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어붙은 여자
아니 에르노 지음, 김계영 외 옮김 / 레모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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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몇 번이나 소름이 돋았는지 모르겠다. 읽는 내내 연필을 들고 밑줄을 쭉쭉 긋게 만드는 문장들이 파도처럼 눈앞에서 넘실거렸다.

어린 시절부터 결혼하고 애를 낳고 기르기까지, 여자의 일생이 그려진다.

애를 잔뜩 낳아 자신들의 삶을 재앙 속에 내맡겨버린 '비정상적인 정상'의 시대에서 살았던 할머니들, 여자라는 전통적인 인식과 의무를 무시하고 딸을 키운 그 시대엔 평범하지 않았던 어머니, 결혼생활과 육아와 일을 저글링 하며 아슬하게 살아가는 이 책의 화자, '여자'

자신을 '여자'답게 키우지 않으려는 어머니의 태도로부터 시작된, 사춘기와 대학생활을 거쳐 만들어 온 '남자로부터 독립된 여성'으로서 살겠다는 의지가, 연애를 하면서부터 삐걱거리고 결혼과 육아를 거치면서는 너덜너덜해진다. 이런 '수련'기간을 거쳐 처지가 익숙해져 버리게 되고 종국에는 '누구의 아내'로서 남는, '얼어붙은 여자'가 되어 버린다. 다르지만 내 얘기다. 이것은 다르지만 당신의 얘기고 다르지만 모든 여성들의 얘기다.

청소년기의 혼란스러운 감정의 소용돌이, 남자를 만나고 결혼하는 과정, 애를 낳고 내 일을 놓지 않으려는 발버둥의 그 모든 날들이 적나라하다. 날카롭고 정확하게, 감정을 표현하는 날것의 문장들을 마주할 때마다 눈물이 나왔고 긴 한숨이 나왔다. 실리콘 수저로 밑바닥에 들러붙었던 지난 묵은 상처들을 박박 긁어내 내 앞에 내보이며, 우리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거지? 라며 끝없는 질문을 던진다.

시대는 변하고 있고 지금의 젊은 여성들은 과거보다 독립적이다. 그러나 여전히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당하는 부당함이 존재한다. 내 자궁에 대한 잔소리와, 육아에서 공포심과 죄책감이 들게 하는 방법들은 여전하다.

책을 읽고 두 딸들을 바라본다. 나는 우리 애들이 어떻게 살기를 바라는지 생각해 본다. 여자에게 주어지는 '완벽'이라는 책임에서 벗어나길 바란다.

세대를 초월해 여자들이 서로 연대하지 않으면 얼어붙은 여자는 결국 나의 모습, 내 딸들의 모습이 될 수 밖에는 없다.

📖 가정용품 광고에 나오는 항상 미소 지으며 광택을 내는 젊은 여자의 이미지로 서서히 변화하고 있다고 느꼈다. 하나의 이미지에서 다른 이미지로의 변화는, 내가 다시 만들어지는 수련(修練)의 역사다. (186p)

📖 가정주부가 되는 것, 나의 공포, 또 한편으로, 독신녀로 사는 것, 텅 빈 존재가 되는 것...우리는 자신의 삶과 자신이 바랐던 삶을 비교하지 않고, 다른 여성들의 삶과 비교하기에 이른다. 결코 남자들의 삶과 비교하지 않는다. (236p)

얼어붙은 여자 출간 후, 아니 에르노는 이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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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고풍 요리사의 서정
박상 지음 / 작가정신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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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빈티지, 유머의 세 주제가 펼치는 판타지 소설이며, 시를 향한 연가이기도 하다. 서사 위에서 서정의 파도타기를 하는 기분이다. 🌊 

시인들, 빈티지한 시집들이 많은 한국을 흠모하는 삼탈리아, 한마디로 삼탈리아에선 K-詩 열풍이 한창이다.  시를 읊거나, 시집 자체는 화폐처럼 통용된다.  시를 좋아하지 않으면 갈수도 없는 나라다. 쥐똥만 해도 시심이 있다는 이유로 목숨도 구한다.  그 곳에서 이원식은 결국 소원하던 펠리치아노 레시피의 비밀을 알게 된다.  삼탈리아답게 그 비밀은 이원식을 시적 세계로 인도하고 과거의 상처가 아물게 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한다. 

화자 이원식은 조반니 펠리치아노의 시집을 읽을수록 음식이 고픈 기분이 들었다지만 나는 이 소설책을 읽을수록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시인들의 시집을 찾아 읽고 싶은 욕구가 강하게 들었다.  박상 작가님의 표현대로 시를 읽어도 '똥가루 같은 표현력밖에 못 남기는 인간'일지라도 말이다.

거침없는 대사와 표현, 깐따삘라같은 판타지 상황에 다소 당황할 수도 있겠으나, 우리 인생이 그리 고상하지 않다는 걸 알기에 나는 재미나게 읽었다.  호불호는 있을 것 같다.

한 때, 아트락에 심취했던 나는 라테 에 밀레가 나와 반가웠다. 

📖 빈티지 얘기로군요. 인공지능이 이해 못 하는 맥락 중 하나 (63p)

📖 사부가 말한 유머란, 결국 내공의 탄력을 말하는 게 아니었을까. (189p)

📖 시(詩, 時의 중의적 표현이 아닐까 🤔) 공간을 이해하게 되면 관점과 태도가 달라지지. 뭘 보든, 뭘 하든, 뭘 생각하든. (251p)

📖 인생이란 누가 쓰는 각본인지 몰라도, 환상성을 조금 가미하지 않으면 견디기 힘든 건지도 모른다. (33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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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나와 아레스 - 제17회 '마해송 문학상' 수상작 문지아이들 166
신현 지음, 조원희 그림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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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즐거움 중 하나는 내가 경험해보지 않은 것을 책을 통해 간접 경험해 보는 것일 것이다. 이 책은 우리가 쉽게 경험하기 힘든 경주마의 세계를 보여준다. 생소한 용어들이 등장하고 생경한 상황이 벌어지지만,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해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경주마들이나 기수들의 일상이 누구보다 익숙한 새나와 루나 자매는 아테나와 아레스라는 자마들을 통해 인생의 목표나 어떻게 살 것이냐에 대한 진지한 물음에 답을 조금씩 얻어 간다.

