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에 구원받는다는 것 - 삶을 파괴하는 말들에 지지 않기
아라이 유키 지음, 배형은 옮김 / ㅁ(미음) / 202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떤 책들은 문장이 유려하고 생각이 멋져서 감탄하며 보게 된다. 이런 책들은 읽는 동안 독서의 즐거움을 충분히 느끼게 한다. 하지만 책을 덮고 나서는 쓸까말까 생각 줄다리기를 아슬하게 하고 있는 나에게 내가 굳이 쓰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쪽으로 기울게 만든다. 쓰지 않아도 될 당위성을 스스로에게 부여하면서도 어깨는 움츠려든 상태다.
이 책은 장애인들의 말과 그들의 소통을 가까이서 들여다본 문학 연구가의 이야기다. 여러 지점들에서 좋았는데, 가장 좋았던 건 나에게 용기를 한 뼘 가지게 한 점이다. 내 이야기도 어쩌면 쓸모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전의 요코타 씨와 이야기를 나눌 때 저도 모르게 "우리는"
"이나 "이 사회는" 같은 ‘큰 주어‘로 말하면 요코타 씨는 다음과같이 되물었습니다.
그래서 자네는 어떻게 할 건데? 자네는 어떻게 하고 싶어?
중요한 것은 ‘나‘라는 ‘작은 주어‘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렇게 글을 쓰는 일입니다.
글을 계속 쓰는 일입니다.
예전에 경종을 울렸다는 것.
경종을 울린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
그 역사를 말로 바꾸어 다시 한 번 이 시대에 울려 퍼지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저는 내년에도, 후년에도 그다음 해에도, 7월이 오면 사가미하라 사건에 대해 쓰려고 합니다. 함께 이 문제를 생각하고, 이 문제를 놓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계속해서 고민하고 괴로워하려고 합니다. - P-1

처음 만난 지적 장애인과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없었던 점도힘들었다. 지적 장애인과의 의사소통에는 비장애인과의 소통과다른 부분이 있다. 상대가 이해하기 쉽게 사인을 보내고 상대의사인을 읽는 특유의 기법 같은 것이 있어서, 시간을 들여 관계성을 쌓아야 커뮤니케이션 감각이 생긴다는 사실을 지금은 안다.
더 나아가 사람과 사람은 서로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끌어안은 채 같은 시간과 장소를 겪기만 해도의미가 있는 법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 P-1

내가 하는 일에는 ‘누군가의 인생을 말로 바꾸는‘ 작업이 어쩔 수 없이 따라온다. 몇 년을 해왔어도 이 작업에 익숙해지지못했고 매번 꺼림함이 남아서 고민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이 사람에 대해 얼마나 알아야 이 사람의 인생에 대해쓸 수 있을지‘가 고민거리다.
이 ‘쓸 수 있을까‘에는 ‘능력 면에서 가능한가 아닌가‘와 ‘자격이 있는가 없는가‘에 해당하는 요소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만약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인물에 대해 쓴다면, 그 혼돈한 삶의발자취를 ‘내 문장력으로 정리할 수 있을까‘와 ‘나 같은 사람이정리해도 괜찮을까‘라는 물음을 두고 머리를 싸매며 고민한다.
경험상 서너 시간 정도 취재하면 전자의 의문에는 깔끔히 결론이 난다. ‘짧은 취재로는 아주 깊게 조사해내기 힘드니 일단문장만이라도 읽기 쉽게 정리하자‘는 식의 결론이다. 한편 그 사람과 3, 4년간 깊이 사귀게 되면 거꾸로 후자의 물음에는 자신이 생기지만 읽기 쉬운 글로 완성하기가 불가능해진다. 쓰고 싶은 내용이 너무 많아서 정리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다만 나는 이 ‘정리할 수 없다‘는 느낌이 싫지 않다. 오히려 굉 - P-1

