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그가 어둠에서 빛으로 나온 영혼을 보고 웃는다면, 이 웃음에는 밝은 곳에서 어두운 굴 속으로 들어온 사람을 보고 웃는 웃음과는 다른, 큰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플라톤 <국가>-


대니얼 키스가 서문에 플라톤의 국가를 인용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는 아마도 어둠에서 빛으로 나온 영혼을 그는 찰리 고든이란 한 인물로 그려내는 것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소설만큼 한 사람의 정신적인 성장과 쇠퇴를 잘 그리는 소설은 없을거라고 생각한다(참고로 대니얼 키스는 심리학 전공자이다)

이 책은 IQ70이었던 찰리가 비크맨 대학의 뇌외과 및 심리학교수들의 도움을 받아(실험 대상이긴 하지만) IQ170이 넘는 사람이 되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참 정교한게, 책 전체 내용의 틀은 찰리가 수술하기 전부터 수술하고 난 뒤, 시간의 흐름대로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성장해 가는 모습을 경과보고서를 쓰는 형태로 구성하고 있다.

그래서 수술 전의 찰리의 경과보고서는 맞춤법도 틀리고 , 생각도 매우 단순하고 , 솔직하다. 사실 맞춤법 틀린 보고서를 계속해서 본다는건 나름의 고역이기도 했지만 찰리가 예전에는 어떠한 모습으로 어떻게 지내왔는지를 잘 볼 수 있다.

우리가 보았을 땐 순수하게 찰리를 보며 웃어주는 것이 아님에도 그는 자신을 보고 웃는 것에 만족하고, 또 좋아한다. 그래서 그러한 순수한 찰리의 마음을 악용해서 나쁜 짓을 하거나 조롱하는 주변 사람들이 존재하지만 찰리는 모르기에, 그들을 매우 좋아한다.

그리고 앨리스 키니언 선생은 직적장애 성인센터의 교사로서, 찰리가 뇌 수술을 받게 적극적으로 도와준 여자이다. 참 신기했던게 지능이 낮았을때의 찰리가 본 키니언 선생과, 수술을 하고나서 점점 정신적으로 발달하면서 마주하게 된 키니언 선생은 매우 다른 모습이다. 처음에 수술 전의 찰리가 경과보고서에 쓴 키니언 선생을 상상했을 땐 나이가 있는 중년의 여성인 줄 알았다. 하지만 신기한 것이, 정신적으로 성장하면 보는 시각에서도 차이가 나게 되어서 키니언을 매우 매력적인 또래의 여성으로 그려낸다. 생각해보면 내가 어렸을 적 주변 인물들 , 가족들을 보았을 때를 회상하면 사진 속 그 얼굴과 좀 다른 면이 있다. 아마도 그런 시각도 뇌에서 받아들이는 것이 다르기에 같은 인물을 다르게 그려내는 것 같다.

이 소설의 매력은 이러한 한 인간이 태어나서 죽을때까지의 심리적 성장과 쇠퇴를 짧은 시간 안에 수술로 인한 성장과 부작용으로 빗대어서 총체적으로 심리학을 볼 수 있다는 면 뿐만이 아니라, 찰리의 소원이었던 -다른 사람들과 친하게 잘 지내고, 자신이 아는 사람들과 동등한 친구가 되길 바랬던 , 인간적인 교류와 人間愛의 결정체가- 어둠에서 빛으로 나왔을 때 동굴속에선 다이아몬드로 보였던 그것이 사실 하나의 돌멩이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 그리고 그 인간애로도 채워지지 않는 인간의 본연적인 고독이 있음을 깨우치는 순간, 그 순간순간을 잘 나타내주고 있어서 감동을 받았다.

그가 똑똑해지고 말고 상관 없이 그가 추구했던 것은 단 한가지였다. 비록 자신의 부모가 자길 버리듯 큰아버지에게 맡기고, 의도적으로 여동생이 자길 괴롭혔어도, 그는 가족이 보고싶었고 , 자기를 놀리고 조롱하고 괴롭히는 친구들이어도, 그 친구들과 이야기 하고 소통을 하고싶어했다.

