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4
윌리엄 포크너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2월
평점 :
절판


미국이 낳은 위대한 작가 중 한 사람으로 불리는 윌리엄 포크너의 「곰 (The Bear)」. 이 책은 총 5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4장을 제외한 부분은 그 맥락이 비슷하지만 4장은 다른 장들과는 다른 느낌과 주제를 다루고 있다. 4장의 유무에 대한 논의가 미국 내에서도 뜨거웠듯이  「곰 (The Bear)」을 읽는 우리에게도 4장의 유무 여부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릴 것이라고 생각된다.

내용 연결성 측면에서는 4장이 빠지는 것이 좋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올드벤이라는 숲의 영물과도 같은 곰을 사냥하는 동안 성장해나가는 한 소년의 이야기로서 받아들여지는  「곰 (The Bear)」은  그것으로도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다. 하지만 미국 사회와 역사에 대한 통찰 의식을 가지고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반성을 고찰하고자 했던 윌리엄 포크너의 생각이나 책의 깊이를 더하기 위해서는 4장의 존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불멸의 존재인 것은 창조물 가운데 지칠 줄 모르는 목소리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영혼, 곧 동정심과 연민, 희생 그리고 인내할 수 있는 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 작가의 의무는 바로 이런 것들을 쓰는 일입니다. 사람들의 심장을 고동치게 하고 과거 영광스럽게 생각했던 용기와 명예, 희망, 자부심, 정열, 연민, 희생을 상기시켜서 인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그들만이 할 수 있는 특권입니다.

-윌리엄 포크너, 1949년 노벨상 수상 연설문 일부 中 발췌-

 

 

그의 작가관을 뚜렷이 볼 수 있는 수상 연설문이라 일부를 발췌해보았다. 그의 말처럼 작가는 글로써 사람들에게 과거를 상기시키고 그를 통해서 어떠한 감정을 끌어내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그것이 작가들의 의무이자 권리이기에 그만큼 작가들에게도 올바른 역사관이나 가치관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윌리엄 포크너는 그만큼 자신이 바라보는 세계에 대하여 스스로 고민해왔을 것이며, 그 노력 속에서 이뤄진 결정체가 그의 소설일 것이라 생각하는 것만큼  「곰 (The Bear)」에 담겨 있는 그의 목소리가 나에게 더욱 중요하게 다가왔다.

 

* 인간 VS 자연. 개발 VS 보전

수렵과 채집을 하던 시절, 인류에게 가장 멋진 꿈은 무엇이었을까? 아마 따스한 곳에서 먹을거리에 대한 걱정 없이 배부르게 사는 것이었을 거라 짐작해본다. 인간은 점차 먹을 것에 대한 고민이 사라졌고, 이제 그들에게 사냥은 단순한 취미거리가 되어버렸다. 즉, 사냥은 생존이 아닌 단순한 유희에 지나지 않으며, 인간이 가지려 하는 순간의 쾌락을 위해 숲 속에서 자신들의 삶을 영유해가는 동물들은 죽음의 공포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이다.

올드벤이라는 커다란 곰이 이 숲에 살고 있다. 오랜 시간 동안 숲에서 살아온 올드벤은 이제 숲과 다를 바 없는 존귀한 존재이다. 사람들은 올드벤이 주는 공포심에 주눅 들기보다도 올드벤을 사냥하기 위한 즐거움에 더욱 빠져있고, 이 올드벤 사냥은 연례행사처럼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이 즐거움은 사냥에 참가한 이들의 숲에 대한 갈망과 올드벤이 죽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게 된다. 소년도, 샘 파더스도 어쩌면 그 누구도 자연의 법칙을 그르치고 싶었던 사람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의 끊임없는 시도, 집착과 욕망은 결국 올드벤을 죽음에 이르게 하였고, 숲은 모두에게서 떠나버렸다.

인간의 이기심과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자연은 항상 정복되어야만 하는 존재로 인식되어왔다. 비단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부분의 국가는 자연 보전보다는 개발이라는 관점에 초점을 맞추었고, 이는 자연을 짓밟는 행태로 이어졌다. 이 소설에서는 올드벤이라는 곰 한 마리의 죽음으로써 숲이라는 존재를 잃어버리게 되었지만, 자연과 대립하며 개발을 이어온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은 올드벤의 죽음보다 더욱 크고 값진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알아요." 소년이 말했다.
"그래서 우리 둘 중 하나여야 하는 거잖아요. 저 곰이 이젠 모든 걸 끝내고 싶어질 때,
그때가 비로소 마지막 날이 될 수 있도록." 

