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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아홉, 늦었다고 하기엔 미안한
한설 지음 / 예담 / 2014년 6월
평점 :
나의 20대가 끝나감을 알리는 스물아홉이 다가오고 있다. 아홉수, 그러고 보면 아홉수를 잘 넘기는 것이 새로운 나이대를 시작함에 있어 많은 영향을 끼치는 것 같다.
원하는 대학에 가는 것이 인생의 전부였던 열아홉의 나는, 하나밖에 몰라서 그 실패가 곧 인생의 실패였다. 열등감으로 시작할 수 밖에 없었던 나의 스무살, 지금 돌이켜봐도 참 많이 아팠고 스스로에게 너무나 미안한 시간들이었다. 그리고 이십대 초반의 방황을 만회하기라도 하듯, 그 이후의 시간들은 내가 하고 싶었던 일들에 닥치는 대로 뛰어 들었다. 행동으로 옮기지 않고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의미없다는 걸, 나를 포함한 모든 이에게 온 몸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어쩌면 또 다른 의미의 방황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어찌어찌 시간은 흐르고 이것저것 뭔가 많이 하긴 했는데 도대체 뭘 한건지 모르겠는, 정리된 것도 자리 잡은 것도 하나 없는, 지금의 내가 되었다.
그래서 요즘, 스물아홉을 앞둔 나에게 자주 묻는다.
뭘 하고 싶었냐고, 뭘 하고 싶냐고, 대체 뭘 할거냐고.
그리고 자꾸만 생각한다.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지, 그 누구도 아닌 내가 행복한 삶은 어떤 모습인지.
내 나이에 숫자가 더해질 때마다 늘어나는 두려움만큼, 진짜 내가 원하는 내 모습대로 살고자 하는 그 마음도 절실해져감을 나는 느끼고 있다.
이 책에는 나와 비슷해서 공감가는 스물아홉 여주인공이 4명이나 등장한다.
일이라는 현실과 이루고 싶은 꿈 사이에서 방황하는 정인,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알 수 없는 내일 때문에 불안해하는 수정,
평온해 보이는 전업주부이지만 남모를 아픔으로 인해 전전긍긍하는 효선,
대학 5년을 다니면서 어학연수에 인턴까지 다 했지만 취업에 번번이 실패해 공무원 시험을 준비중인 민재.
그리고 이 넷을 지켜보며 함께 하는 정말 좋은 왕언니 미영. (참고로 그녀는 서른아홉이다.)
각자 놓인 상황이 다른 것처럼, 그들의 관계도 남자들은 쉽게 이해하기 힘든 복잡미묘함 속에 있다.
그녀들은 같은 듯 달랐고, 다른 듯 같았다.
그래서 위태위태한 그 시기를 건너 또 다시 함께일 수 있었던 것 같다.
사실 <스물아홉, 늦었다고 하기엔 미안 한>을 막 읽기 시작했을 때는 내가 지금 고민하는 것들에 대한 답을 스물아홉
그녀들이 주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같은게 있었다. 그래서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까지 긴장을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내가 책을
읽으면서 으레 기대하는 건,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나 따끔한 돌직구보다는 나와 닮아있는 책 속 주인공들이 내가 꿈꾸는 것처럼 멋지게 현실을
극복해내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인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을 다 읽고난 나의 마음은 한없이 담담했다. 솔직히 조금은 허탈했다는게 더
맞는 표현이겠다. 파랑새를 찾아 멀리 떠났는데 알고보니 그 파랑새는 나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더라는 진리를 다시 한번 확인한 기분이랄까. 좀 더
현실적인 결말이었다. 너의 30대도 지금 너의 20대가 그러하듯 특별히 다르지 않을 것이니 지레 겁먹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을 이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차분해진 마음으로 생각해보니 그랬다. 늘 특별한 삶, 남과 다른 무언가를 꿈꾸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스스로를 타인의 기준에 맞춰 생각하고
평가해왔다. 그러면서 내 행복은 저멀리 미뤄두고, 오지도 않은 내일을 바라보며 원치 않은 일을 하느라 오늘은 그냥 흘려 보내고 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지금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었는데 말이다. 일상이 주는 소소함과 별일 없이 산다는 것에 대해 감사할
줄 아는, 특별하진 않아도 나만의 색깔로 내 삶을 채워갈 줄 아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그래서 스물아홉의 나는, 나만의 길을 찾아갈 용기를 내야
할 것 같다. 더이상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나이가 되기 전에 말이다.
