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위안

한 인간이 일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지혜가 제공하는 것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우정이다.ㅡ에피쿠로스 주요 교설 중

우리 인간은 자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지켜봐줄 누군가가 없다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내뱉는 말은 다른 누군가가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는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지낸다는 것은 끊임없이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받는 것이다.
친구들은 우리를 알아주고 돌봄으로써 우리에게 무력함에서 벗어날 수있는 힘을 불어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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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정한 태도로 걷는 삶은 어떤 삶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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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잠 - 이보다 더 확실한 행복은 없다 아무튼 시리즈 53
정희재 지음 / 제철소 / 2022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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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많은 나에게 위로가 되어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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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우리의 ‘사적인 것’은 결코 언어화될 수 없다. 만약 언어화되었다면 그것은 이미 사적인, 자신만의 것‘이 아니게 된다. 이것이 ‘모두의 것이기도하고 누구의 것도 아닌‘ 말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이것의 옳고 그름은 별개로 하고 말이다.

그런 말을 들으면 인간 중에도 타인의 감정에 유독 둔감한 사람이 있다. 타인에게 공감할 수 없는 사이코패스라고불리는 사람들이다. 그저 타인과 공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그것은 터무니없는 착각인 경우가 자주 있을 것이다. 타인의 감정을 이해한다 하더라도 결국은 자신의 감

정을 그대로 연장하는 것일 뿐(그저 착각)인 일은 자주 일어난다. 마음을 쓴다고 할 때의 ‘마음‘은 자신의 마음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인간의 구조상 타인의 감정을 내면에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해가다 보면 인간도 로봇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결국 ‘타인(로봇을 포함한)은 이해할수 없다.
그런 상태에 있는 우리는 타인(혹은 로봇)과 교류할 때 어떻게 하면 될까. 무언가 지침 같은 것이 있다면 좋겠는데. 절대로 타인(혹은 로봇)의 감정은 알 수 없으므로 그 헤아릴수 없는 영역(타인이나 로봇의 마음)은 일단 놔두고, 하루하루 생활에서 타인(혹은 로봇)과 어떻게 관계 맺으면 되는지는 그다음 문제다. 그 지침 같은 것이야말로 비트겐슈타인의 다음 말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누구나 자신에 대해 "고통‘이란 무엇인지, 오로지 자신에 관해서만안다"고 나는 말한다! 누구나 상자를 하나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그 안에는 우리가 ‘딱정벌레‘라고 부르는 것이 들어 있다. 가정해보자. 누구도 다른 사람의 상자 속을 들여다볼 수는 없다. 그리고 누구나 ‘자신의 딱정벌레를 본 것뿐이면서 딱정벌레가 무엇인지안다‘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만의 세계("단칸방)안에 있고, 타인은 그 안에 있는 등장인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앞에서도 이야기했다. ‘나‘와 ‘타인‘은 그 모습이 완전히다른 법이다. 물론 ‘타인‘도 나와 비슷한 모습인 듯 보인다.
그러나 그것을 확인할 방법은 아쉽게도 없다. ‘타인‘은 ‘나’라는 유일무이한 세계의 등장인물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나‘라는 것은 그런 모습을 취하는 만큼, 무척성가시게도 자기 자신의 모습을 확인할 수가 없다. 하나의무대이자 하나의 세계의 얼개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신기하게도 언제나 앞면만을 향한다. 그렇게 세계라는 무대를꾸미느라 아침부터 밤까지 분주하기 때문이다. 영화관의 스

크린에 영화 자체를 쏘는 영사기가 스크린 뒷면을 보는 것(뒷면에 빛을 쏘는 것)이 불가능하듯, 언제까지고 앞면만을향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전면의 무대에 아무리 봐도 나와 비슷한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무대에는 다양한 존재가 있고, 다양한 움직임을 보이는데, 그중에 나에게 말을 거는 존재자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것이 인간이다. 우리는세계라는 무대를 항상 만들어나간다. 그 무대에서 삼라만상이 전개되는데, 그중에 자꾸만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말을거는 존재, 곧 다른 인간이 있는 것이다. 고맙게도.
그리고 나도 점점 그 존재들이 사용하는 음성을 자연스럽게 (혹은 싫든 좋든) 습득하고, 그 존재들과 마찬가지 소리를 내고, 그 존재자들과 공동으로 생활한다(억지로 그렇게되어버린다고 말하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존재들이있음으로써 어떤 의미에서 나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비로소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무척 이상한 모습을하고 있다고 할 수 있으리라 나와 타인은 전혀 차원이 다른격리된 모습을 하고 있다(자타의 비대칭). 그런데 동시에 나자체의 모습을 가르쳐주는 것도 그 격리된 타인인 것이다.

