싯다르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8
헤르만 헤세 지음, 박병덕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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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워지지 않은 마음으로 계속해서 궁구해 나가는 싯다르타의 모습도 궁극의 앎을 깨쳤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무너지는 모습도, 지혜란 말로써 전해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가르침을 원하는 자에게 내어준 것도 모두 본받아야 할 모습이다. 어떤 점에서 싯다르타는 인간상의 롤모델, 스승의 모습이다.

"저는 빈털터리이지요." 싯다르타가 말하였다. "당신이 말씀하시는 의미대로라면 말입니다. 확실히 저는 빈털터리입니다.
그렇지만 그건 제가 좋아서 한 일이고, 저는 곤궁한 것은 아닙니다."
"한데 당신이 빈털터리라면 무엇으로 살아가실 작정이오?"
"저는 아직까지 한 번도 그 문제를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나으리. 저는 삼 년 이상을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제가 무얼 먹고 살아가야 할지 그런 것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다른 사람의 소유물로 살아오셨군요?"
"어쩌면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군요. 그렇지만 사실 상인도다른 사람들의 물건으로 살아갑니다."
"그럴듯한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상인은 남의 물건을 거저얻는 것은 아니지요. 그는 그 대가로 다른 사람에게 자기 물건을 주지요."
"사실상 사람 사는 실정이라는 것이 그런 것 같군요. 누구나 서로 주고받는 것, 인생이란 그런 것이지요." - P-1

 "글을 쓰는 것은 좋은 일이고, 사색하는 것은 더 좋은 일이다. 지혜로운 것은 좋은 일이고, 참는 것은 더 좋은 일이다." - P-1

이 강물은 흐르고 또 흐르며, 끊임없이 흐르지만, 언제나 거기에 존재하며, 언제 어느 때고 항상 동일한 것이면서도 매 순간마다 새롭다! 오, 과연 그 누가 이 사실을 파악할 수 있으며, 이 사실을이해할 수 있으리! 그는 그것을 이해하거나 파악하지는 못하였으며, 단지 예감이, 먼 기억이, 신의 음성들이 활동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 P-1


바주데바는 매우 주의 깊게 그의 말을 귀담아들었다. 그는싯다르타가 이야기하는 내력, 유년 시절, 배움, 구도 행위, 기쁨, 곤경, 이 모든 것을 경청하면서 자기 내면에 받아들였다.
이것이야말로 뱃사공의 가장 큰 미덕들 가운데 하나였으니,
남의 말을 그보다 더 진지하게 귀 기울여 들어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야기를 하고 있는 싯다르타는 바주데바가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은 채 자기가 하는 말을 고요하게, 마음을 툭터놓고, 느긋하게 마음속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바주데바가 자기가 하는 말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초조하게 다음말을 기다리는 법이 없이, 자기가 말하는 중에도 칭찬의 말도꾸중의 말도 하지 않고서, 다만 가만히 귀 기울여 듣고만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싯다르타는, 이런 식으로 자기 말을 들어주는 사람에게 자신을 고백한다는 것, 그리고 그런 사람의마음속에다 자신의 인생, 자신의 구도 행위, 자신의 고뇌를 털어놓는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를 느꼈다. - P-1

바주데바의 얼굴이 밝은 미소로 가득 찼다.
"그래요, 싯다르타." 그는 말했다. "당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강물은 어디에서나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강의 원천에서나, 강 어귀에서나, 폭포에서나, 나루터에서나, 시냇물의 여울에서나, 바다에서나, 산에서나, 도처에서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강에는 현재만이 있을 뿐, 과거라는 그림자도, 미래라는 그림자도 없다. 바로 이런 것이지요?"
"바로 그렇습니다." 싯다르타가 말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배웠을 때 나는 나의 인생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나의 인생도 한 줄기 강물이었습니다. 소년 싯다르타는 장년싯다르타와 노년 싯다르타로부터 단지 그림자에 의하여 분리되어 있을 뿐, 진짜 현실에 의하여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싯다르타의 전생(前生)들도 결코과거의 일이 아니었으며, 싯다르타의 죽음이나 범천(梵天)에로의 회귀도 결코 미래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무것도 없었으며,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은 현존하는 것이며, 모든것은 본질과 현재를 지니고 있습니다." - P-1