* 소유의 문제 : 땅, 노예, 자유

과연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의 진정한 소유자는 누구일까? 과연 인간은 누군가의 위에 설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자유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이 모든 문제들은 성년이 된 소년의 이야기를 다루는 4장에서 논의된다. 스물한 살이 된 아이작은 자신의 할아버지, 아버지 대를 이어 내려온 땅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하고자 한다. 과연 내 선조가 가진 땅이 과연 우리의 소유라고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그는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작(소년의 이름)이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배경에는 사냥 기술을 전수해 주었던 샘 파더스와의 추억과 숲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올드벤에 대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이 4장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1~3장에서 아이작의 과거가 충분히 설명되어야 했고, 아이작이 왜 이러한 가치관을 갖게 되었는지에 대해 충분히 납득할 수 있게 만들었다.

19세기 말 남북전쟁이 끝난 후 사실상 노예제는 폐지된 상황. 아이작은 변화해가는 시대를 살아가야 한다고 믿는다. 아이작의 아버지와 삼촌이 써놓은 기록들을 읽음으로써 과거 흑인 노예들의 삶에 대해 독자들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노예는 사람이 아니라 물건과 등가교환이 가능한 존재에 불과했고, 여성 흑인 노예들은 종종 백인 주인으로부터의 성적 폭력을 피할 수 없었다. 그들의 자유는 박탈되었고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조차 꿈꿀 수 없었다. 남북전쟁으로 노예제는 폐지되었고 시대는 변화해야 함이 마땅하지만 그 변화는 남부의 주인들뿐만 아니라 흑인 노예들에게도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한 시대적 고민을 고스란히 담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책이 바로 「곰 (The Bear)」이었다.

 

오래 걸리겠지요. 그런 날이 금방 올 거라고 말한 적 없어요. 하지만 그래도 괜찮아요.
그들은 견딜 것이기 때문에-

 

짧은 한 권의 책이지만 담고 있는 가치의 무게는 생각보다 어마어마하게 무거웠던 한 권의 책이었다. 한 소년의 성장 이야기를 통해 내 삶을 들여다보기도 우리가 풀어야만 하는 숙제들에 대한 성찰도 가능하다는 점에서 마음에 든다. 언젠가는 도시가 아니라 숲이 말하는 대로, 숲의 시간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 시대가 오길 희망해본다.

그건 도시의 시간이고, 여기는 도시가 아니고 숲이잖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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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9-12 0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갑니다
 
포르투갈의 높은 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1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파이 이야기」로 전 세계를 들썩이게 만들었던 작가, 얀 마텔의 신작 「포르투갈의 높은 산」이 출간되었다. 얀 마텔의 4번째 장편소설이자 「파이 이야기」 이후 15년 만의 노력 끝에 우리에게 다가온 한 권의 소설이기에 「포르투갈의 높은 산」을 받아들고 가슴이 어느 때보다 두근두근했다. 태평양이라는 망망대해를 벗어나 포르투갈의 높은 산으로 향한 얀 마텔은 이제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전하고 있을까? 책이 주는 설렘과 기대 덕분에 책을 읽기 전부터 가슴 벅차올랐던 얀 마텔의  「포르투갈의 높은 산」을 소개해보고 싶다.

 

 

「포르투갈의 높은 산」은 총 3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있다. 각각의 소제목은 <집을 잃다>,<집으로>,<집>이다. 모든 소제목에 "집"이 들어가는 것만큼 얀 마텔이 이 소설을 통해 독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집"이 가지는 뜻에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1부 <집을 잃다>에서 토마스의 입을 통해 "집"에 대한 그의 소견을 말하고 있는듯했다.

 

 

사랑은 집이다... 사랑은 흔들리지 않는 토대와 무너지지 않는 천장으로 된 집이다.
그에게도 한때 그런 집이 있었다. 그것이 무너지기 전까지는.
이제 그의 집은 어디에도 없고 -알파마의 아파트는 수도사의 방처럼 을씨년스럽다-
어느 집이든 발을 디디면 그의 집이 없다는 사실만 상기될 뿐이다.

 

"사랑은 집"이라는 그의 말은 이 책을 읽어가는 내내 나의 독서에 영향을 미쳤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이들의 종착점과도 같은 「포르투갈의 높은 산」, 왜 그들이 이곳으로 향해야 했는지, 그들에게 집은 과연 어떤 의미였는지에 대해 생각해보면 「포르투갈의 높은 산」을 조금 더 가슴 깊게 읽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제 이야기 속으로!!!"


※ 노란 카드는 각 챕터의 줄거리 요약이며, 카드 아래의 내용은 키워드로 알아보는 「포르투갈의 높은 산. 아래의 내용은 스포가 될 가능성이 있으니 주의 바랍니다.

 

 

- 신(神)에 대하여 -

당신에게 신이란 어떤 존재인가? 신이라는 존재는 원래부터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인간의 믿음이 만들어 낸 산물일까? 신과 인간의 믿음에 대한 얀 마텔의 철학을 살펴볼 수 있었던 「포르투갈의 높은 산」.