장히 좋다. 이 감각은 예를 들자면 ‘추억 사진을 정리할 때 느끼는 감각‘에 가깝다. 소중한 사람과 함께 찍은 사진을 들춰볼 때한장 한장에 얽힌 에피소드는 얼마든지 풀어낼 수 있지만, 그사람의 인생이나 그가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지를 말로 설명하려 하면 좀처럼 술술 나오지 않는 법이다.
‘깔끔하게 말로 정리할 수 없는 것의 귀중함‘에 손쓸 수 없이이끌린 나는 어떻게든 그것을 말로 표현하고 싶다고 소원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과 자격이 나에게 있는가 하면......
처음의 물음으로 돌아가기를 되풀이하고 만다.
이러한 말의 문제는 조금 거칠게 표현하면 ‘요약하기‘와 ‘일부를 보여주기‘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요약하기‘는 커다란 세계나 복잡한 현상의 축소판을 만드는일이다. 요약을 할 때는 정확한 미니어처를 만드는 기술 수준이중요하다.
이에 비해 ‘일부를 보여주기‘는 너무 커서 다 표현할 수 없는것의 일부를 보여줌으로써, 미처 다 표현하지 못한 전체를 상상하게 만드는 방법이다. 앞서 든 추억 사진 예처럼 각각의 사진에 얽힌 에피소드를 전달해서 사진 속 인물의 존재감이 얼마나큰지 느끼게 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학자는 두 방법 중 ‘요약‘의 전문가일 것이다. 아니, 그래야 한다. 나 역시 현상을 정확하고 치밀한 언어로 표현하는 훈련을받았다(받기는 했다.......
하지만 세상에는 ‘일부를 보여주는‘ 방법으로밖에 표현할 수 - P-1

없는 것들이 존재한다. 내 안에도 있다. 전하려는 쪽이 가진 말의 기술로는 도무지 그려낼 수가 없어서 받아들이는 쪽의 감수성과 상상력을 무작정 믿고 맡길 수밖에 없다. 그런 기도에 가까운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을 때가 있다.
애당초 ‘요약‘이라는 것은 ‘너 같은 건 나한테 알기 쉬운 존재가 되어라‘라는 오만함과 이웃 관계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그렇지 않은 말의 존재를, 기도와 같은 말의 무게를, 다양한 사람의말의 힘을 빌려 표현해보자...... 는 터무니없는 시도의 결과물이 이 책이지만, 그것이 성공했는지 아닌지야말로 받아들이는분들을 믿고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 P-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기 전 잠깐 읽으려고 폈다가 한밤중이 되어서야 책을 덮을 수 있었다. 왜 줄리언 반스, 줄리언 반스 하는지 이 책을 읽고 알게 되었다.(‘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읽기에 실패했었다.)
타인을 이해하는 것의 불가능성에 대해, 배교자 율리아누스의 이해에 대해, 우리 사회가 동조하는 가치에 의구심을 가지는 태도에 대해, 행복에 근접해지기 위한 스토아철학의 방법(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을 구분짓는 것)에 대해, 그리고 인생에 끼어든 우연에 대해 생각해보았고, 대체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깊이 새겼다.

그리고 잊지 마세요. 전기나 역사책은 말할 것도 없고 소설에서도 어떤 인물이 형용사 세 개로 줄어들어 깔끔하게 정리되는 게 보이면 그런 묘사는 늘 불신하세요. - P-1

핀치의 공책에서.

-성공에 대한 자족과 마찬가지로 실패에 대한 자족도 있을 수 있다.

말할 필요도 없지만 그녀에게는 둘 다 없었다. 또 자신을 성공 대 실패라는 맥락에서 생각한 적도 없었을 것이다.
- P-1

그녀가 우리에게 한 가지 가르쳐준 게 있다면 역사는 길게 보아야 한다는 것, 나아가서 역사는 무기력하게 혼수상태로 누워 우리가 크고 작은 망원경을 들이대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활동적이고 들끓고 가끔 화산처럼 폭발한다는 것이었다. - P-1

 ‘너는 나보다 똑똑하고 나보다 젊고 나는 너를 누이로서 사랑하지만 너도 모든 걸 아는 건 아니구나. 그것 때문에, 웃기는 일이기는 하지만, 누이를 더 사랑하게 됐어요. 이상한 거예요, 인생이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동의했다. - P-1

적-스토아철학적이었다고 말하고 싶은데, 그건 어울린다. 그럼 내가 아내 둘보다 그녀를 더 사랑했을까? 이런 식으로 말해보자. 사랑하는 사람을 깊이 또 잘 알고 있다 해도 그 사람에게 놀라게 되는 것이 사랑의 속성이다. 그게 사랑이 살아있다는 표시다. 타성은 사랑을 죽인다. 성적인 사랑만이 아니다. 모든 사랑이 마찬가지다. 내 경험으로는 부부의 사랑에서 ‘놀라움‘은 첫 몇 년 뒤에는 가끔 그저 별난 행동 때문일 뿐이라는 게 드러나기도 한다. 더 나쁜 것은, 그런 행동이 단지 남편만이 아니라 자기가-사실은 삶 자체가 지겨워졌다는 표시라는 점이다. - P-1