벌써 오래전부터 그는 자기가고타마와 이제 더 이상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고타마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는없었다. 그렇다, 진실로 도를 구하고자 하는 자라면, 진실로도를 얻고자 하는 자라면, 어떠한 가르침도 받아들일 수가 없는 법이다. 그러나 이미 득도한 자는 모든 각각의 가르침을, 모든 각각의 길을, 모든 각각의 목표를 인정할 줄 아는 법이며, 그런 경지에 도달한 자를, 영원 속에 살며 신적인 것을 호흡하는 수천의 다른 성자들과 떼어 놓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 P-1

그는 싯다르타의 팔을 다정하게 어루만지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친구여,
그 점에 대해서도 강물한테 물어보세요. 강물이 그 말을 듣고어이없다는 듯이 비웃는 소리를 들어 보세요! 당신이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던 것은, 당신 아들이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는운명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였다. 당신은 설마 정말로그렇게 믿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리고 도대체 당신이 무슨 능력으로 당신 아들을 윤회의 소용돌이로부터 보호해 줄수 있다는 겁니까?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지요? 가르침을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훈계를 통해서 그럴 수 있다는겁니까? 이보세요. 친구. 도대체 당신은 벌써 그 이야기를, 바라문의 아들 싯다르타의 그 교훈적인 이야기를 몽땅 잊어버렸단 말인가요? 당신이 나에게 그 옛날 바로 이 자리에서 들려주었던 그 이야기 말이에요. 누가 사문인 싯다르타를 윤회로부터, 직업으로부터, 탐욕으로부터, 어리석음으로부터 지켜 주었던가요? 아버지의 경건함, 스승들의 훈계, 자신의 자식, 자신의 구도 행위가 그를 지켜 줄 수 있었던가요? 어느 아버지,
어느 스승이 지켜서서 그를 말릴 수가 있었겠어요? 스스로삶을 영위하는 일, 그러한 삶으로 스스로를 더럽히는 일, 스스로 자신에게 죄업을 짊어지게 하는 일, 스스로 쓰디쓴 술을마시는 일,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아내고자 하는 일, 그런 일을 못하게 누가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 친애하는 친구여, 이러한 길이 어느 누구한테는 혹시 면제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당신이 설마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당신이 어린 아들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당신이 그 아이에게는 제발 - P-1

이제 그는 사람들을 예전과는 다른 눈으로 보았더. 예전보다 덜 총명하고 덜 오만스러워진 대신에, 더 따뜻하고 더 호기심이 많고 더 많은 관심을 지닌 눈길로 사람들을 보았다. 혼히 볼 수 있는 그런 통상적인 부류의 여행자들, 그러니까 어린애 같은 인간들과 장사꾼들, 그리고 무사들과 부인네들을 건네다 줄 때면 예전과는 달리 그 사람들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그들을 이해하였다. 그리고 그는, 생각과 통찰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충동과 욕망에 의해 좌우되는 그들의생활을 이해하였으며, 그 자신도 더불어 그런 생활을 하였다.
그는 그들과 똑같이 느꼈다. 비록 그가 완성의 경지에 가까이가 있었고, 최근 마음의 상처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음에도불구하고, 그에게는 이러한 어린애 같은 인간들이 자기의 형제들처럼 느껴졌다. 그들의 허영심, 탐욕이나 우스꽝스러운 일들을 이제 그는 웃음거리가 아니라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일.
사랑스러운 일, 심지어는 존경할 만한 일로 여기게 되었다.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맹목적인 사랑, 외동아들에 대해 우쭐해하는 아버지의 어리석고 맹목적인 자부심, 몸에 달고 다닐 장신구를 얻기 위하여, 그리고 사내들이 자기들을 경탄의 눈길로 바라보도록 하기 위하여 애쓰는 허영심 많은 젊은 여인들의 맹목적이고도 거친 열망, 이 모든 충동들, 이 모든 어린애같은 유치한 짓들, 이 모든 단순하고 어리석은, 그렇지만 어마어마하게 강한, 억센 생명력을 지닌, 끝까지 강력하게 밀어붙여 확고한 자리를 굳히는 충동들과 탐욕들이 싯다르타에게는이제 더 이상 결코 어린애 같은 짓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는바로 그런 것들 때문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 P-1