혈통에 의해 몸값이 정해지고 경기장과 도살장이라는 가야 하는 길이 완전하게 달라지는 아테나와 아레스를 보면서, 뛰는 것을 좋아하지만 그것이 경주 우승을 위한 학대로 변질되고, 자신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 밖에 없는 것처럼 트랙을 탈주해버린 아테네를 보자니, 우리 아이들의 모습들이 보이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정해 놓은 트랙 위에 올라서 눈가리개를 한 채 목표를 위해 달린다. 늦은 밤, 겨우 잠자리에 들던 큰애가 대학을 왜 가고, 공부는 왜 해야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한 어느 날이 떠오른다.

세상에서 가장 친한 자마 아테나와 아레스는 그들의 혈통이나 운명과는 상관없이 푸른 초원을 자유롭게 다니는 날만을 꿈꿨을 것이다.

경주가 좋은 말이 있고, 공부가 좋은 학생이 있고, 기수가 되고픈 새나가 있고 다른 꿈을 찾아 지금도 고민하는 많은 아이들이 있다.

부끄럽게도 선뜻 트랙 밖에도 너의 세계가 있다고 말하지 못 했던 나는, 아이들이 이 책을 읽으며 어딘가에 자신만의 트랙이 있다는걸, 트랙은 한 개만 있는 게 아니라는걸 발견하고 위로와 위안을 얻기를 바랄 뿐이다. 어느 길이든 기다려주고 박수쳐 줄 어른이 되라고 나 또한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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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만세 소설, 향
오한기 지음 / 작가정신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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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십리도서관 상주 작가의 환타스틱 대 환장 근무 일기 같은 이 소설은 b급 감성을 잔뜩 품은 블랙코미디다.

생각나는 대로 갈지자를 그리며 쓴 것 같지만 읽는 중간중간 통념이나 사회비판,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진진이 그의 소설에서 그랬던 것처럼 상주작가 또한 '엉뚱한 지점'에서 파고든다. 그 파고듦은 낯설게 느껴지지만 이런 낯섦이 때로는 '끄끄끄끄'를 유발하는 유쾌함 때문에 나는 재밌었다. (똥으로 시작해서 똥으로 끝남)

리얼리티에 대한 강박이나 작가로서의 일종의 사명감, 책임을 벗어나 그 무엇에도 자유로운 글쓰기를, 작가는 원하는구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주인공이 자신의 소설에 대한 편견에 대한 변명을 하는 부분이 있는데,
📖실제 소설은 자동기술법처럼 쓰인 것 같지만 철저한 계획 아래 존재한다 (59p)
이 대목에서 실제 이 소설(인간만세)도 철저한 계획 아래 쓰인 건가 싶었는데 오늘 낮에 알라딘 라이브 북토크에서는 그냥 생각나는 대로 썼다고 말해서 놀랐다.😳

마지막, 강보원 문학평론가의 오한기론은 소설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오한기 작가의 이전작들을 읽었다면 더 재밌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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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일보 송가을인데요
송경화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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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협찬

'죄송한 게 너무 많은 세상에서 좀 덜 죄송하고 싶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기사를 쓰겠다'라는 포부를 가지고 시작한 새내기 송가을 기자의 7년의 성장 기록.

그녀가 써 내려간 15개의 취재기를 읽으며 분노를 느끼기도 하고 마음 한구석이 아련해지면서 슬퍼지기도 하고 때론, 피식 웃기도 했다. 끝부분 반전 치는 것도 참 매력적이었다.

취재기를 읽으며 팩트로 드러난 사건의 표면을 읽지만, 때론 표면을 뒤집는 이면의 추함도 함께 들여다본다. 현상의 표면만 읽고 속단해 버리는 일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깨닫는다. 생각해 보면, 미담이 괴담으로 또는 괴담이 미담으로 바뀌는 사건들을 우린 얼마나 겪었던가.

실체를 밝히기 위해 사회의 가장 어두운 곳도 서슴지 않고 뛰어들어야 하는 송가을 기자의 분투기를 보고, 다시 한번 신문을 들춰 기사를 꼼꼼하게 읽어 본다. 그리고 모든 기자들을 기레기라고 싹 쓸어 말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어느 분야든 직업 소명의식을 다 하는 이들은 분명 있을 테고, 송가을 기자처럼 누군가에(사회적 약자, 강자에게 유린 당하는 피해자들) 도움이 되는 기사를 쓰고자 하는 기자들은 여전히 많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그리고 이 책은 시리즈로 계속 나왔으면 좋겠다. 비록 소설일지라도 내가 만나기 힘든 다양한 계층의 목소리를 들어보고 싶고, 사건 이면의 진실도 들여다보고 싶다. '법정에서 만난 중학생들'과 '위안부를 위한 눈물'편의 마지막 반전을 보니 더욱 그러하다.

📖 정의, 거창한 거 아닙니다. 우리 일상에서 사과, 쫌 쪽팔리지 않게, 구린 거 없게, 할 수 있는 거는 그냥 막 막 좀 해버리는 거, 그래서 마음 한구석에 부끄럽거나 쪽팔리거나 이런 느낌 남아 있지 않게 하는 거, 저는 그냥 그거라고 생각해요. (35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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