이 책의 세 주인공은 사랑하는 이들을 잃었다. 토마스는 신에 대한 반발심으로 세상을 등지고 걷게 되었고, 신에 대한 분노를 풀기 위해 십자고상을 찾으러 포르투갈의 높은 산으로 향하게 된 것이다. 에우제비우의 부인 마리아의 논리에 따르면 신은 결국 인간의 믿음과 스토리가 만들어 낸 하나의 산물이다. 그리고 이러한 논리는 3부에 등장하는 '황금 아이'를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한 아이의 어이없는 죽음이 어떻게 성스러운 죽음으로 변화해나가는지에 대하여 읽게 된다면 읽는 순간에는 황당하겠지만 그러한 사례가 여전히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어느 순간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누구도 본 적이 없는 존재이자, 그에 대한 증명도 불가능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음으로써 존재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신(神)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그 신에게 맹목적인 믿음을 지키고 있을까?

그 해답은 1부 마지막 토마스의 외침으로 알 수 있다. "FATHER, 당신이 필요합니다."


결국 인간이 신의 품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궁극적인 이유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인간이 오로지 기댈 수 있는 공간은 실체는 없지만 누군가 자신에게 마지막 희망을 줄 것이라는 믿음이기 때문이다.

 

 

- 침팬지(Chimpanzee) -

이 소설의 1,2,3부에서는 '침팬지'가 공통적으로 등장한다. 침팬지 모습을 띤 십자고상, 남편의 뱃속에 들은 아기 곰을 안은 침팬지, 피터의 삶의 동반자가 된 침팬지 오도. 이 이야기는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진 관계의 고리와 더불어 몇 개의 공통된 사물을 등장시키면서 3가지 이야기를 더욱 끈끈하게 결합시킨다. 그러므로 각각의 이야기에 공통적으로 등장했던 사물들을 눈여겨본다면  「포르투갈의 높은 산」에 대한 깊은 이해가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이 소설에서 침팬지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돌이켜보는 장치로 작용한다. 과연 인간과 침팬지가 다른 점이 무엇인가? 약육강식의 논리로 타인에게 무차별적인 살생을 저지르고, 타인을 동물보다 못한 취급을 하는 인간 군상들의 모습. 자신의 피붙이에 대한 애정, 자연을 벗어나서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의 모습. 결론적으로 인간이 침팬지보다 더 나은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은 없다. 만약 한 가지를 굳이 꼽아야 한다면 침팬지보다 조금 더 정교화되고 고급화된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장점도 포르투갈의 높은 산에서는 산산이 조각나고 만다. 완전하지 않은 언어를 사용하는 타국의 언어를 사용하는 이상 우리는 그곳에서 침팬지보다 더 낫다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우리는 침팬지로부터 자연에서 사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고,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자연에서 사는 법, 우리가 살았었던 본연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이베리아 코뿔소(Iberia Rhinoceros) -

침팬지에 이어 3부 내내 우리의 눈에 들어오는 한 마리의 동물은 오래전 멸종했다는 '이베리아 코뿔소'이다. 이 코뿔소는 박제된 채로, 인간 군상의 모습에 비유되어서, 그리고 포르투갈의 높은 산에서 살아 숨 쉬는 생명체이자 우리의 지향점으로 등장한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자연 위에서 군림할 수 있다고 믿어왔다. 그리고 자연에 무차별적인 폭행을 가해 왔다. 하지만 인간이 죽인 것은 인간과 같이 자연에서 자신들의 삶을 영위하던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깨닫게 된다. 모두가 사라졌다고 해도 어디엔가 그들은 살아남아있었고, 그 시련과 상처 속에서도 끝까지 숨 쉬고 살아가는 강인함과 인내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모습은 결국 인류가 가졌던 것이며, 그것이 바로 우리가 자연에 돌아가야 하는 이유이자 가져야 할 지향점과도 같은 것이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자연에서 숨을 거두게 된다. 그리고 그 죽음 옆에 자연의 따스함이 존재한다면 그 죽음은 어떠한 것보다 더욱 축복받고 아름다운 죽음이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집을 떠나 다시 집으로 향하고, 집에 도착한 순간일 것이라 생각한다.