바로 그런 것들 때문에 사람들이 무한한 업적을 이루고, 여행을 하고, 전쟁을 일으키고, 무한한 고통을 겪고, 무한한 고통을 감수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는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그들을 사랑할 수 있었으며, 그는 그들의 모든 욕정들과행위들 하나하나에서 바로 생명, 그 생동하는 것, 그 불멸의것, 범(梵)을 보았다. 그런 인간들은 바로 그들의 맹목적인 성실성, 맹목적인 강력함과 끈질김으로 인하여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고 경탄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들에게는 아무것도부족한 것이 없었으며, 지식인이자 사색가인 자기가 그들보다앞선 것이라고는 단 한 가지 빼놓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미미하고 사소한 그 한 가지란 것은 바로 그 의식, 즉 모든 생명의단일성을 의식하는 생각이라는 것이었다. 싯다르타는 심지어가끔씩 이러한 지식, 이러한 생각이 과연 그렇게 매우 높게 평가되어야 하는 것인가, 이러한 생각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혹시 생각하는 인간, 아니 생각하는 철부지인 자기의 어린애같은 유치한 것은 아닐까 하고 의심을 품는 일까지 있었다. 생각한다는 점을 제외한 그 밖의 다른 모든 점에서는 세속적 인간들이 현인인 자기와 대등한 위치에 있었으며, 자기를 훨씬능가할 때도 자주 있었다. 이는 짐승들도 불가피한 경우에는끈질기고 확실한 행동을 취한다는 점에서 인간을 능가하는것처럼 보일 수가 있는 경우가 많은 것과 흡사한 일이었다.
싯다르타의 내면에서는, 도대체 지혜란 것이 무엇이며 자신이 오랜 세월 동안 추구해 온 목적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인식과 깨달음이 서서히 꽃피어 났으며 서서히 무르익어 갔다. - P-1

그 무엇이라는 것은 바로 매 순간마다, 삶의 한가운데에서 그단일성의 사상을 생각할 수 있는, 그 단일성을 느끼고 빨아들일 수 있는 영혼의 준비 상태, 그런 일을 해낼 수 있는 하나의능력, 하나의 비밀스러운 기술에 다름 아니었다. 조화, 세계의영원한 완전성에 대한 깨달음, 미소, 단일성이 그의 내면에서서서히 꽃피어났으며, 바데바의 늙은 동안(童顔)으로부터그에게 반사되어 비추었다. - P-1

싯다르타가 말하였다. "내가 스님에게 들려드릴 말씀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혹시 이런 말씀을 드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스님은 지나칠 정도로 구도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은아닐까요? 구도 행위에 너무 매달린 나머지 깨달음에 이르지못하는 것은 아닌지요?"
"도대체 어째서 그렇다는 겁니까?" 고빈다가 물었다.
"누군가 구도를 할 경우에는" 싯다르타가 말하였다. "그 사람의 눈은 오로지 자기가 구하는 것만을 보게 되어 아무것도찾아낼 수 없으며 자기 내면에 아무것도 받아들일 수가 없는결과가 생기기 쉽지요. 그도 그럴 것이 그 사람은 오로지 항 - P-1

상 자기가 찾고자 하는 것만을 생각하는 까닭이며, 그 사람은하나의 목표를 갖고 있는 까닭이며, 그 사람은 그 목표에 온통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까닭이지요. 구한다는 것은 하나의 목표를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찾아낸다는 것은 자유로운 상태, 열려 있는 상태, 아무 목표도 갖고 있지 않음을 뜻합니다. 스님, 당신은 어쩌면 실제로 구도자일 수도 있겠군요. 목표에 급급한 나머지 바로 당신의 눈앞에 있는 많은 것을 보지못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 P-1

