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닌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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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닌은 나보코프가 롤리타 이후 발표한 소설이다. 나보코프의 소설은 아직 접하지 않았고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을 읽을 때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2012, 을유문화사)를 읽은 게 다인 내가 그의 작품으로 처음 만나는 작품이다.

미국으로 망명해 웬델 대학에서 러시아어를 가르치는 일을 하는 티모페이 프닌은 첫 장에서부터 우스꽝스럽게 등장한다. 강연장으로 가는 기차를 잘못 탄 해프닝을 시작으로 프닌의 외모는 우습고 행동은 어리숙하고 문법과 어휘가 오류투성이인 그의 미숙한 영어는 남들에겐 조롱감이다. "그가 미국 유머를 이해한다는 것은 행복할 때조차 불가능하다."

🔖그날 프닌이 어딘가에서 들었던(하지만 더 알아보고 싶지 않았던) 어떤 말이 이제야 그의 마음을 괴롭히고 짓누르기 시작했다. 우리가 저지른 불찰이나 우리에게 저질러진 무례한 언행이나 우리가 못 본 척 무시한 위험은이렇게 회상됨으로써 우리의 마음을 괴롭히고 짓누른다.(120p)

그가 러시아 문학작품을 읽으며 과거를 떠올리며 추억에 잠기는 모습이나, 전처의 부탁으로 전처의 아들에게 주기적으로 용돈을 보내고 그와 편지를 주고받고 그의 선물을 사는 모습, 소비에트 다큐 영화를 보며 눈물을 줄줄 흘리고, 때때로 그는 어린 시절의 자신과 부모님의 환각을 보는 프닌. 웬델에서 종신 재직권을 따지 못한 그가 결국 대학을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 초반 우스꽝스러워 조롱했던 프닌에게 연민의 감정이 든다.

7장에선 드디어 푸닌을 서술한 진짜 화자가 등장하고 프닌의 진짜 과거가 드러난다. 그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티푸스로 사망했으며, 그는 전쟁 중 통신병으로 복무했으며 적화된 지역을 탈출하고, 히틀러로 인해 프랑스를 포기하고 미국으로 망명하기까지 그간 거쳐온 인생은 녹록지 않았다. 게다가 그의 부인은 불륜남과 떠나 이혼까지 당했다.

프닌이라는 캐릭터는 웃기면서도 슬프다. 그의 행동이나 말이 어설프고 미덥지 못해도 그의 진실을 알게 되면 그를 조롱하거나 미워할 수 없다. 프닌을 읽고 생각해 보게 된다.우리가 사람을 판단하는데 우선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로 인해 진실은 가려지고 조롱하게 되는 경우가 있지 않은지..희극 속에 감춰진 비극을 우리는 애써 외면하지 않는지..프닌은 우리의 민낯을 드러낸다.

책을 읽으며 문법과 어휘에 오류가 많은 프닌의 말을 그대로 독자가 느끼도록 번역에 많이 애를 쓴 게 돋보인다. 그래서 일부 장면에선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틀니를 맞췄을 때, 빅터를 위해 축구공을 살 때, 운전면허 시험 볼 때....등) 초반 번역이 껄끄럽다 느낀 것은 그대로 그것이 프닌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프닌의 말이 그를 더욱 우습게 보이게 하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자기의 은밀한 슬픔을 그냥 좀 가지고 있게 내버려둘 것이지. 안 그렇습니까?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진짜로 소유한 것이 슬픔 말고 뭐가 있습니까?" (76p)

🔖프닌은 근엄한 소나무들 밑을 천천히 결었다. 하늘이 죽는 시간이었다. 그는 절대 군주 유형의 신은 믿지 않았다. 그는 막연하게나마 유령들의 민주주의를 믿었다. 죽은 존재들의 영혼들이 각총 위원회를 꾸리고 있지 않을까, 그들의 끝없는 회의가 살아 있는 존재들의 운명을 보살피고 있지 않을까 하는 믿음이었다. (20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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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초록 천막 1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10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지음, 승주연 옮김 / 은행나무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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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격동기 러시아 사회와 그 흐름에 떠밀린 개개인의 삶이 직조한 커다란 초록 천막, 슬픔과 기쁨과 고통과 사랑 그리고 죽음이 보석처럼 박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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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라이프
가이 대븐포트 지음, 박상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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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고흐의 <양파가 있는 정물>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귀 절단 사건 이후에 그려진 이 그림에는 귀가 달린 올리브 오일병과 양초접시가 나온다. 라스파이의 의학책은 고흐의 빈민과의 연대를 보여주며 양파는 당시 회복기 환자를 위한 가장 저렴한 음식이다.

정물화의 각 정물이 상징하는 것을 이해하며 작품을 보면 우리는 작품을 더 깊이 감상하고 정물 이면의 미지의 세계를 신나게 탐험할 수 있다.

