 나가자.”(p.15) 생활이 아무리 무너져도, 그러니까 전 직장동료가 건넨 졸피뎀을 먹고 대인기피증이 생기게 됐어도 결국 사람은 일을 해야 살 수 있다. 오랜 백수 생활을 이어나갔던 가족들은 수경의 그 한마디를 기점으로 각자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가기 시작한다. 그렇게 수경은 비대면으로 일을 진행할 수 있는 위탁 배송 업자가 되고, 우재는 해외 선물 거래를 접어둔 채 대리운전을 뛰고, 찬식은 걸어서 하는 음식 배달 노동자가 된다.

‘수경’이라는 한 여성의 삶을 다룰 것 같았던 서사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긱 노동자’(플랫폼 노동자, 혹은 ‘사이버 프롤레타리아’로도 칭해진다.)로 시선을 옮겨간다. 위탁 배송, 대리운전, 음식 배달은 모두 스마트폰 어플 ― 즉 ‘플랫폼’을 통해 중개된다. 수경의 식구들은 모두 어느 곳의 정직원도, 완전한 자영업자도 아닌 형태로 플랫폼에 발이 매인 채 그 부당한 형태의 노동을 감내하게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플랫폼이 제공하는 특유의 편리함에 익숙해지며 그곳에서 불투명한 희망을 찾기도 하는데, 그렇게 이 가족은 점차 각자의 플랫폼에 “마권을 쥔 도박사의 심정”(p.172)으로 의존하고, “벌 수 있는데 벌지 않으면 벌을 받는 기분에 시달리게 된다.”(같은 쪽).

또 다른 측면에서 이야기는 다양한 사회문제를 찾아낸다. 작중의 여성 인물들이 각자가 처한 여성/퀴어/성노동 관련 문제를 제시하고, 노인이나 청소년으로 대표되는 연령대의 인물들이 각 세대에 관한 문제를 보여주는 식이다. 작가는 하나의 울타리 안에 있는 인물들을 통해 현실과 복잡하게 얽힌 다양한 문제의식을 조명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는 소설 내에서 과잉된 연출이라기보다, 무척이나 촘촘하게 짜인 현대 사회를 여실히 비춰주는 방식에 가깝다. 그 수단 중 하나가 시점 전환인데, 소설은 수경뿐 아니라 작중 모든 인물의 시점을 한 번씩 거쳐 가며 각자가 스스로 처한 현실에서 어떻게 삶을 입체적으로 구축해냈는지 그 양상을 체험시켜준다. 이를 통해 독자는 결국 ‘보라’와 수경처럼, 이 평범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던 처음에서 그들의 삶을 받아들이게 되는 마지막을 맞이한다.

소설 말미에 등장하는 ‘헬프 미 시스터’는 수경과 여숙이 새로이 정착한 생활 기반 서비스 어플이다. 이들은 이 어플에 ‘시스터’로 등록되어, 도움을 청하는 여성들의 메시지를 수락하고 달려간다. 아마 이들의 삶은 오랫동안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 노동자 가족을 착취하는 플랫폼 또한 당분간은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이 가족이 결국 “그만하면 됐지”(p.337) 싶은 새로운 집으로 이사하게 됨과 같이, 삶은 아주 조금씩 나아질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나아짐은 아무도 기적이라고 부르지 않았지만, 기적이라고 부르고자 하면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헬프 미 시스터』는 우리 삶 가장 가까이에 있는 부분과 무척 닮아있는 작품이다. 아무 기적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어쩐지 볕들 날이 생기는 것. 다만 평범한 일상을 계속해서 살아가며 가장 희망찬 장면으로 책을 덮게 만드는 것. 인생은 놀랍도록 복잡하지만 한편 잔인할 정도로 선명하고, 어떤 면에선 기적적으로 빛나기도 한다. 바로 그러한 면을 발견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성장소설이기도 하다. 어떤 방식이든 결국에는 일어나고자 하는 수많은 이들에게 응원을 보낸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 세상에 일어난 불행한 일 가운데 준후가 일조하고 있는 불행한 일도 명백히 있다. 이 세상에 불행한 일이 자꾸만 일어나는 건 불행한 일을 저지르려는 사람이 많아서 그런 게 아니라, 행복한 일을 기대하다가 불행해진 사람들이 많아서 그렇다는 걸 알려준다면 아마도 지후는 뉴스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라는 걸 알아챌지도 모른다. - 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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