"소설의 운명은 반은 작가의 몫이고 반은 독자의 몫이다. 독자가 소설을 읽음으로써 작품은 하나의 인격체로 완성된다."라고 말하는 얀 마텔의 의견대로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포르투갈의 높은 산」을 완성했다. 그 과정은 즐거웠지만 연결고리를 하나로 묶는 과정은 결코 쉽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포르투갈의 높은 산」은 당신에게 많은 질문과 생각을 안겨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소설의 세계로 당신을 인도해 줄 것이다. 읽는 매 순간순간마다 놀라웠고 얀 마텔의 창의적인 생각에 감탄했다. 그처럼 소설을 쓸 수 있다면이라는 생각에 그의 재능을 질투하기도 했지만 「파이 이야기」에 이어 「포르투갈의 높은 산」이라는 좋은 소설을 다시 한번 내게 보내 준 작가이기에 이제는 감사의 인사를 남길 수밖에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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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반
폴 비티 지음, 이나경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10월
평점 :
절판


나에게 생각할 거리를 잔뜩 남겨 준 한 권의 책을 만났다. 2016년 맨부커 상을 받은 폴 비티의 「배반(The Sellout)」이다. 이 책의 제목은 원제가 가진 배반 혹은 배반자라는 뜻을 그대로 차용했다. 파랑과 빨강의 강렬한 대비 속에 보이는 검은 피부.   「배반(The Sellout)」이 가진 표지조차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바가 결코 가볍지는 않을 것이라는 느낌을 준다.
주인공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그는 무엇을 배반한 것이며, 왜 배반을 해야만 했을까?라는 질문을 머릿속에 담은 채 시작된 나와  「배반(The Sellout)」과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이 책을 시작하기 전에, 한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법전 혹은 중요한 문서 위에 써진 글자가 자유, 평등을 말한다고 해서
우리들의 실제 생활 속에서 그 자유와 평등을 누릴 수 있는가?

 

당신의 대답이 궁금하다. 하지만 나의 대답은 슬프게도 부정적이다. 문서 위로 써진 아름다운 말도 우리의 삶에 들어오는 순간 오용된다. 그리고 그 문서는 허울 좋은 테두리만 될 뿐 우리 모두는 이렇게 무기력하게 긍정하며 살아가는데 동의한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맞다고, 뭐 하러 힘들게 그에 대해 이야기하고 문제를 일으키냐고."
이 소설은 인간이 가진 이런 보편적 삶의 행태에 대한 비난의 칼날을 들이댄다. 하지만 작가의 문제의식은 더욱 날카롭다. 그리고 미국의 인종 문제를 겨냥한다. 

주인공 ME는  로스앤젤레스 남서부에 처음으로 정착한 흑인 일가로부터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는 사람이다. 사회학자이자 심리학자였던 아버지 밑에서 온갖 사회적 실험으로 인격이 형성되어버린 ME는 자신의 고장, 디킨스를 사랑한다. 하지만 경찰에 의해 아버지가 살해되고, 범죄 우발 도시로 찍힌 디킨스가 지도 상에서 사라짐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한다. 우여곡절 끝에 원하지도 않는 노예가 자신에게 생겨버렸고, 디킨스를 다시 찾기 위해서 그는 인종분리 정책을 다시 부활시키고자 한다. 흑인의 권리 신장을 위해 싸워 온 모든 이들에게 ME는 배반자가 될 수밖에 없었고, 그는 수정헌법을 어긴 장본인으로서 미국과 ME의 대결 앞에 서 있다. 

 

 

모두가 평등하고 자유롭다고 이야기하는 미국 사회이지만 과연 인종 간의 차별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본질적으로 인종 간의 평등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미국계 흑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에 대하여 작가 폴비티는 ME를 통해 신랄한 풍자와 블랙 유머를 사용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수정 헌법에서 명시하고 있다고 해서 과연 모든 이들이 한 사회 내에서 동등한 가치를 가지고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과연 그 땅에서 살고 있는 것이 맞는 것일까?라는 의문이 든다. ME가 저지른 행위는 법전의 내용에는 어긋나는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가 살고 있는 현실 속에서는 오히려 그의 행위들이 더욱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인종차별의 완화를 위해, 과거보다 나은 입지를 차지하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흑인들이 노력해 온 역사를 부정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폴 비티는  「배반(The Sellout)」을 통해 그들의 노력을 배반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노력이 정치적 혹은 경제적 권력 앞에 무기력하게 무너져가고 더 이상 각성하지 않은 채 스스로 인종이라는 틀에 갇혀 살아가고 있는 흑인들에 대한 비판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체제를 더욱 공고히 시키고 내면화시키고자 노력하는 백인들의 모습을 역으로 보여주면서 그들에게 또한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세계에서 가장 억압받은 사람들과 미국 흑인 사이의 차이다. 그들은 결코 잊지 말자고 맹세하지만, 우리는 모든 것을 기록에서 지우고, 영원히 봉합해서 치워 두고 싶어 한다. ... 배심원들은 흑인이 수백 년 동안 받아 온 조롱과 편견을 무시해야 하며, 눈앞에 보이는 불쌍한 니거들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믿는 척해야 한다는 지침 말이다.