지혜라는 것은 남에게 전달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네. 지혜란 아무리 현인이 전달하더라도 일단 전달되면 언제나 바보같은 소리로 들리는 법이야."
"자네 농담을 하는 건가?" 고빈다가 물었다.
"농담하고 있는 게 아닐세. 나는 내가 깨달은 사실을 말하고 있는 걸세. 지식은 전달할 수가 있지만, 그러나 지혜는 전달할 수가 없는 법이야. 우리는 지혜를 찾아낼 수 있으며, 지혜를 체험할 수 있으며, 지혜를 지니고 다닐 수도 있으며, 지혜로써 기적을 행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지혜를 말하고 가르칠 수는 없네. 바로 이러한 사실을 이미 젊은 시절부터 나는 이따금씩 예감했으며, 이 때문에 내가 그 스승들 곁을 떠났던 거야. 나는 한 생각을 얻었지. 고빈다. 내가 그 생각이 무엇인가를 말하면 자네는 그것을 또 농담 또는 어리석은 말이라고 여길 터이지만 그 생각은 나로서는 최고의 생각이네. 내가 깨달은 최고의 생각이란 이런 거야. ‘모든 진리는 그 반대도 마찬가지로 진리이다!‘ 좀 더 자세하게 이야기하자면 이렇네. ‘진리란 오직 일면적일 때에만 말로 나타낼 수 있으며, 말이라는겉껍질로 덮어씌울 수가 있다!‘ 생각으로써 생각될 수 있고 말로써 말해질 수 있는 것, 그런 것은 모두 다 일면적이지. 모두다 일면적이며, 모두 다 반쪽에 불과하며, 모두 다 전체성이나완전성, 단일성이 결여되어 있지. 그리하여 세존 고타마께서도 이 세상에 대하여 설법을 하실 때에, 이 세상을 윤회와 열반, 미혹과 진리, 번뇌와 해탈로 나누지 않을 수 없었던 거야달리 어떤 방법이 없지. 가르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그 방 - P-1

법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어. 그러나 이 세계 자체, 우리 주위에 있으며 우리 내면에도 현존하는 것 그 자체는 결코 일면적인 것이 아니네. 한 인간이나 한 행위가 전적인 윤회나 전적인열반인 경우란 결코 없으며, 한 인간이 온통 신성하거나 온통죄악으로 가득 차 있는 경우란 결코 없네. 그런데도 그렇게 보이는 까닭은 우리가 시간을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네. 시간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네, 고빈다. 나는 이것을 몇 번이나 거듭하여 체험하였네. 그리고 시간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현세와 영원 사이에, 번뇌와 행복 사이에, 선과 악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것처럼 보이는간격이라는 것도 하나의 착각인 셈이지." - P-1

이야기야. 그 죄인의 미래라는 것은 모두 다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네. 자네는 그 죄인의 내면에 깃들어 있는, 자네의 내면에 깃들어 있는, 아니 모든 중생 개개인의 내면에 깃들어 있는 바로 그 생성되고 있는 부처를 바로 그 부처가 될 가능성을 지닌 부처를, 바로 그 숨어 있는 부처를 존중하지 않으면안 되네. 고빈다. 이 세계는 불완전한 것도 아니며, 완성을 향하여 서서히 나아가는 도중에 있는 것도 아니네. 그럼, 아니고말고, 이 세계는 매 순간순간 완성된 상태에 있으며, 온갖 죄업은 이미 그 자체 내에 자비(慈悲)를 지니고 있으며, 작은 어린애들은 모두 자기 내면에 이미 백발의 노인을 지니고 있으며, 젖먹이도 모두 자기 내면에 죽음을 지니고 있으며, 죽어가는 사람도 모두 자기 내면에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아무도 다른 사람에 대하여 그 사람이 스스로의 인생행로에서 얼마만큼 나아간 경지에 있는가를 감히 이러쿵저러쿵 말할 수는 없네. 도둑과 주사위 노름꾼의 내면에 부처가 깃들어 있고,
바라문의 내면에 도둑이 도사리고 있으니 말이야. 깊은 명상에 잠긴 상태에서는 시간을 지양할 수가 있으며, 과거에 존재하였던, 현재 존재하고 있는, 그리고 미래에 존재할 모든 생명을 동시적인 것으로 볼 수가 있어. 그러면 모든 것이 선하고,
모든 것이 완전하고, 모든 것이 바라문이야. 따라서 나에게는 존재하고 있는 것은 선하게 보이며, 나에게는 죽음이나 삶이 다 같게 보이며, 죄악이나 신성함이 똑같이, 지혜로움이나어리석음이 똑같이 보여. 세상만사의 이치가 틀림없이 그러하며, 세상만사는 오로지 나의 동의, 오로지 나의 흔쾌한 응낙, - P-1

