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분 위픽
신민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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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레이스에 참가했다. 앞서가는 자들의 등을 바라볼 수 있었던 건 내가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주역이 아니더라도, 우승자의 영광을 누린 적 없어도, 트로피를 받지 못했다고 해도 내가 달렸다는 사실은 변합없다. / p.73

솔직히 기대 1도 없이 폈다가 덮는 순간 위픽 1등으로 올려버림.

심지어 이거 저번달 말에 다 읽었는데 오늘 또 읽느라 이제야 후기를 쓴다.


어떤 장면 하나가 좋았다기 보다 그냥 모든 장면들이 유기적으로 돌아가면서 너무 좋았음. 내 친구를 힘들게 하는 타인을 지켜보는 모난 마음, 다른 사람을 쉽게 감정 쓰레기통으로 쓰는 사람이 내게 퍼붓는 마음을 '폭력적인 포옹'이라고 표현하는 섬세함, 그러면서도 '미움과 원망은 수명이 터무니없이 짧았다'(52) 라고 하는 반짝거림.


짧은 분량임에도 상당히 성찰적이다. 작가는 그냥 상처에서 거리를 두고 직시한다거나 현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그냥 받아들이는 것 보다는 계속 들여다보고 골라낸다. 불행이나 상처는 이런 열등감이나 작은 마음들에서 기인한거야, 이 정도의 고통은 살아가는 데 필요해, 이건 회복할 수 있을거야, 이런 감정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아. 이런 식으로.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추분처럼 무언가 잃은 자리에 그만큼의 또 다른 좋은 것들이 채워지는 기분의 책이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모난 마음들만 안고 갈 수 있게끔.


+ 이 책 다 읽으면 남는 거 ? 인덱스가 덕지덕지 붙은 책 한 권과 이걸 끌어안고 우는 여자 한 명

++ 줄거리 설명에 '포켓몬GO를 켜고 호수 공원을 걷던 ‘신진’에게 죽은 은조의 의식이 달라붙는다' 라길래 귀신 나오는 이야기인가봐! 하고 기대했는데 아니었음. 근데 더 좋았어...



*출판사로부터 도서만을 제공받아 읽은 뒤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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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미에르 피플 - 개정판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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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여자 네티즌은 되고 싶지만 될 수 없는 여자 롤 모델을 우상화하는 반면, 젊은 남자 네티즌은 갖고 싶지만 가질 수 없는 여자들을 파괴하고 싶어 한다. / p.191

띠지부터 말도 안됨

몇 안 되는 작가가 사랑하는 캐릭터들이 전부 여기에 있는 것 같대...이런 띠지 문구 듣도보도 못했음. 기대 안 할 수가 없잖아요.


신촌의 '뤼미에르 빌딩'에서 거주하는 이들의 이야기로 그 빌딩은 정말로 작은 세계의 축소판이다. 가출 청소년, 무당, 인터넷 여론 조작팀 등 약간은 평범하지 않지만 분명히 곁에서 같이 살고 있는 이들. 완전히 판타지도 아니고 완전히 현실에 발을 붙인 것도 아닌, 이상하게 땅에서 부유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야기들이 현실의 수많은 이슈들을 한번에 꿰뚫어버린다.


어쩌면 '뤼미에르 빌딩'은 작은 사회 실험의 장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사정을 안고 내일 죽을지 살아갈지를 고민하는 인간들이 서로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완전히 빌딩의 외부인인 내가 이들의 이야기를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는지에 대한.


분명히 곁에 있다는 걸 알지만 마치 유령처럼 변해버린 사람들, 그림자 속에서 빛을 향해 응시하는 시선들을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감각적으로 탐구하는 작가 특유의 시선이 뤼미에르 빌딩에 사는 사람들을 통해 날카롭게 빛난다.



+ 사실 인터넷 여론 조작팀의 이야기를 하는 게 굉장히 장강명 작가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약간 오래된 느낌은 나는데 여전히 현실에 어느 정도 통용되는 것이...ㅎ....

+++ 개인적으로는 808호 쥐들의 지하 왕국이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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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미술사 - ‘정설’을 깨뜨리고 다시 읽는 그림 이야기
박재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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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가장 재미있는 건 정사보다 야사, 정설보다는 속설이 아니던가.


고흐는 평생 그림을 하나도 못 팔았다는 흔히 알려진 말부터, 반려동물로 개미핥기(..!!)를 키웠다는 달리, '무직' 모리조(...ㅋ), 흔히 아는 <절규> 속 인물은 사실 절규가 아니라는 이야기 등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교양 미술사의 단락들을 재검토해보는 이야기는 재미가 없을래야 없을 수가 없다.


미술 작품만큼이나 공간도 시대의 취향과 이념을 드러내는 언어다. 하얀 벽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그것이 왜 선택되었는지를 질문하는 것, 현대 전시 문화를 비판적으로 읽는 첫걸음이 될 수 있다. / p.257


주어진 정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뒤집어 생각해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을 이 책을 읽는 내내 저자는 효과적으로 설득하고 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 '남성 중심의 시각에서 기록된 예술사' 전부 이론적으로 알지만 미술품들을 들여다보던 관람객들은 단 한번이라도 그 이면을 들여다본 적 있었는가. 전시관의 벽은 당연히 희고, 오기된 작가명도 거기에서 그렇다 하면 그대로 받아들이던게 현실이었으니까.


마치 고정된 것 처럼 붙박힌 미술사의 정설을 깨부수고 시대의 욕망과 주류의 철학에 따라 유동적일 수 있다는 도전적인 시선은 '누군가에 의해' 씌여진 예술의 가치를 전복한다. 특히 예술이 예술 자체만으로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공간의 미학과 정치가 결정한다는 말은 마치 환경에서 벗어나 오롯하게 홀로라는 사실이 불가능한 현대 그 자체와도 같지 않나. 그런 의미에서 어떤 미술사를 다룬 책보다 가장 현대적인 책이었다.