 

 

「배반(The Sellout)」에서 ME는 많은 역사적 사건과 인물들을 인용한다. 만약 이 책을 읽는데 진입장벽이 생긴다면 미국 역사와 함께 한 미국 흑인 운동에 대한 부족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특히, 디킨스 시를 다시 살리겠다는 의지로 ME가 부활시켜 낸 인종분리 버스와 인종분리 학교는 1954년에 일어났던 학교 통합, 1955년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사건을 인용했다고 보인다.

 

그 표지판 때문이야. 사람들이 처음에는 불평을 하지만, 인종 차별을 보고 깨닫지. 그걸 보면 겸손해져. 우리가 얼마나 멀리 왔는지 깨닫게 돼.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깨닫고, 그 버스를 타면 인종 분리의 망령이 디킨스를 하나로 묶어 주는 것 같다니까.

두 개의 사건은 흑인 민권 운동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된다. 인종분리 정책이 미국 사회에서 점차 사라졌고, 명목상으로는 인종의 평등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는 시기에 다가간다. 하지만 그것 또한 어쩌면 흑인 집단을 새롭게 지배하려는 의도이자 음모는 아니었을까?라는 의심이 들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민권법, 투표권에 대한 허용은 일찍이 이루어졌지만 백인들은 그들과 부를 다시 분배하고 유색인종에 대한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는데 있어서는 수수방관격 자세를 취하고 있다.

빈민층을 이루는 흑인의 수는 해가 갈수록 늘고 있고 수감자 50% 이상을 흑인이 차지하고 있다. 부가 다시 대물림되는 미국 사회 속에서 흑인들 스스로 각성하고 다시 일어서기 위해, 그리고 백인들이 쳐놓은 장벽을 허물기 위해서 그들이 처한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문제 해결에 대한 철저한 분석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그 문제를 폴 비티의 「배반(The Sellout)」에서는 오래전 철폐되었다고 믿었던 인종분리 정책을 부활시킴으로써 잠들어 있는 그의 형제자매들을 깨우고 있다.

 

 

이 소설이 유쾌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것은 미국 사회 인종 문제가 가지고 있는 여러 문제들을 다각도로 조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국가들이 그러하듯 미국 또한 순혈주의를 강조한다. 순혈주의는 인종분리를 정당화하고 이분법적 논리를 당연시하게 만드는데, 이것은 더 나아가 하급 계층의 분할을 일으키기도 한다. 가난한 백인은 순혈이기 때문에 가난한 흑인과는 다른 종족이 되는 것이며 인종의 문제가 더 나아가 계급의 문제로까지 확장되는 것을 막게 된다.
"나도 흑인이면 좋겠어요." 백인 쌍둥이가 웃으며 검은 언니의 뜨거운 뺨을 쓰다듬었다. "흑인들이 일거리를 다 가져가거든요."
비록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며 이 문제에 대해 언급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도  이 소설이 현재 미국이 가진 인종 문제에 대해 다방면으로 자세하게 알려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곳 미국에서 <통합>은 은폐일 수 있다. ... 문제는 통합이 자연스러운 상태인지 부자연스러운 상태인지 우리가 모른다는 것이다. 강요한 것이든지 아니든지,
통합이 사회적 엔트로피인가, 사회적 질서인가? 그 개념은 아무도 정의하지 못했다.

 

"이런 믿음이 있으면, 언젠가는 자유의 몸이 된다는 확신이 있으면 함께 행동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노력하고, 함께 수감되고, 함께 자유를 위해 싸울 수 있습니다." - 마틴 루터 킹 연설 中 -

모두가 ME를 배반자라고 말한다 하더라도 나는 ME가 배반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린 자신의 고향 디킨스를 살리고자 하는 명분과 무엇이 그릇되었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은 있었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들 사회에 있어 배반자는 거짓된 허울을 믿고 그에 순응하며 살기 바쁜 사람들과 자신들의 삶에 대해 무기력하게 순응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들에게 어쩌면 자유를 향한 믿음이 사라졌는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면 아프리카에서 태어난 것보다 미국 땅에서 태어난 것을 감사한다고 말하며 그들에게 자유가 있다고 믿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들에게는 인종에 대한 문제로 귀결되었지만, 이 책을 읽는 우리에게는 과연 무엇일까? 이러한 문제가 그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라는 것에 나는 확신이 든다. 


※참고자료:
1. <미국사>, 이주영, 대한교과서, 2005.
2.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미국사>. 앨런 와인스타인, 데이비드 루벨, 시공사, 2004.
3. <인종차별의 진실>, BBC 다큐멘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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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파이 이야기 (특별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토미슬라프 토르야나크 그림 / 작가정신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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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좋은 책은 여러 번을 읽어도 매번 그 느낌이 다르게 다가온다. 특히 존재에 대한 근원적 물음을 던지는 소설들은 그 깊이가 남다르기에 여러 번 걸쳐 읽을 때마다 새로운 감정을 경험하게 만들어 주는 듯싶다.
나에게 얀 마텔의 「파이 이야기」는 그런 책 중의 하나이다. 2013년 한국에도 개봉했었던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를 통해 이 책을 알게 되었다. 영화를 보며 나 자신에게 던졌던 수많은 질문들을 더욱 잘 이해하고 싶었기에 영화를 보자마자 책을 한 권 사들고 집으로 돌아왔었다. 그리고 한 문장씩 곱씹으며 읽어 내려갔었던, 소중한 추억이 담긴 책이었다.  

