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트 러닝
이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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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님께서 천착하고 계신 몇 가지의 소재가 특별히 인상깊게 남은 단편집이었다. 가장 좋았던 작품은 「우리가 소멸하는 법」과 「에덴 – 두 묶음 사람」. ‘두 묶음 사람’을 표제작으로 고민하셨던 분이 어딘가엔 계시리라 생각한다.


책을 이룬 8개의 단편들에는 모두 누군가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나온다. 소설마다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이미 떠나보낸, 한때 사랑했던 자들을 (혹은 바로 그 한때를) 기억한다. 다만 그 각자의 방식이라는 것은 그들이 겪은 상실 만큼이나 독특한 삶의 경험이어서, 이들의 애도는 허무하면서도 낭만적으로, 때로는 깜찍하면서도 유머러스하게 그려진다.


표제작 「나이트 러닝」은 이러한 색깔이 가장 잘 살아난 작품일 것이다. 아무리 잘라내도 다시 돋아나는 팔과 같은 기억은, 이미 소멸해버린 사람들을 자꾸만 떠올리게 만든다. 그렇게 우리는 여전히 사라진 이들의 몸을, 언어를, 그들만이 줄 수 있었던 감각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 기억으로(상상으로) 새로운 ‘시’를 발명하고, 나의 지난 사랑을 재구성한다. 이 과정이 고통스럽지 않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무덤 위를 달리는 이들의 호흡과 기다림은 계속된다. 이들은 타인과 같이 있기를 여전히 소망한다. 함께 살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이러한 희망이 삶의 아주 작은 부스러기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바로 그러한 부분이 소설을 읽는 사람에게 위로를 전달한다. 우리 모두가, 그처럼 지나온 사람들을 기억하며 살아가고 있으니까.



- 한겨레출판에서 책을 제공 받았습니다.

"한국어 교실에 다닐 때 ‘내 눈에 흙이 들어와도 허락할 수 없다‘라는 말이랑 ‘혀를 뽑아 버린다‘는 말이 신기했어. 내 몸의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말. 그러다 같은 반 친구가 ‘한쪽 팔을 잘라서라도 잃어버린 아이를 다시 볼 수 있다면‘이라는 작문을 해 왔는데 그게 너무 슬프면서도 나도 한번 해보고 싶었어. 친구는 이 도시에 와서 아이를 잃었대. 나는 다른 곳에서 남편을 잃고 이 도시로 왔는데 말이야." - P30

"봐. 나는 시간과 맞서고 있으니까. 시간아, 네가 아무리 좀먹어 봐라. 내가 꿈쩍이라도 할까. 누가 이기나 보자. 이러고 사는 거야. 정정당당하게 노려보면서. 서두르지 않을 거야. 왜 사람들이 시간을 아까워하는지 모르겠어. 시간은 그냥 여기저기 흘러 다니는 거야. 난 숙제가 없어. 남은 생을 방학이라 생각해."

어차피 산다는 건 시간을 좀먹는 일인지도 모른다. 지금의 나는 젊음, 그리고 적당한 꾸밈으로 그럭저럭 괜찮은 얼굴을 지니고 있지만 내면은 사납고 불안하다. 언젠가 외모는 내면을 닮아갈 것이다. 싫으나 좋으나 그때까지 살아야만 삶이 끝난다. - P59

사랑에 대해 생각하는 건 무효다. 그럴 시간에 옆에 누워 있는 존재에 대해 생각하는 편이 더 사랑에 가까운 것 아닐까. 죽음에 대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소용없다. 그건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소중한 사람이 죽거나, 소중하지 않았다 해도 알던 사람이 죽으면 그게 뭔지 저절로 알게 된다. - P108

작은 악과 작은 선들. 그런 게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서로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면 그래서 지금 제가 여기 발붙이고 있는 힘이 된다면, 적어도 알려드리고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 한다 생각했습니다. - P167

"혼자가 아니야. 미엣과 같이 살아."

토끼 미엣(miette)은 프랑스어로 부스러기라는 뜻이라고 했다.

"피니가 남기고 간 부스러기지."

그래. 넌 두 묶음 사람이니까. - P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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