그리고 나의 선선한 양해만을 필요로 할 뿐이네. 이것은 나에게는 좋은 일이지. 나를 후원해 줄 뿐, 나에게 결코 해를 입힐수는 없으니 말이야. 나는 나 자신의 육신의 경험과 나 자신의 영혼의 경험을 통하여 이 세상을 혐오하는 일을 그만두는법을 배우기 위하여, 이 세상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하여, 이 세상을 이제 더 이상 내가 소망하는 그 어떤 세상, 내가 상상하고 있는 그 어떤 세상, 내가 머릿속으로 생각해 낸일종의 완벽한 상태와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있는그대로 놔둔 채 그 세상 자체를 사랑하기 위하여 그리고 기꺼이 그 세상의 일원이 되기 위하여, 내가 죄악을 매우 필요로 하였다는 것을, 내가 관능적 쾌락, 재물에 대한 욕심, 허영심을 필요로 하였다는 것을 그리고 가장 수치스러운 절망 상태도 필요로 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네. 고빈다. 이것은 나의마음속에 떠올랐던 생각들 가운데 몇 가지를 이야기한 거야."
싯다르타는 몸을 굽혀 땅바닥에서 돌멩이 한 개를 집어 들더니 손 안에 넣고 이리저리 흔들었다.
"여기 있는 이것은" 하고 그는 돌멩이를 만지작거리면서 말하였다. ‘한 개의 돌멩이네. 이 돌멩이는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아마도 흙이 될 것이며, 그 흙에서는 식물, 아니면 짐승이나사람이 생겨나게 될 거야. 예전 같았으면 이럴 때 나는 다음과 같이 말했겠지. ‘이 돌멩이는 단지 한 개의 돌멩이일 뿐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며, 그것은 마야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순환적인 변화를 거치는 가운데 인간이 될 수도 있고 정신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연유로 - P-1

나는 그것에도 가치를 부여해 주는 바이다. 예전 같았으면 나는 아마도 그렇게 생각하였을 거야. 그러나 지금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 ‘이 돌멩이 돌멩이다. 그것은 또한 짐승이기도하며, 그것은 또한 신이기도 하며, 그것은 또한 부처이기도 하다. 내가 그것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까닭은 그것이 장차 언젠가는 이런 것 또는 저런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이미 오래전부터 그리고 항상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다음과 같은 사실, 그러니까 그것이 돌멩이라는 사실, 그것이 지금 그리고 오늘 나에게 돌멩이로 보인다는 사실.
바로 그러한 사실 때문에 나는 그것을 사랑하는 것이며, 돌멩이에 나 있는 갖가지 줄무늬와 움푹 패어 있는 구멍 하나하나, 노란색이나 회색을 띠고 있는 돌멩이의 빛깔, 돌멩이의 단단한 정도, 두드릴 때 돌멩이가 내는 소리, 말라 있거나 물기가 있는 돌멩이의 표면, 그런 것에서 나는 돌멩이의 가치와 의의를 발견하게 돼, 돌멩이를 만져 보면 그중에는 촉감이 기름이나 비누처럼 미끌미끌한 것도 있고, 나뭇잎 같은 것도 있고,
모래 같은 것도 있지. 모든 돌멩이는 하나하나가 제각기 독특한 것이며, 제각기 나름대로의 방식대로 옴을 읊조리고 있으니, 모든 돌멩이 하나하나가 바라문인 셈이지. 그렇지만 이와동시에 꼭 마찬가지로 그 돌멩이는 돌멩이이기도 하며, 기름같은 느낌을 주거나 비누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지. 그리고 바로 이 점이 내 마음에 들어. 바로 이 점이 나에게는 경이롭고숭배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처럼 여겨져. 하지만 이제 더 이상내가 이 문제에 대해서 말하는 일이 없었으면 해, 말이란 신비로운 참뜻을 훼손해 버리는 법일세. - P-1

