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흔한 구원물 소재의 BL이다. BL뿐만 아니라 일반 로맨스에서도 흔하디 흔한 클리쉐.
주인공 둘 중 하나가 어릴 때 생명의 위협으로 부터 자신을 지켜준 사람을 마음에 품고 기다리다 결국 차지하는 이야기.
이 작품은 흔한 구원물임에도 작가의 필력과 인물들의 매력덕분에 재미가 있다.
역시 '흔한 소재를 누가 어떻게 쓰느냐' 가 제일 중요하다. 너무 사차원적인 소재는 흥미가 떨어지고 클리쉐범벅에 필력이 떨어지는 책은 대충 몇 장 씩 건너뛰며 보다가 다신 안열어보게 되니까.
주인공 에단은 11년 전인 어릴 적 자신을 살려준 라파엘에게 동경을 품고 8기사단에 들어온다.
기사단에는 서열이 있는데, 누가봐도 위험하고 가장 중요해보이는 마물정화의 임무는 8기사단이 맡고 있고 그 위의 기사들은 수도에서 점잖은 임무를 수행한다. (그러다 나중에 단체로 후회하지만.)
성력의 충만함은 물론이고 귀족출신인 에단은 1기사단에도 충분히 들어갈 수 있었지만 기어코 우겨서(사랑한다고 고백하며 키스하기~) 8기사단에 입단한다. 라파엘레는 자신을 사랑한다는 에단의 말을 흘려듣고 '그거 그냥 정욕이야' 라고 치부한다. 그러고선 좀 상식에 맞지않게... 내가 일으킨 정욕이니 내가 해소해줄게라는 마음가짐으로 한 번씩 못참고 찾아오는 에단과 몸을 잇는다.
피곤한 상태에서 하다 잠들기도 부지기수라고;;; 둘 다 동정공수라 그런 지 첨엔 둘 다 잘 못했나보다;;;
그런 관계를 7년이나 이어가는데, 라파엘은, 언젠가 너의 정욕이 사라지고 마음에 평화가 오면 다른 기사단으로 가라고 말하고, 에단도 결국은, 그 날이 오기라도 했으면 하고 바랄 정도로 외사랑에 지쳐있다. 하지만 겉으로는 둘 다 피곤에 쩔을 정도로 열심히 일한다. 에단의 마음만 가끔가다 지옥불이 이는 것 같지만 어쨌거나 제 할 일 하면서 평온하게 지내는 듯 했다. 칼리스토라는 신입 귀족 기사가 8기사단에 오기 전까지는.
에단이 그랬던 것처럼, 에단에게 마음을 품고 8기사단에 온 칼리스토. 에단을 좋아한다고 라파엘에게 고백하고 그의 마음에 들을 기회를 달라며 라파엘을 설득해서 들어온 건데, 무심수답게 은근슬쩍 칼리스토를 에단에게 자꾸 말을 꺼내고 에단은 칼리스토가 혹시 자기처럼 라파엘을 동경해서 온 건 아닌 지 불안해하고 질투한다.
결국 칼리스토에게 고백을 받고 그의 입단 전후의 사정을 모두 알게 된 에단은 다시 한 번 라파엘에게 거부당했다는 괴로움으로 반강제로 라파엘을 안고, 둘은 서로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한다.
라파엘은 이걸로 일단락됐다고 생각했을 지 모르지만, 에단은 치명적인 이 상처를 마음 깊이 묻는다.
일방적인 짝사랑을 하지만, 상대는 계속 내게 상냥하고 잠자리까지 기꺼이 받아주며 그에게 달리 좋아하는 사람도 없다면, 그 관계는 행복일까?
어떻게 보면 그 사람에게 오직 나밖에 없는 건 맞고 인간으로써 나를 분명 좋아하는 것도 맞고 그 관계를 7년씩 이어왔다면, 충분히 '연애'라고 생각해도 될까?
두 주인공의 내면의 갈등이 굉장히 치밀한 작품이다.
라파엘만을 사랑하는 에단이지만, 라파엘이 너의 마음은 정욕이라고 한 말을 있는 그대로 믿고 정욕이 사라지길 기다리는 에단. 그런데 사랑이 맞는 것 같아서 괴로운 에단. 하지만 돌아오지 않는 일방적인 애정에 괴로운 에단.
집착하지 않는 신의 사랑이 진짜 사랑이라고 믿는 라파엘. 그래서 에단의 행복만을 바랄 뿐 그를 독차지 하려는 마음은 없다는 라파엘. 하지만 에단이 곁을 떠나고서야 그의 빈자리를 깨닿는 라파엘.
본편만으로도 충분히 사건과 L이 가득한데, 외전까지 듬뿍이라 더더욱 즐거웠다.
이미누님 작품은 항상 소재도 좋고 글도 잘 쓰시지만 뭔가 약간씩 아쉬운 마음이 없지 않았는데 이 작품은 본 중에 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