자기 세계의 등장인물이 이쪽(나세계)의 가장 밑바탕을 이루는 정보를 제공해준다. 무척 복잡하고 이상한 관계다.
타인이 없다면 자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없다. 이것은 말하고 보면 ‘자타의 상호보완성‘(자신과 타인이 서로 보충하여완전한 것)을 이루어 존재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 모습이다. 물론 타인이라는 존재는 나에게는 발붙일 곳조차 없는 심연이므로, 타인이 어떤 구조를 이루고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느낌인지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상호‘라는말을 붙이는 것은 조금 내키지 않지만 아마도 그런 상호적인 모습을 할 것이라고 예상하여(타인 대부분과 지금까지 나눈 대화 등을 참고하여 예상했다), 자타의 상호보완성이라고말해주고 싶은 것이다. 물론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되면 요컨대 우리는 ‘자타의 비대칭성‘이라는 근원적인 모습을 하고 있고(이는 나 안에서 확인 가능하다) 동시에그것과는 완전히 모순되는 모습, 이른바 ‘자타의 상호보안성‘이라는 모습도 가지고 있다는 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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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는 것은 바뀌는 것이며, 성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배움 없는 성장은 없으며 성장 없는 배움은 없다.
성장한다면 미지의 것을 만남으로써 자신의 세계가 확장되어 풍요로워진다. 그것이 즉 즐거움이다. 인간은 ‘배우는기쁨을 맛보기 위해 태어난다‘고 말해도 좋으리라.

우리는 무엇을 위해 배우는 것일까?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지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무엇보다 풍요로운 성장을 위해서다. 배움에는 성장의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배움의 길을 발견할 수 있다면 붓다처럼 유쾌한 삶의 방식에 가까워질 수 있다.

지금까지 좌선에 관해 말로 설명했는데 ‘행‘이라는 것은실은 ‘말로 하려 해도 할 수 없는 것‘이다. 말로 이해할 수있는 것이라면 굳이 몸과 마음을 걸고 수행할 필요가 없다.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고 논리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수행을 통해 실제로 체득하자는 것이 선의 메시지다.
냉난자지선어가 있다. 물이 차가운지 뜨거운라는지는 직접 마셔 보고 스스로 아는 방법 말고는 없다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선에서 배우는 방식이다.
예전에 어떤 초등학교 선생님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소풍을 갔는데, 선생님이 길가에 핀 꽃을 가리키면서 "이건 00초예요. 알고 있나요?"라고 묻자 "네, 도감에서 봐서 알고 있어요"라고 대답하는 아이가 많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보거나 손으로 만지거나 냄새를 맡으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 꽃을 도감에서 본 것만으로 이미 알았다고생각하는 것이다. 지금은 앎이 그만큼 머릿속 이해에 치우쳐 있는 듯하다.

이 앎이라는 것에 관해 철학자인 니시타니 게이지,
1900~1990)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과학적인 앎은 그것을 얻은 과학자 자신에게도 어떠한 영향을 미치겠지만, 그렇다고 자기를 아는 것이 되지는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자지라는 방향에서는 오히려 과학자가 일반인보다도 더 어두운 경우도 드물지 않다. 그가 자신의 과학적인 삶에 속아서 더욱 자지에 어두운 일도 일어난다. 그것은 모두 과학적인 앎이 전심신적인 앎을 필요로 하지 않는 앎, 신체적인 행위로부터 따로 떨어진 앎이기 때문이다.
니시타니 게이지 종교와 비종교 사이이 지적에 따르면 ‘도감에서 봐서 아는‘ 삶은 그야말로 ‘신체적인 행위에서 따로 떨어진 앎‘이다.
좌선은 이러한 방식으로는 절대 알 수 없다. 좌선을 알기위해서는 머릿속 이해뿐 아니라 몸과 하나가 된 수행적인삶의 방식(지행합일)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충분히 알았으므로 이제 됐다‘는 완성이나 졸업이 있는 것이 아니다.

선은 자기(自己, 진실한 자기를 밝히는 일)의 길이라고 하는데 그 자기가 시시각각 신선하게 생성되는 이상 즐거운 탐구가 끝없이 이어질 뿐이다. 이것이 바로 수행에는끝이 없다고 하는 이유다.

불교를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배운다는 것이다.
도겐 『정법안장』
거듭 말하지만, 우리는 연기에 의해 존재한다. 그러한 세계에서 우리는 항상 지금의 상황을 만들어내면서 동시에 상황에 휘말려 계속 새로이 생성되고 있다. 자기란 상황에서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까지 전부 합친 것으로 존재한다. 그러한 생생한 자기를 전심신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배우는 것이 좌선의 안목이며 불도 수행인 것이다.
붓다는 그러한 자기의 배움을 평생 이어온 단단한 신념을지닌 학생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누구보다 즐긴 사람이다. 우리가 붓다에게서 배울 점은 유쾌하게 계속 배우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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