-영어에서 ‘사랑‘이라는 말보다 신비화되고, 오용되고, 오해되고, 의미와 의도가 제멋대로이고, 오염되고, 거짓말하는 수많은입에서 나온 침으로 더럽혀진 말이 있을까? 이를 두고 불평하는것보다 진부한 것이 있을까? 이런 오용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말을 대체할 수 없으니 이 말은 동시에 강건하고 단단하고 그 갑옷은 뚫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물도 폭풍도 못 건드리고 벼락도비껴간다. - P-1

그분은 내 평생 이야기를나누어 다른 어떤 여자하고도 완전히 달랐어. 대부분의 여자는 ‘우리가 어떻게 만났나‘ 하는 이야기를 해" 그녀는 공중에 따옴표를 찍었다 "그리고 ‘뭐가 잘못됐나‘ 또 ‘어떻게 끝났나‘ 또 ‘내가 그 모든 것에서 뭘 배웠나.‘ 그걸 비난하는 게 아냐. 나도 그러니까 내 인생을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지. 우리 모두 그래. 그런데 EF는 그런 식이 아니었어. 결론은 주지만 서사는 주지 않았어. 왜? 뻔하고 일반적인 이유는프라이버시, 신중함 그런 이유겠지. 하지만 나는 어쩌면 이건그보다 큰 걸 수도 있겠다고 판단했어. 인생은, 우리가 아무리 그렇게 되기를 바라더라도, 서사에는 이르지 못한다는 느낌 - 또는 우리가 이해하고 기대하는 서사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느낌." - P-1

스토아 학파의 사상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일이 있고 어떻게 해보 수 없는 일이 있다. 우리는 그 둘을 구별하는 걸 배워야 하며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일은 어쩔 도리가 없다는 걸 깨달아야 하고 이것이 우리를 삶에 대한 올바를 철학적 이해로 이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 P-1

 그걸 보고 실패가 성공보다 흥미로울 수 있고, 패자가 승자보다 많은 이야기를 해준다는 EF의 말이 기억났다. 또 심지어 임종을 맞이할 때도 어쩌면특히 임종을 맞이할 때 우리가 어떻게 심판받을지, 또는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다 해도 어떤 식으로 남을지 알 수 없다고 말한 것도. 모래에 발자국을 남기지만 다음 바람이 쓸어가 버릴지도 모른다. 또는 먼지에 발자국을 남겼는데 우연히도 폼페이에 사는 바람에 수백 년 동안 그 완벽한 형태가 살아남을지도. 린다를 생각할 때면 안나가 수십 년 뒤 개입 - P-1

나는 율리아누스를 생각했다. 수백 년의 세월이 그를 해석하고 또 재해석해 온 방식. 여러 색깔의 조명을 받으며 무대를 가로질러 걸어가는 사람처럼. 오, 저 사람은 빨간색이야,
아니야, 주황색에 가까워, 아니야, 검은색에 가까운 인디고야, 아니야, 저 사람은 완전히 검은색이야. 이보다는 덜 극적이고 덜 극단적이지만 이게 어떤 사람의 인생을 보든 벌어지는 일인 것으로 보인다. 그 사람의 부모, 친구, 연인, 적, 자식이 각각 보는 방식. 지나가던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그의 진실을 눈치채기도 하고, 오랜 친구가 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기도 하고. 사실 사람들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보는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본다. 뭐, 사람으로 살려면 자기역사를 잘못 알아야 한다. - P-1

아마도 내가 엘리자베스 핀치를 ‘알고‘ 또 ‘이해하는‘ 것은 율리아누스 황제를 ‘알고‘ 또 ‘이해하는‘것보다 나을 것이 없을 것이다. - P-1

다시 그녀의 모습이 보인다. 점심 테이블에서 내 쪽으로몸을 기울이고 있다. 내가 파스타가 아닌 송아지 고기 에스칼로프를 택한 뒤다. "어떤가요?" 그녀가 열띤 표정으로 묻는다. "실망스럽나요?" 마치 다른 모든 것에 관해서도 그렇게 물어보고 있는 것 같다. 인생, 하느님, 날씨, 정부, 죽음, 사랑, 샌드위치, 미완성 걸작의 존재. - P-1