1 "무슨 이유로 자네는 나에게 그 돌멩이 이야기를 하였나?"
그는 잠시 후에 머뭇거리며 말하였다.
"별다른 의도 없이 그냥 무심코 한 이야기였네. 그게 아니면 혹시, 나는 바로, 그 돌멩이를, 그 강을,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가 관찰함으로써 배움을 얻을 수 있는 이 모든 사물들을사랑하고 있다는 의미로 그 이야기를 하였었는지도 모르겠어.
한 개의 돌멩이를 나는 사랑할 수 있어, 고빈다, 그리고 나무한 그루 또는 나무껍질 한 개도 사랑할 수 있고 그것들은 사물이며, 그리고 우리는 사물을 사랑할 수가 있지. 그렇지만 나는 말은 사랑할 수가 없지. 그 때문에 나에게는 가르침이라는것이 아무 쓸모가 없는 거야. 가르침은 아무런 단단함도, 아무런 부드러움도, 아무런 색깔도, 아무런 가장자리도, 아무런 냄섀도, 아무런 맛도 갖고 있지 않아. 그 가르침이라는 것은 말이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는 이야기지. 자네가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바 - P-1

로 이 가르침이라는 것, 바로 그 무수한 말들이 아닐까 싶어.
그 까닭은 말이지, 해탈과 미덕이라는 것도, 윤회와 열반이라는 것도 순전한 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야, 고빈다. 우리가열반이라고 부르는 것,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아. 다만 열반이라는 단어만이 존재할 뿐이지." - P-1

"그것 역시." 하고 싯다르타가 말하였다. "나에게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네. 그 사물들이 가상이든 아니든 그것은 별문제가 안 돼. 만약 그 사물들이 가상이라면, 그렇다면 나 역시 사실 가상적 존재인 셈이지.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그 사물들은 언제나 변함없이 나와 똑같은 종류인 셈이지. 그 사물들이 나와 동류의 존재라는 사실, 바로 이러한 사실 때문에 나는 그 사물들을 그토록 사랑스럽게 여기는 것이고 그토록 숭배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기는 거야. 그 사물들이 나와 동류라는 사실 때문에 나는 그것들을 사랑할 수 있어. 자네가 들으면 그런 가르침도 다 있느냐며 비웃을 터이지만 이것도 아무튼 하나의 가르침이야. 사랑이라는 것 말일세,
고빈다. 그 사랑이라는 것이 나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으로 여겨져, 이 세상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일, 이 세상을 설명하는 일, 이 세상을 경멸하는 일은 아마도 위대한 사상가가할 일이겠지. 그러나 나에게는,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것, 이 세상을 업신여기지 않는 것, 이 세상과 나를 미워하지 않는 것, 이 세상과 나와 모든 존재를 사랑과 경탄하는 마음과 외경심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는 것, 오직 이것만이 중요할 뿐이야.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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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에 구원받는다는 것 - 삶을 파괴하는 말들에 지지 않기
아라이 유키 지음, 배형은 옮김 / ㅁ(미음)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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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들은 문장이 유려하고 생각이 멋져서 감탄하며 보게 된다. 이런 책들은 읽는 동안 독서의 즐거움을 충분히 느끼게 한다. 하지만 책을 덮고 나서는 쓸까말까 생각 줄다리기를 아슬하게 하고 있는 나에게 내가 굳이 쓰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쪽으로 기울게 만든다. 쓰지 않아도 될 당위성을 스스로에게 부여하면서도 어깨는 움츠려든 상태다.
이 책은 장애인들의 말과 그들의 소통을 가까이서 들여다본 문학 연구가의 이야기다. 여러 지점들에서 좋았는데, 가장 좋았던 건 나에게 용기를 한 뼘 가지게 한 점이다. 내 이야기도 어쩌면 쓸모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전의 요코타 씨와 이야기를 나눌 때 저도 모르게 "우리는"
"이나 "이 사회는" 같은 ‘큰 주어‘로 말하면 요코타 씨는 다음과같이 되물었습니다.
그래서 자네는 어떻게 할 건데? 자네는 어떻게 하고 싶어?
중요한 것은 ‘나‘라는 ‘작은 주어‘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렇게 글을 쓰는 일입니다.
글을 계속 쓰는 일입니다.
예전에 경종을 울렸다는 것.
경종을 울린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
그 역사를 말로 바꾸어 다시 한 번 이 시대에 울려 퍼지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저는 내년에도, 후년에도 그다음 해에도, 7월이 오면 사가미하라 사건에 대해 쓰려고 합니다. 함께 이 문제를 생각하고, 이 문제를 놓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계속해서 고민하고 괴로워하려고 합니다. - P-1