하지만, 오히려 정신적으로 성장해서 뒤돌아 봤을 때, 동굴속에서 빛으로 걸어나왔을 때 자신은 빛 아래 있지만 뒤돌아보면 그림자가 짙어짐을 알게 되고, 그 그림자 속에 자신의 뒤틀렸던, 몰랐었지만 이젠 알 수밖에 없는 기억의 파편들이 숨어들었음을 깨닫게 되었을 때..그 때의 심리적인 충격과 분노를 이 소설에선 잘 드러내고 있다.

사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정말 똑똑한 것이...그리고 정신적으로 성숙한 것이 과연 좋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그냥 지켜보고 있는 내 마음이 아팠다. 성장한다는게 아픔을 동반한다지만..찰리에겐 너무 큰 아픔이고..또 치유될 수가 없는 상처들이 많았다.

게다가, 비크맨 대학의 니머교수와 스트라우스박사가 찰리의 뇌 수술을 감행한 것은 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수술을 전 세계에 실험으로써 증명하고 인정받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그들의 또 다른 목적은 찰리에게 또 다른 상처-마치 과거의 찰리고든은 인간이 아니었던 , 짐승같았다는 식의 뉘앙스를 풍기며 현재의 그를 전시물로 여기는 행동으로 인한- 를 입고 만다.

그 과정에서 또 키니언 선생과의 사랑과 그 사랑을 이룰 수 없었던 내적인 한계에 대해서도 괴로움을 경과보고서에 토로하고 있다. 그는 점점 똑똑해질수록 오히려 경과보고서에 실망, 분노, 아픔을 기록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가 원한건 단 하나뿐인데. 사랑.

성장해가면서 배움의 즐거움, 그리고 지적인 대화를 나누며 느끼는 즐거움, 이런것도 좋지만 한편으로 과거의 자신을 알던 사람들과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힘들 때 그는 자신과 같은 처지인 엘저넌에게 많이 의지하게 된다.

엘저넌은 찰리가 수술 하기 전 미리 동물생체 실험으로 동일한 수술을 거친 쥐로서, 지능이 매우 발달한 쥐인데 찰리는 이 실험용 쥐가 자신과 같다고 생각하고 그를 끔찍히 여기게 된다

하지만 엘저넌은 시간이 지날수록 대학에서 테스트 하는 여러 과제들을 거부하고 서서히 먹이도 입에 대지 않은 채 죽어간다. 찰리의 분신과도 같은 엘저넌의 죽음은 , 찰리에게도 드리우게 되는데 찰리는 점차 자신의 지능이 떨어질 것임을 자신이 스스로 증명하게 되고, 그에 대한 대책을 스스로 세우게 된다.

마치 스스로 임종을 준비하는 것처럼.

처음에는 찰리도 그냥 엘저넌처럼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게 낫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었다. 바보에서 천재가 되었는데, 그래서 자신이 바보였을때 어떠한 생활을 했는지 똑똑히 기억하는데, 다시 그 상태로 돌아가라는것은 잔인한 일이 아닌가.

하지만 그는 자신의 내면에 아직도 존재하는 그 시절의 찰리가 있음을 알기에, 죽음을 선택하지 않고 그 시절의 찰리에게 자신의 몸을 내어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찰리는 생의 한가운데에서 많은 것을 겪었고 많은 것을 느꼈다

일 평생 평범하게, 하나만 알고 하나만 겪은것보다 그것이 더 나은 삶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인생의 희노애락을 직접 글로 쓸 수 있었다.

마지막은 너무 비극적이진 않다. 왜냐면 다시 그 긍정적이고 밝은 하지만 조금 정신이 어린 찰리로 돌아갔으니까.

하지만..

글로 쓰여진 것보다 원래 더 많은 것을 마음속의 주석으로 달고 있는게 독자 아닌가.

나는 많이 슬펐고 또 많이 씁쓸했다.

아마 다시 이 책을 읽을때마다 항상 찰리를 그리워 할 것 같다

어떠한 시절의 찰리라도 나는 그리울 것 같다.

사랑을 원했지만, 그 누구-부모,친구,연인-와도 되지 못했던..

죽음을 각오하면서까지 수술대에 올랐지만 이렇게 되어버렸던

그런 찰리에게 꽃다발을 선물해주고 싶다

(그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 자신의 집을 지나가게 되면 엘저넌에게 꽃을 바쳐달란 말과 같이 나는 그에게 주고싶다)

먼길 수고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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