그래서 나도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다. 운이, 우연이 자기뜻대로 하게 놓아두는 것. 나는 지금까지 쓴 것을 서랍에 넣어두고, 어쩌면 그 옆에 EF의 공책들도 놓아둘 것이다. 가끔 내 자식 하나가 내가 죽은 뒤 그걸 발견하는 상상을 한다.
"오 이것 봐, 아빠가 책을 썼네! 읽어보고 싶은 사람?" "그것도 미완성 프로젝트겠지." "우리 같은." 그런 다음 자식들은아버지로서 나의 결함을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내가 타자로친 것을 다시 서랍에 던져 넣고 청소부가 쓰레기통에 버리게할지도 모른다. 아니, 나는 지금 내 자식들을 지나치게 깎아내리고 있다. 셋 가운데 하나는 아빠가 하던 일을 보자 약간감상에 젖고, 약간 호기심을 느낄지도 모른다. 어쩌면 다른자식이 엘리자베스 핀치가 누구인지 궁금해하며, 우리가 연인 사이였는지 궁금해하며, EF의 공책들을 들고 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실망을 주고 너무 많은 결론, 불충분한 서사버려질 것이다. 나의 ‘책‘그게 그런 말을 들을 만하다면은 다른 책상의 다른 서랍에 들어갈지도 모르고, 그다음운명은 어쩌면 아직 태어나지 않은 누군가에게 맡겨질지도모른다.
이건 정당할 것이다. 어떤 일은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있고 어떤 일은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없다. 이 일은 지금 내가 어떻게 해볼 수 없고 따라서 내가 자유와 행복을 얻는 것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다. - P-1

결코 타인을 이해할 수 없다는 이 절망 앞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시 읽기뿐이다.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내 바깥의 세상을 바꾸기보다는 내가 변하기 위해서.
김연수 추천의 말 중 - P-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체호프 단편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0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박현섭 옮김 / 민음사 / 200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윤가은 감독이 유튜브에서 읽는 책이라고 소개해서 체호프의 단편소설집을 읽었다. 읽으면서도 난 왜 체호프가 러시아 단편 소설의 천재라고 불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마도 문학이 가진 역사성에 대한 내 이해가 부족했을터이다. 하지만 친절하게도 책 뒷편 작품 해설에서 왜 체호프가 천재인지를 알려주었다.
1. 특별한 사건이 아닌 일상적인 설정 속에서 전개되는 이야기(근대 이전의 소설은 거대 서사를 주로 펼쳐냈나보다)
2. 사건의 외부적 측면보다 사건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다양하고 모순된 반응에 초점
3.느슨한 플롯과 미결정 상태의 결말
4. 등장인물들 간의 의사소통 단절

제일 희극적이었던 <관리의 죽음>이 기억에 남는다.

물론 궁극적으로 볼 때 체호프의 심원한 세계를 일의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체호프는 한없이 차갑지만 따뜻하고 단호하지만 부드럽다. 그의 익살 뒤에는천근 같은 우수가 기대어 있다. 그의 페시미즘 속에는 질긴 낙관이 숨쉰다. 그의 비밀은 가장 단순하기에 결코 알아낼 수 없다. - P-1

<감옥에 유폐된 한 인간이 엄청난 독서와 구도의 노력을통해 궁극의 진리에 이른다>는 내용은 그다지 체호프답지않다. 대개 체호프의 주인공들은 궁극의 진리를 갈망하지만 결코 그것에 도달하지 못한다. 이들에게 유일한 진리는아무것도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일 뿐이다. - P-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농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딸이 책 표지를 보고 말했다.
제목이 농담인데 왜 표지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 작가 사진은 이렇게 진지한 표정이냐고. 안 어울린다고.