처음 만난 지적 장애인과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없었던 점도힘들었다. 지적 장애인과의 의사소통에는 비장애인과의 소통과다른 부분이 있다. 상대가 이해하기 쉽게 사인을 보내고 상대의사인을 읽는 특유의 기법 같은 것이 있어서, 시간을 들여 관계성을 쌓아야 커뮤니케이션 감각이 생긴다는 사실을 지금은 안다.
더 나아가 사람과 사람은 서로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끌어안은 채 같은 시간과 장소를 겪기만 해도의미가 있는 법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 P-1

내가 하는 일에는 ‘누군가의 인생을 말로 바꾸는‘ 작업이 어쩔 수 없이 따라온다. 몇 년을 해왔어도 이 작업에 익숙해지지못했고 매번 꺼림함이 남아서 고민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이 사람에 대해 얼마나 알아야 이 사람의 인생에 대해쓸 수 있을지‘가 고민거리다.
이 ‘쓸 수 있을까‘에는 ‘능력 면에서 가능한가 아닌가‘와 ‘자격이 있는가 없는가‘에 해당하는 요소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만약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인물에 대해 쓴다면, 그 혼돈한 삶의발자취를 ‘내 문장력으로 정리할 수 있을까‘와 ‘나 같은 사람이정리해도 괜찮을까‘라는 물음을 두고 머리를 싸매며 고민한다.
경험상 서너 시간 정도 취재하면 전자의 의문에는 깔끔히 결론이 난다. ‘짧은 취재로는 아주 깊게 조사해내기 힘드니 일단문장만이라도 읽기 쉽게 정리하자‘는 식의 결론이다. 한편 그 사람과 3, 4년간 깊이 사귀게 되면 거꾸로 후자의 물음에는 자신이 생기지만 읽기 쉬운 글로 완성하기가 불가능해진다. 쓰고 싶은 내용이 너무 많아서 정리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다만 나는 이 ‘정리할 수 없다‘는 느낌이 싫지 않다. 오히려 굉 - P-1

