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는 것은 바뀌는 것이며, 성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배움 없는 성장은 없으며 성장 없는 배움은 없다.
성장한다면 미지의 것을 만남으로써 자신의 세계가 확장되어 풍요로워진다. 그것이 즉 즐거움이다. 인간은 ‘배우는기쁨을 맛보기 위해 태어난다‘고 말해도 좋으리라.

우리는 무엇을 위해 배우는 것일까?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지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무엇보다 풍요로운 성장을 위해서다. 배움에는 성장의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배움의 길을 발견할 수 있다면 붓다처럼 유쾌한 삶의 방식에 가까워질 수 있다.

지금까지 좌선에 관해 말로 설명했는데 ‘행‘이라는 것은실은 ‘말로 하려 해도 할 수 없는 것‘이다. 말로 이해할 수있는 것이라면 굳이 몸과 마음을 걸고 수행할 필요가 없다.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고 논리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수행을 통해 실제로 체득하자는 것이 선의 메시지다.
냉난자지선어가 있다. 물이 차가운지 뜨거운라는지는 직접 마셔 보고 스스로 아는 방법 말고는 없다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선에서 배우는 방식이다.
예전에 어떤 초등학교 선생님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소풍을 갔는데, 선생님이 길가에 핀 꽃을 가리키면서 "이건 00초예요. 알고 있나요?"라고 묻자 "네, 도감에서 봐서 알고 있어요"라고 대답하는 아이가 많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보거나 손으로 만지거나 냄새를 맡으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 꽃을 도감에서 본 것만으로 이미 알았다고생각하는 것이다. 지금은 앎이 그만큼 머릿속 이해에 치우쳐 있는 듯하다.

이 앎이라는 것에 관해 철학자인 니시타니 게이지,
1900~1990)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과학적인 앎은 그것을 얻은 과학자 자신에게도 어떠한 영향을 미치겠지만, 그렇다고 자기를 아는 것이 되지는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자지라는 방향에서는 오히려 과학자가 일반인보다도 더 어두운 경우도 드물지 않다. 그가 자신의 과학적인 삶에 속아서 더욱 자지에 어두운 일도 일어난다. 그것은 모두 과학적인 앎이 전심신적인 앎을 필요로 하지 않는 앎, 신체적인 행위로부터 따로 떨어진 앎이기 때문이다.
니시타니 게이지 종교와 비종교 사이이 지적에 따르면 ‘도감에서 봐서 아는‘ 삶은 그야말로 ‘신체적인 행위에서 따로 떨어진 앎‘이다.
좌선은 이러한 방식으로는 절대 알 수 없다. 좌선을 알기위해서는 머릿속 이해뿐 아니라 몸과 하나가 된 수행적인삶의 방식(지행합일)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충분히 알았으므로 이제 됐다‘는 완성이나 졸업이 있는 것이 아니다.

선은 자기(自己, 진실한 자기를 밝히는 일)의 길이라고 하는데 그 자기가 시시각각 신선하게 생성되는 이상 즐거운 탐구가 끝없이 이어질 뿐이다. 이것이 바로 수행에는끝이 없다고 하는 이유다.

불교를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배운다는 것이다.
도겐 『정법안장』
거듭 말하지만, 우리는 연기에 의해 존재한다. 그러한 세계에서 우리는 항상 지금의 상황을 만들어내면서 동시에 상황에 휘말려 계속 새로이 생성되고 있다. 자기란 상황에서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까지 전부 합친 것으로 존재한다. 그러한 생생한 자기를 전심신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배우는 것이 좌선의 안목이며 불도 수행인 것이다.
붓다는 그러한 자기의 배움을 평생 이어온 단단한 신념을지닌 학생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누구보다 즐긴 사람이다. 우리가 붓다에게서 배울 점은 유쾌하게 계속 배우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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