'예술과 문학에 나타난 정물 전반에 대해 다루며, 정물이라는 소재가 전달할 수 있는 가장 깊은 곳까지, 가장 넓게 탐색'한 이 책을 전부 쉽게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정물에 대한 다양한 사유를 할 수 있어 흥미롭게 읽었다. 연대순으로 특징이나 주제별로 엮어진 것이 아니라 역자의 말처럼 콜라주적인 에세이라 감상이 때론 여기저기 분산되고 흩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이 정물화가 가진 다양한 의미와 해석 때론, 이중의 의미나 말장난 같기도 하고 한없이 높기도, 천해보이기도 한 카멜레온 같은 면을 보여주는 것 같다.

1장은 정물의 기원과 의미, 
2장은 두상으로 상징되는 인류와 예술, 문명의 순환, 
3장은 사과와 배를 통해 정물의 의미를 살피고 
4장은 니체와 데 키리코의 토리노에서 시작해 밀턴, 키츠, 셸리의 시 속에 드러난 정물을 살펴본다.

저자는 4천 년 전, 조상에 대한 숭배로 영혼이 먹을 수 있는 그림을 그려 넣은 고대 무덤 속의 음식 그림이 아마도 정물화의 기원일 것이라고 말한다. 정물화는 마치 짧은 시나 소네트처럼 화가들의 연습장이고 고백과 명상의 형식이다.  물론, 정물화를 천하게 여긴 이들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 시에서 풍부하게 등장하는 정물화는 '문명의 장으로서의 식탁을 지켜왔다. 

🔖정물이 지속되는 한, 두상이 우리의 운명이다. (106p)
정물에는 책이나 악기, 돌, 잎들도 있지만 고전적인 흉상, 두상도 있다. 코넌 도일의 작품들, 포의 <어셔가의 몰락>의 정물, 두상, 흉상은 어떤 의미를 갖고 그 안에서 펼쳐지는 사건의 맥락을 이해하게 한다. 

문명의 한 쌍, 사과와 배가 정물화에서 의미하는 것도 흥미롭다.
🔖사과는 토착화가 됐지만, 배는 아직 유럽의 산물로 남아 있다는 소로의 생각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과는- 상이고, 유혹이고, 보상인- 상반된 의미를 지닌 상징물로 사랑과 증오, 조화와 불협화음을 동시에 의미한다. 반면 배는 카리스마 자체다. 게다가 사과처럼 이중적인 의미를 가질 때도 배는 둘 다 좋은 의미다. 실제로 우리는 배 안에서 자연의 조화를 찾는다.(123p)

니체가 토리노에서 느낀 멜랑콜리와 노스탤지어가 이후 정물화의 의미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알려주며 책은 마무리된다.
🔖시대를 거듭하며 정물화의 운명은 혁신에서 진부함으로 흘러가고 있으며, 낮익음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필연적으로 정물화는 예술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스타일의 선구자로 또는 전형으로 스스로를 재생해 왔는데 말이다. (208p)


책을 다 읽고 예전에 읽은 책에서 본 그림이 떠올랐다.
제우스와 헤르메스는 어느 날 인간의 모습으로 어떤 마을에 내려와 하룻밤 쉬어 갈 수 있게 요청하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는다.  마지막 바우키스와 펠레몬의 집을 찾았고 이 노부부는 이 나그네들 집으로 안내하고 먹을 것을 대접한다.  식탁 위는 초라해 보이지만 가난한 이 부부는 자신들이 가진 최대한의 것들로 대접하는데 이에 감동한 제우스는 술병의 술이 떨어지지 않게 했으며 이 집을 제외한 모든 마을 사람들이 물에 잠기는 벌을 내린다.

🔖바우키스 할멈은 박하 이파리로 식탁을 닦고는 여기에다 알락달락한 딸기, 가을에 따서 겨우내 포도주에 절여두었던 버찌, 꽃상추, 순무, 치즈 한 덩어리, 뜨겁지 않은 재에다 구운 달갈을 질그릇 접시에 얹어 내놓았네. 무늬가 놓인 술병과 안에다 밀랍을 입힌 너도밤나무 술잔도 나왔네 (이윤기, 그리스.로마 신화)

가이 대븐포트의 <스틸라이프>를 읽고 다시 식탁 위 정물들을 바라본다.  책을 읽기 전엔, 단순한 먹거리로 보였지만 책을 읽은 후엔 정물이 담고 있는 노부부의 아낌없는 대접과 정성을 느낄 수 있었다. 

다 이해하진 못 했지만, 정물을 보다 더 입체적으로 볼 수 있는 관점을 심어준 책이다.  질서 없이 놓인 정물이라도 나름의 이유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번역이 매끄럽고 친절한 각주와 독자를 배려한 편집이 돋보인다. 무엇보다 정물화 그 자체인 책의 물성이 아름답다.