이런 말이 안되는 상황을 이해하는 과정이 어른이 되는 것 아닐까?
하나뿐이기에 진지하게 임해야 할 삶이지만 불가해한 일이 너무도 많기에 농담처럼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농담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에 진지한 삶의 통찰을 담은 이 책이 표지 하나로 다 표현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단지 그녀의 단순함이 내가 그때까지 몰랐던 새로운것이어서 내가 루치에에게 끌렸다고 생각한다면 잘못이다.
그녀는 순진하고 배움이 모자랐으나 나를 이해하는 데 전혀문제가 없었다. 그 이해는 많은 경험이나 지식에서 나오는것도 아니었고, 어떤 문제에 대해 토론하고 조언을 해 줄 수있는 능력에 기인하는 것도 아니었으며, 다만 그녀가 내 말을 귀기울여 들으며 그대로 다 받아들여 주는 데서 오는 것이었다. - P-1

나는 스물두 살이었고, 내게 무언가 여성적이거나 어린아이 같은 분위기를 풍기게 할 만한 것들은 무엇이든 피할 때였다. 거리에서 꽃을 들고 다니는 것도 창피스러웠고 꽃을사는 것도 싫었으며 꽃을 받는다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나는 거북해하며 루치에에게 꽃은 남자들이 여자에게 주는 것이지 여자가 주는 것이 아니라고 했지만, 거의 울음을터뜨릴 것처럼 되어 버린 그녀를 보고는 얼른 꽃이 참 예쁘다고 하면서 받아들었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날부터 우리가 만날 때마다 꽃다발이 나를 기다렸고 결국 나도 익숙해졌다. 그 선물이 하도자연스러워 어떻게 할 수도 없었고 또 루치에가 그렇게 나에게 선물을 주는 것을 아주 소중하게 여긴다는 것을 알게 되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말을 잘 못해서 괴로워하다가 꽃을통해서 어떤 말의 형태를 발견했던 것이었다. 그 말은 옛 꽃말들에 담긴 수많은 상징들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보다 더 오래되고, 더 알 수 없고, 더 본능적인 언어 이전의 어떤 것을 뜻했다. 언제나 말하기보다 가만히 있곤 하던 루치에는 언어가 존재하지 않아서 사람들이 세세한 몸짓들로 이
"야기를 하던 시대를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손가락으로 서로•나무를 가리키고, 소리내어 웃고, 서로 몸에 손을 가져다 대고, 그렇게 하던... - P-1

오스트라바에서의 생활도 벌써 일 년이 지났고, 처음에는견디기 힘들던 군복무도 이제는 내게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이 되어 있었다. 그 모든 고달픈 일들 가운데서도 나는 어쨌든 살아 낼 수 있었고, 친구도 두세 명 사귀었으며, 행복했다. 그 여름은 내게 정말 아름다운 여름이었다.(검댕으로 가득한 나무들도 탄광의 어두움을 겨우 씻어 낸 내 눈에는 그지없이 푸르게 보였다.) 그러나 불행의 씨앗은 더할 수 없는 행복의 한가운데 숨어 있는 법이다. 그해 가을의 슬픈 일들은 이 짙푸른 여름에 잉태되어 있었다. - P-1

 그렇다. 다시 돌아올 수 없이. 우리 삶의 모든 중대한 순간들은단 한 번뿐,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이렇게 다시 돌아오지 못함을 완전히 알고 있어야만 인간은 인간일 수 있다. 속임수를 써서는 안 된다. 그런 것을 전혀 모르는 척해서도 안 된다. 현대인은 속임수를 쓴다.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할 중대한 순간들을 모두 교묘히 피해 가려 하고, 그렇게 해서 아무것도 지불하지 않은 채 탄생의 순간에서부터 죽음까지 가려 한다. - P-1

우리의 삶과 관련된 말은 아무리 사소한 문장이어도 결국 우리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음을 보여주고 말았다. 우리의 전망, 우리의 미래가 두 갈래로 갈라지고 있음을. 우리가 서로 반대 방향으로 떠밀려가 버렸음을.
그래서 나는 아주 소소한 상투적인 이야기를 하려고 해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더 나빴다. 일부러 대화를 무의미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 곧 그대로 다 드러나 버렸고 그래서 견디기 힘들어져 버렸다. - P-1