 

 

얼마 전 작가정신 블로그를 통해 얀 마텔의 「파이 이야기」가 일러스트를 수록한 채 개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 내 가슴이 얼마나 두근 거렸는지 아무도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파이 이야기」를 읽는 동안 책에서 설명되는 장면들이 영화에서 보여준 영상들과 오버랩 되는 순간들이 종종 있었다. 책을 읽는 것과 동시에 영상을 눈앞에 펼쳐놓은 듯한 느낌이 들어 매우 생경하면서도 특별했다. 하지만 내 기억력과 상상력에 한계가 느껴져 많은 부분에서 아쉬움이 남았었다. 그런데 그 부족한 부분을 일러스트로 채워 줄 책이 나왔다고 하니 그 반가움이 얼마나 컸겠는가!

 

 

 

「일러스트 파이 이야기」에 실린 일러스트는 크로아티아의 일러스트 작가 토미 슬라프 토르야니크의 작품들이다. 2005년에 열렸던 "일러스트레이터 파이 이야기" 공모전에는 수 천명의 지원자가 몰렸고, 작가 얀 마텔이 직접 심사위원으로 참가하여 예심 통과자 60명을 직접 선정하기도 했다고 한다. 모든 이들이 꿈꿨을 우승의 영광은 토미 슬라프에게 돌아갔다, 캐나다와 크로아티아라는 지리적 문제를 이메일과 같은 통신 수단들로 극복하면서 수많은 아이디어가 교환되었고 두 작가의 열정과 의지는 「파이 이야기」를 더욱 극적으로 독자들에게 보여 줄 일러스트 40여 점을 만들어냈다.

끊임없이 재출간되고, 일러스트까지 그려진 작품으로 탈바꿈될 수 있다는 것은 「파이 이야기」가 전 세계 독자들에게 미치는 영향력과 파급력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는 좋은 척도인 것 같다. 내 마음을 울리고 며칠 동안 깊은 사색의 시간으로 내몰았던 이 한 권의 책은 나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독자들에게 같은 신호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태평양과 같은 망망대해 같은 세상 속에서 나 혼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이상하리만큼 따뜻해졌다.

 

 

 「일러스트 파이 이야기」를 받자마자 제일 먼저 확인한 것은 이 책의 제목대로 이 책에 실린 40여 점의 일러스트들이었다. 일러스트는 원색을 주로 사용하였고, 거친 느낌으로 채색되어있었다. 태평양 한가운데에서 호랑이(리처드 파커)와 함께 표류한 파이가 보고 느낀 생생한 감정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일러스트였다. 강렬한 색채와 질감은 책을 읽는 동안 우리 자신도 파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즉, 상상력이 부족한 독자들에게는 파이가 보는 세상을 알려주는 좋은 지침이 되고, 이미 이 책을 읽은 독자들에게는 흥미를 떨어뜨리지 않고 책 한 권을 다시 읽을 수 있는 촉매제가 될 수 있다.

「일러스트 파이 이야기」를 다시 읽는 동안 나는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영화의 잔상들과 일러스트를 비교했다. 아직도 눈에 선한 장면들을 일러스트로 보는 것은 색다른 매력을 제공했다. 나에게는 이번에 개정된 책이 더욱 가독성이 좋았다. 일러스트와 함께 편집되면서 공간에 대한 여유가 많이 생겼다.  「파이 이야기」가 스테디셀러로 오랜 시간 자리를 지킨 만큼 책을 좋아하는 많은 분들은 이미 한번 정도는 다 읽은 책이 아니지 싶다. 하지만 일러스트를 보는 순간  소장하고 싶은 욕구가 솟구치는 감정을 느끼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글로 가득 찬 기존의 「파이 이야기」는 기억 저편으로 어느덧 사라지고, 리처드 파커와 파이의 표류기의 생생함이 담긴 일러스트가 또다시 수많은 독자들을 매혹시킬 것이다.

 

 

고통스럽고, 끔찍하고, 무서운 일을 함께 겪으면서 날 살게 했던
리처드 파커는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내 삶에서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구명보트에서 마지막으로 그를 볼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를 약간 자극해서, 그의 마음에 내가 남아있게 할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그에게 말을 걸었으면 - 상대가 호랑이란 건 알지만 그래도 -좋았을걸.