*밑줄 긋고 싶었던 내용들*
- P.38
그중에서도 스물아홉은 힘든 나이다. 20대의 방황과 이별하고 30대의 안정을 맞이하고 싶지만 이뤄놓은 것은 없고, 이렇게 계속 살아가는
것이 괜찮은지 의심이 드는 가운데, 새로운 뭔가를 해볼 엄두는 나지 않으며, 사랑을 하고 싶지만 마음에 드는 인연을 좀처럼 찾을 수 없어 이러다
서른을 맞이하게 되는 건 아닌지 전전긍긍하는......... 한마디로 압축하자면 '불안감이 최고조에 이르는 시기'다.
-p.39
정말로, 죽을 것처럼 힘이 들 때, 가장 힘을 주는 말은 '힘 내'보다 '나도 그래'라는 공감이었다.
-p.68
그동안 너무 쟀다. 혼자만 똑똑한 줄 알고 살았다. 손해 볼까 봐 두려워서, 혹은 다 가질 방법이 없을까 욕심을 부리며 망설이기도
했다. '어리석어야 이룰 수 있다'는 깨달음이 그녀의 마음속에 뭔가를 툭 하고 떨어뜨렸다.
-p.94-95
20대에는 얼굴만 예뻐도 먹힌다. 하지만 서른 무렵이 되면 사정이 달라진다. 얼굴에 생각이나 마음가짐이 반영되기 시작한다. 그 결과,
행복한 여자는 모두가 부러워할 만큼 예뻐진다. 반대로 못된 여자는 심보가 표정으로 언뜻언뜻 나타날 수밖에 없다.
-P.103
그때는 기분 나쁜 일이 있어도 하루 지나고 나면 깨끗하게 잊고 새 출발할 수 있었지. 매일매일 리셋이 가능했던 거야. 컴퓨터가 이상할
때 리셋 버튼을 누르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지.
-p.109-110
정인은 와인 잔을 들며 서른이 되어가는 자신 역시, 이 나간 자리가 하나둘 생기는 접시와도 비슷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가
나갔다고 함부로 버려지는 접시가 되고 싶지는 않다. 이가 나가고 금이 갈수록 더욱 가치가 오르는 접시가 되고 싶다.
-p.129
다른 이의 삶을 지켜보는 것과, 그것을 이야기로 정리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일이다. 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으나 그 내용을 정리하고
'해석'하기 위해서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생각의 여과 과정이 필수적이다. 사랑도, 삶도, 창작도 결코 쉬운 게 아니다.
-p.145
올해가 가기 전에 '사나운 개'같은 남자를 만날 수 있기를. 듬직한 남자, 오로지 그녀만을 바라보며, 그녀를 지켜주기 위해 언제라도
모든 걸 내던질 수 있는 남자, 그런 남자가 어딘가에는 틀림없이 있을 거라고 믿기로 했다.
-p.167
인생을 어떻게든 바꿔보려고 부단히도 노력하며 살아왔다. 노력이 그녀의 삶을 바꿀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노력으로 어쩔 수 없는 것들이 자꾸 눈에 들어온다. 자신 하나는 몰라도, 운명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까지 모두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p.172
사회적으로 뭔가를 이룬 것도 아니면서, 별로 잘하는 것도 없이 이도 저도 아닌 상태로 살아가는 중이다. 딱히 도전해 보고 싶은 일도
없다. 가끔은 있는 것 같기도 한데 그게 뭔지는 모르겠다. 남들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것 같은데, 혼자서만 도태되는 느낌이 든다. 불안해하지
말자고 스스로를 다독여도 소용이 없다. 이럴 때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은 느낌이다.
-p.176
바쁘게만 살아왔다. 뒤도 돌아볼 새 없이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왔다. 그게 효율이고 성공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과연 영혼도 그만큼의
속도로 성장했을까.
-p.177
모든 사람에겐 공평한 하루가 주어지지만 24시간 중에서 소중하고 의미 있는 시간을 건져 올리는 이는 소수다. 대다수는
순간순간을 무의미하게 날려버린다. 하지만 의미 있는 소중한 시간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 시간은 추억을 통해 영원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p.252
아무리 창피한 과거였다고 해도, 그것은 송두리째 부정되어야 마땅한 대상이 아니다. 그 안에도 분명 반짝반짝 빛나는 내가
씨앗으로나마 숨어 있었던 것이다. 1번과 3번 사이에 가려져 있는 킹핀처럼.
-p.332
나란 곧, 완성이 요원한 미완의 작품이다. 끝없이 추구하고 바뀌어야 할 게 바로 나다. 따라서 '진정한 나'는 있을 수 없는 개념이다.
나는 한시도 제 자리에 머물지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