거기에서 나는 이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푸치크가그저 자기 만족으로 썩어 빠진 인간이었을 뿐이라고?
•루드비크는 질주하는 말 같았다. 아니, 그로 하여금 그런글을 쓰게 했던 건 전적으로 그런 자만 때문만은 아니야. 약했던 거지. 아무도 지켜보는 이 없이, 타인들의 찬동도 없이,
오로지 자기 자신과 대면한 채 홀로 고립되어 용감함을 고수하는 일은 엄청난 자긍심과 힘을 요하거든. 푸치크는 대중의도움이 필요했던 거야. 감방의 고독 속에서 적어도 가상의대중이라도 만들어 내야 했지. 그는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이필요했던 거야! 박수 소리로 자신의 힘을 추슬러야 했지! 다른 게 없으니 상상의 박수라도 말이야. 감방을 하나의 무대로 바꿔 놓고 자신의 운명을 전시하고 내보임으로써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야 했던 거야.
나는 루드비크가 몹시 상심했으리라는 예상은 했다. 독기를 품고 있으리라는 예상도 했다. 하지만 이런 광적인 분노나 독설이 날아온 것은 전혀 뜻밖이었다. 그 가엾은 푸치크가 그에게 대체 무슨 잘못을 했다는 말인가? 나는 한 인간의가치는 그가 얼마나 신의를 지키는가에 있다고 본다. 루드비크가 부당한 처벌을 받았다는 것은 나도 안다. 하지만 그렇 - P-1

기 때문에 문제는 더 심각한 것이다. 그의 견해가 바뀐 동기가 너무도 빤히 들여다 보였기 때문이다. 모욕을 받았다는이유 하나만으로 삶 앞에서 자신의 태도를 완전히 뒤집어버릴 수 있는 것인가?
이런 말을 나는 루드비크에게 대놓고 모두 이야기했다.
그러자 예상치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루드비크는 내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 들끓던 분노가 갑자기 그에게서빠져나가 버린 것 같았다. 그는 묘한 눈길로 나를 물끄러미바라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조용하게, 언짢아하지 말라고 말했다. 자기가 잘못 생각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너무도이상하게, 너무도 차갑게 그 말을 했기 때문에 전혀 진심이아니라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나는 그렇게 마음에도 없는빈말로 우리의 대화가 끝나기를 원치 않았다. 기분이 씁쓸하기는 했지만 내 마음은 처음에 다짐했던 그대로였다. 루드비크에게 내 마음을 다 이야기하고 우리의 우정을 회복하고 싶었다. 아무리 서로 심하게 부딪쳤어도 나는 예전에 그토록밝고 환했던 우리 둘의 작은 공간, 이제 우리가 다시 함께 살수 있을 공동의 작은 공간이 어딘가에, 긴 논쟁의 끝에, 마련되어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대화를 계속해 보려는 내 노력은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루드비크는 이번에도 또 과장해서 심하게 말하는 자기 버릇이 도졌노라고 수도 없이 변명을했다. 그리고 자기가 한 말을 모두 잊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 P-1

그렇다. 갑자기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사람들 대부분은 두 가지 헛된 믿음에 빠져 있다. 기억(사람, 사물, 행위,
민족 등에 대한 기억)의 영속성에 대한 믿음과 행위, 실수, 죄,
잘못 등을 고쳐 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다. 이것은둘 다 마찬가지로 잘못된 믿음이다. 진실은 오히려 정반대다. 모든 것은 잊히고, 고쳐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엇을(복수에 의해서 그리고 용서에 의해서) 고친다는 일은 망각이담당할 것이다. 그 누구도 이미 저질러진 잘못을 고치지 못하겠지만 모든 잘못이 잊힐 것이다. - P-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해 봄의 불확실성
시그리드 누네즈 지음, 민승남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노년의 남성 작가를 상상하며 읽었는데, 여성 작가였다. 오랫동안 읽고 사유한 것들을 자신의 문장에 밀착시켜 풀어내는 이 작가의 다른 책들도 얼른 읽고 싶다.

오래전에 읽은 책이라 이 문장 말고는 내용이 거의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는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나 그들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해 말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 책이 1880년에 시작되었다는 것도 (나중에 찾아보기 전까지는)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뭐, 그게 중요하다는 얘긴 아니다. 내가 읽은 소설들에서 무슨 일들이 일어났는지 기억하는 게 중요하다고 믿었던건 어릴 적뿐이었다. 이제 나는 중요한 것이 책에 서술된 허구의 사건들보다는 독서 중의 체험, 책 속 이야기가 일으키는 감정 상태, 머리에 떠오르는 질문들이라는 진실을 안다. 그런 건 학교에서 가르쳐 줘야 하는데 안 가르쳐 준다. - P-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