 

「파이 이야기」를 다시 읽으면서 좋았던 점에 대해 한가지 언급하자면, 이 책이 내포하는 질문들에 대하여 다른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 소설의 2부 <태평양>은 3부의 내용을 알고 있는 나에게 새로운 시각으로 읽혔다. 호랑이와 태평양에서 표류한 소년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보다 더욱 잔인하고 가슴 아픈 순간을 담담히 살아내야 했던 소년의 이야기로 읽히니 내 가슴에 전해지는 감정의 농도는 이전보다 더욱 진하게 물들었다. 삶에 대한 의지, 인간의 욕망, 죽음에 대한 무한의 공포, 그 속에서 우리를 견디게 하는 한 줄기의 희망, 그리고 절대자에 대한 믿음, 이 소설이 다루고 있는 주제가 방대하고 깊은 만큼 책을 대하는 매 순간은 즐거움도 있었지만 나의 생각을 한 층 깊게 만들었다. 

소설 속 한 줄의 의미는 처음으로 이 책을 읽을 때와 두 번째로 이 책을 읽을 때 다르게 다가올 것이 분명하기에, 이 책은 몇 번을 읽어도 당신에게 새로운 즐거움을 가져다줄 것이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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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혹은 그림자 - 호퍼의 그림에서 탄생한 빛과 어둠의 이야기
로런스 블록 외 지음, 로런스 블록 엮음, 이진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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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ward Hopper (1882~1967)

 

호퍼의 팬이 되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을 땐, 내가 호퍼에 관한 글을 이렇게나 많이 적게 될 줄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의 그림을 통해 위안을 받고 다시 태어난 사람처럼 세상을 바라본 적이 있다.
그의 그림은 나보다 앞서 호퍼를 사랑한 많은 이들에 의해 이곳저곳에서 이미 많은 형식으로 변형되어 나를 반겼다.
나뿐만이 아니라 이미 이 세상을 살고 간 혹은 동시대를 살고 있는 예술가들이 그의 작품을 통해 수많은 영감과 이야깃거리를 얻고 있었다. 좋은 것은 나 혼자만 사랑하고 간직하고 싶은 욕망이 생기곤 한다.
하지만 그는 이미 너무나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기에 그런 이기적인 욕심은 일찍이 접어둘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지금은 호퍼의 작품을 프리즘 삼아 만들어 내는 그들의 2차 예술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그 연장선에서 선택한 책, 오늘 리뷰할 그 책의 제목. 「빛 혹은 그림자(In sunlight or In Shadow)」

 

   

 

 

 

나는 이 책의 제목, 표지, 그리고 책이 손으로 전달해주는 촉감까지. 이 책의 디자인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표지로 선정된 그림은 에드워드 호퍼의 대표작 중 하나인 <케이프 코드의 아침, 1950>이다.
핑크 원피스를 입은 금발의 여인. 빛은 그녀를 비추고, 그녀는 그 빛이 나오고 있는 먼 곳을 응시하고있다. 
호퍼의 작품들과 「빛 혹은 그림자」라는 이 책의 제목은 참 잘 어울린다. 호퍼는 자신의 그림에 빛을 가득 담았다.
그 빛은 특정 인물을 비추기도 하고, 특정 공간을 비추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그림 속에서 빛은 밝고 희망찬 의미를 담고 있지 않다. 빛을 통해 호퍼는 고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고독과 소외를 더욱 부각시켰고, 그 빛이 주는 효력은 어마어마했다. 
"빛"과 "그림자". 이 두 가지는 호퍼 그림의 대표적 상징이자 우리 인생을 가장 적절히 비유할 수 있는 단어들일 것이다.

 

이 책에는 18개의 호퍼의 작품 도판,  그 중 17개의 작품과 관련하여 작가들이 쓴 소설들이 실려있다. 스티븐 킹, 조이스 캐럴 오츠, 리 차일드, 제프리 디버 등 미국에서 명성이 자자한 작가들의 참여했다. 이러한 소식은 영미 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내 가슴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다. 호퍼의 작품과 저명한 작가들의 컬래버레이션이라니 생각만해도 좋지 아니한가!
 내가 상상하는 이야기와 작가들이 만들어 낸 이야기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을지, 그리고 그들의 해석은 앞으로 호퍼 작품을 감상하는 나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게 될지 너무나 궁금했다. 특히 에드워드 호퍼에 대한 평전을 썼고 호퍼 작품집의 편집자였던 게일 레빈까지 이 책의 한 파트를 맡았다고하니 이 책에 대한 기대치는 죽~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게일 레빈 소설 속에서처럼 휘트니미술관에서 호퍼 작품집의 첫 큐레이터로 일했었다. 이 점을 알고 읽는다면 조금 더 생생하게 게일 레빈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소설집에 실린 17개의 이야기들을 하나의 주제로, 하나의 장르로 구분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대작가들이 모여 만든 소설집인 만큼 우리는 서스펜스, 호러, 스릴러, 로맨스, 미스터리, 판타지 등등 이 책 한 권을 통해 수많은 장르를 경험해 볼 수 있다. 여러 장르와 색다른 이야기들을 넘나들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소설이 무엇인지를 찾아보는 것도 이 책을 즐길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될 것 같다. 무심코 지나갔던 그림 한 점에서 하나의 스토리가 태어나고 진행되는 과정을 살펴보니 소설가라는 직업을 갖기 위해서는 상당한 상상력과 논리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에 의문을 품을 수가 없었다. 각 소설들을 풀어가기 위해 내세운 아이디어들은 기발했다. 게다가 각 작가들은 작품이 상징하고 있는 것들, 즉 호퍼가 그리려 했던 고독과 소외와 같은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처절한 아픔들을 글 속으로 끌어오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17개의 소설. 개인에 따라 각각의 작품들은 호불호가 갈릴 것이고, 어떤 소설이 더 마음에 드는지에 대해 우선순위도 정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내 마음에 들었던 몇 개의 작품 중 하나, <정물화 1931/ by 크리스 넬스콧> 소개하고자 한다.