*을유문화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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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교사들
안 세르 지음, 길경선 옮김 / 은행나무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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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이것은빨간맛 빨간책 l

강렬하고 뜨겁고 몽환적이다.
예상을 철저하게 빗나간 내용!
모든 감각이 예민하게 살아난다
관음증,여성의 성, 페미니즘, 육아, 가족, 부부..
뜨거운 날씨만큼 내용도 뜨거운 책
읽고 나니 무수한 질문만 남는다.

이것은 fairy tale인가..
한 여름밤의 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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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크 - 제28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김희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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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안에서 시작되었다.
최초의 감정, 최초의 자아, 최초의 세계.
그중 오직 최초의 꿈만이 우리 세계의 바깥에 미래를 펼쳐놓았다.
이제 이곳에서 우리는 꿈의 미래를 안으로 끌어온다.
믿고 기도하여 결국 가장 좋은 것이 내게 온다. (1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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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성을 다하지 않으면 살기 힘든 현실과 열성을 다해도 살기 힘든 현실'에 살고 있는 사람들, '시간이 자신의 세계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있다. 오직 '믿음'만이 유일한 구원인 사람들.

자신의 믿음을 되찾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들은 '어려운 환경에 처한 사람들이 가장 갖기 힘든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한 게 분명'하다. '정작 희망과 믿음이 필요한 사람들은 책이 제시한 방법을 시도조차 하기 힘들다.' '간절함은 현실이 된다는 것'을 믿는 이들이 쉽게 이 세계관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공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인간의 의도가 섞이지 않은' 그저 공간으로서의 '탱크(subconscious tank:잠재의식 탱크)'가 만들어지게 됐다.

'신성한 구역'을 정해 구겨진 마음을 '다리'고 한 줄기 빛도 들어오지 않는 암흑 속인 탱크 속에 들어갈 땐 마음은 오직 믿음으로 수렴된다. 텅 빈 암흑의 '탱크'에 들어가 자신이 바라는 미래를 위해 기도한다. 꿈과 미래를 자신의 언어로 발화하며 그 목소리를 듣는 것 그러면서 진짜가 되리라고 믿는 것이다. 그곳에 자신의 믿음을 실현시켜 줄 절대적 존재, 신(神)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의 믿음이 실현될 것이라고 믿는 '믿음'만 존재할 뿐.

탱크는 어떤 절대적 존재를 맹목적으로 믿는 사이비 종교집단의 이야기가 아니다. 자신의 바깥에 있는 미래를 자기 안으로 끊임없이 끌어들이고자 하는 사람들의 처절한 믿음에 대한 이야기다.

🔖어떤 믿음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살기 위해 반드시 붙들어야 하는 문제였다. (106p)

가족이 자신의 정체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길 바라는 둡둡, 그는 그 믿음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과 '공통의 꿈'을 꾼다면 자신이 꿈꾸는 미래는 반드시 올 것이라고 믿는다. 결국, 그가 꿈꾼 미래는 현실이 됐다. 무지개 깃발을 손에 든 둡둡의 아버지를 본 양우가 흐느껴 울던 마지막 장면은 내내 마음에 남아 있다. 양우의 눈앞에 보인 것인 그렇게도 둡둡이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던 미래다.

'믿음이라는 것은 자신도 몰랐던 자신을 발견하고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 그리고 우리가 믿을 것을 '사랑' 뿐임을 알게 한다.

작가의 첫 작품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흡입력 있는 전개와 살아있는 캐릭터들이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했다. 무엇을 '믿는다'는 것이 어리석어 보이기까지 한 요즘, '믿음'이라는 것과 무엇을, 어떻게 믿어야 하느냐까지 다양한 물음을 던진 묵직한 소설이었다.

🔖도선은 확신했다. '그곳'에서 기도한 모든 것은 이루어진다. 바깥의 꿈과 미래를 믿는다면 그것들은 절대 도선을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 그것은 반드시 올 것이다.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좋은 것의 모습을 하고 도선의 '안'으로 올 것이다. 도선은 그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14p)

🔖탱크에 갈 때마다 어떻게든 ㅇ 상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희망의 실체이다. (139p)

🔖결국 현실은 우리가 과거에 생각했던 미래랑 닮게 되니까요.(147p)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거기에서 죽었다고. 그렇지만 그게 탱크의 잘못이나 그 사람의 잘못은 아니었다고. 그것은 무언가를 강하게 믿고 희망을 가질 때 따라오는 절망의 문제였고. 세계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꼭 한 번은 맞다뜨리는 재해에 가까웠다고 그러니 언젠가 당신에게도 재해가 온다면 당황하지 말라고. 대신 잠깐 기다리는 사람이 되어보라고. 그러면 한 번도 기다린 적 없던 미래가 평생을 기다린 모양을 하고 다가오는 날이 올 거라고. (26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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