+ 저런 의미에서 한겨레출판의 미술 관련 책은 대체로 재미있는데, 『언니네 미술관』 (이진민, 2024) 도 매우 재미있다. 같이 세트로 묶어도 꽤 어울릴 것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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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주
강성봉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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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이 중요한 게 아니야. 그걸 깨고 나아가야 진짜 네 길인 거지. 한번 쓰러진 나무가 다시 서긴 어려운 법이지만, 너는 물을 끌어올 방법을 알고 있다. / p. 24



이 책에는 말씀의 나라로 승천할 수 있는 아벨과, 그렇지 못한 '가인'이 있다. 可人, 인간인 것 조차 허락받아야 하는 존재. 유림과 해수는 이런 걸 가르쳐주는, 사이비 냄새가 짙은 '하나의말씀'이라는 보육원에서 길러진다.

선함과 자비 따위를 입에 올리면서 사방이 막힌 벽돌집 안에서 누구보다 잔인해지고 교활해지는 어른들의 학대를 벗어난 두 아이의 로드 무비. 그렇게 그들은 破四柱, 주어진 운명을 부수는 여행길에 오른다.


실재와 환상을 오가는 듯한 분위기는 이 말을 하는 것이 종교집단에서 가둬져서 길러진 아이들의 시선임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 그 아이들의 세상이 이런 것임을 인지하고 읽을 때 학습된 아이들의 관념이 어떤 폭력 속에서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왜 유림에게 '해수'라는 존재가 필요했는지. 그렇기에 아이들은 망산(邙山)을 넘어 황천과 명도를 걸어야 했다. 폭력에 희생된 무수한 유림과 해수같은 아이들을 애도하고 기억하는 데에서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으므로.

  

길의 끝이 빛일지, 어둠일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아이들은 다시 되돌아갈 수 없다는 것. 겨우 벗어난 벽돌집은 너무나도 끔찍한 괴물의 아가리와 다름 없었으니까. 이 때 작가는 아이들의 등을 슬쩍 밀어준다. 아이들이 작은 희망을 가지고 앞으로 가기를 바라면서. 어디선가 이 글을 읽을 길을 잃은 무수한 사람들을 위해서. 섣부른 위로와 성마른 희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곳에서든 구원과 희망은 나 자신의 몫이라고.


+ '인생은 미로고, 미로를 통로로 만드는 건 우리 자신의 선택과 의지다.' 추천사 그대로의 책이었다.


불빛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유림이 걸음을 멈추지 않은 건 이 길이 막다른 골목이 아니라 언젠가는 끝이 보일 터널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계속 걷다 보면 환한 빛을 마주하리라는 작은 희망이 유림의 발걸음을 앞으로 이끌었다. / p. 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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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우정과 무가치한 연애들 - 연인도 부부도 아니지만 인생을 함께하는 친구 관계에 대하여
라이나 코헨 지음, 박희원 옮김 / 현암사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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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로맨틱 관계는 우리 삶을 형성하는 유일한 결합이 아니다. / p.352

사회는 인간들에게 학습을 시킨다. 필히 로맨틱한 관계가 수반되는 다른 성별이 결합하여 가정을 이룰 것을. 어릴때부터 배우는 소꿉놀이부터 길거리의 온갖 미디어들도 연애의 다양한 형태를 보여준다. 눈치채지도 못하게 전방위에서 밀려들어오는 치밀한 압박 속에서 그 외의 선택지는 박탈된다. 


어째서 우정은 연애를 대신할 선택지가 되지 않는가, '사랑'이라는 단어에 로맨틱한 관계가 수반되지 않는 것을 끼워넣을 수는 없는 걸까. 연애와 결혼 안에서만 우리는 인생의 반려를 찾을 수 있는 것일까.

심지어 흔히 밸런스 게임을 하면 사랑과 우정 중 무엇을 택할거냐고 묻기도 한다. 왜 둘 중 무엇을 택해야 하는가, 우정은 어째서 사랑이 될 수 없는가.


삶의 동반자라면 마땅히 '로맨틱'해야 한다는 강력한 프레임. 그러니까 깊은 우정을 쉽게 사랑이라 단정 짓는 것, 혹은 사랑이라 하면 반드시 성적 관계가 수반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보편적'인 관계의 공식에서 벗어난 이들의 용감한 걸음들. 연인도 부부도 아니지만 인생을 함께하며 기꺼이 나의 반쪽이라 부를 수 있는 친구 관계에 대한 반가운 사례들이 여기에 있다.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이 하나뿐이 아니라는 건 모두가 공감하는데, 어째서 인생의 동반자를 고를 때는 단일한 관계만을 강요하는가. 로맨틱한 관계의 연인만이 나의 전부여야 한다는 생각을 버렸을 때, 오히려 더 건강한 파트너십을 만들어내고 더욱이 낭만적으로 나를 지탱해주던 우정을 볼 수 있게 된다. 결국 이는 세상을 벗어나는 일이 아닌 세계를 확장시키는 방향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런 '새삼'의 일을 우리는 자주 이야기해야 한다. 이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게 되도록. '굳이', '새삼'이라는 부사가 붙지 않도록. 



+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나 『여자 셋이 모이면 집이 커진다』 같은 삶을 꿈꾸는 친구들이라면 이 책을 싫어할 수가 없다. 그런 마음 맞는 친구들끼리 교환독서 하면 재밌을 것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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