 

 

 

약 스무 장 정도의 짧은 단편인 이 소설의 모티브가 된 호퍼의 작품은 <호텔방 1931>이다. 경제적 위기 속에 개인 은행들이 도산하고, 인종과 성(性)에 대한 차별이 아직까지 해소되지 않은 시절. 주인공인 럴린은 언니 노린이 흑인에게 겁탈당했다는 거짓말을 해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던 착한 흑인이 죽게 되었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 이후 죄책감 때문인지 언니 노린까지 스스로 죽음을 맞이하면서 그 기억들이 남긴 상처는 럴린에게 깊게 새겨지게 된다.  성인이 되어 속죄를 하는 느낌으로 흑인 해방운동에 참여하게 되지만 그녀는 그 일에서 절름발이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다. 위험한 상황에서는 도망치기 바쁘고, 그 일에 깊게 관여하는 것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마음속에는 항상 짐이 가득 실어져 있다. 해소되지 않는 어떤 것. 그녀의 가슴속에 뭉쳐진 응어리는 어떻게 해야 풀어질 것인가?

 

 그녀는 결코 그 사람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그녀는 항상 어둠 속에 숨어서 빛 속으로 기록을 보낼 것이다.
그것은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 정말이지 최소한의- 일이었다.

 

이 사회 속에서 정의롭게 살아가고 싶고, 무엇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기는 하나 미처 실천으로는 행하지 못하는 나의 모습이 럴린의 모습과 비슷해서일까? 이 소설을 읽는 내내 가슴에서 무언가가 울컥울컥하고 올라왔다. 그리고 이 소설의 제목 정물화. 신념, 정의와 같은 우리의 가치관을 무시한 채, 그저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 그것은 생명 없이 한 곳에 서 있는 정물의 모습과 다를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다시 한 번 우리가 살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주는 짤막한 소설. <정물화, 1931>이었다.

 

「빛 혹은 그림자」에 실린 단편들은 암울했던 미국의 과거를 조망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적 부와 패권을 거머쥐었던 시대상황보다는 1930년대 전 세계에 불어 닥친 경제 공황의 위기 속에서 하루하루를 근근히 살아가야만 했던 개개인들의 삶을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인생을 밝혀 줄 한 줄기의 빛보다는 우리 시대의 씁쓸하고 차가운 단면들을 이 소설 속에서 자주 만날 수 있다. 호퍼가 그리고자 했던 군중들의 생활과 마음들이 소설들 속에 고스란히 녹아내렸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호퍼의 그림이 고독하고 소외되었던 이들에게 빛이 되었던 것처럼 이 단편들도 곰곰이 되뇌다 보면 어느 순간 빛이 되어 다가와 줄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서 아쉬운 것은 번역이다. 번역문을 읽어야 하는 우리에게는 항상 피할 수 없는 숙제가 아닐까 한다. 특히 한 권의 소설집인데, 성격, 문체, 작법이 각기 다른 대작가들의 글을 17개를 받고 번역한다는 것이 번역가에게 얼마나 큰 부담이고 힘든 일이었을지 이해가 가기도 한다. 하지만 17명의 작가들의 특성들을 과연 한 명의 번역가가 번역을 하는데 있어서 얼마만큼 잘 살릴 수 있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그렇다고 한 권의 책을 위해 17명의 번역가를 고용한다는 것은 더욱 말이 안 되는 것이고 말이다.(그랬으면 책값이 어마어마해졌겠지...) 그래서인지, 이 책은 원판에 대한 관심이 생긴다. 영문판 「In Sunlight or In Shadow」를 읽어본다면 더욱 생생하고 스펙터클한 작가들의 세계를 여행해 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가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가 될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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