장히 좋다. 이 감각은 예를 들자면 ‘추억 사진을 정리할 때 느끼는 감각‘에 가깝다. 소중한 사람과 함께 찍은 사진을 들춰볼 때한장 한장에 얽힌 에피소드는 얼마든지 풀어낼 수 있지만, 그사람의 인생이나 그가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지를 말로 설명하려 하면 좀처럼 술술 나오지 않는 법이다.
‘깔끔하게 말로 정리할 수 없는 것의 귀중함‘에 손쓸 수 없이이끌린 나는 어떻게든 그것을 말로 표현하고 싶다고 소원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과 자격이 나에게 있는가 하면......
처음의 물음으로 돌아가기를 되풀이하고 만다.
이러한 말의 문제는 조금 거칠게 표현하면 ‘요약하기‘와 ‘일부를 보여주기‘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요약하기‘는 커다란 세계나 복잡한 현상의 축소판을 만드는일이다. 요약을 할 때는 정확한 미니어처를 만드는 기술 수준이중요하다.
이에 비해 ‘일부를 보여주기‘는 너무 커서 다 표현할 수 없는것의 일부를 보여줌으로써, 미처 다 표현하지 못한 전체를 상상하게 만드는 방법이다. 앞서 든 추억 사진 예처럼 각각의 사진에 얽힌 에피소드를 전달해서 사진 속 인물의 존재감이 얼마나큰지 느끼게 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학자는 두 방법 중 ‘요약‘의 전문가일 것이다. 아니, 그래야 한다. 나 역시 현상을 정확하고 치밀한 언어로 표현하는 훈련을받았다(받기는 했다.......
하지만 세상에는 ‘일부를 보여주는‘ 방법으로밖에 표현할 수 - P-1

없는 것들이 존재한다. 내 안에도 있다. 전하려는 쪽이 가진 말의 기술로는 도무지 그려낼 수가 없어서 받아들이는 쪽의 감수성과 상상력을 무작정 믿고 맡길 수밖에 없다. 그런 기도에 가까운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을 때가 있다.
애당초 ‘요약‘이라는 것은 ‘너 같은 건 나한테 알기 쉬운 존재가 되어라‘라는 오만함과 이웃 관계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그렇지 않은 말의 존재를, 기도와 같은 말의 무게를, 다양한 사람의말의 힘을 빌려 표현해보자...... 는 터무니없는 시도의 결과물이 이 책이지만, 그것이 성공했는지 아닌지야말로 받아들이는분들을 믿고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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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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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전 잠깐 읽으려고 폈다가 한밤중이 되어서야 책을 덮을 수 있었다. 왜 줄리언 반스, 줄리언 반스 하는지 이 책을 읽고 알게 되었다.(‘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읽기에 실패했었다.)
타인을 이해하는 것의 불가능성에 대해, 배교자 율리아누스의 이해에 대해, 우리 사회가 동조하는 가치에 의구심을 가지는 태도에 대해, 행복에 근접해지기 위한 스토아철학의 방법(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을 구분짓는 것)에 대해, 그리고 인생에 끼어든 우연에 대해 생각해보았고, 대체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깊이 새겼다.

그리고 잊지 마세요. 전기나 역사책은 말할 것도 없고 소설에서도 어떤 인물이 형용사 세 개로 줄어들어 깔끔하게 정리되는 게 보이면 그런 묘사는 늘 불신하세요. - P-1

핀치의 공책에서.

-성공에 대한 자족과 마찬가지로 실패에 대한 자족도 있을 수 있다.

말할 필요도 없지만 그녀에게는 둘 다 없었다. 또 자신을 성공 대 실패라는 맥락에서 생각한 적도 없었을 것이다.
- P-1

그녀가 우리에게 한 가지 가르쳐준 게 있다면 역사는 길게 보아야 한다는 것, 나아가서 역사는 무기력하게 혼수상태로 누워 우리가 크고 작은 망원경을 들이대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활동적이고 들끓고 가끔 화산처럼 폭발한다는 것이었다. - P-1

 ‘너는 나보다 똑똑하고 나보다 젊고 나는 너를 누이로서 사랑하지만 너도 모든 걸 아는 건 아니구나. 그것 때문에, 웃기는 일이기는 하지만, 누이를 더 사랑하게 됐어요. 이상한 거예요, 인생이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동의했다. - P-1

적-스토아철학적이었다고 말하고 싶은데, 그건 어울린다. 그럼 내가 아내 둘보다 그녀를 더 사랑했을까? 이런 식으로 말해보자. 사랑하는 사람을 깊이 또 잘 알고 있다 해도 그 사람에게 놀라게 되는 것이 사랑의 속성이다. 그게 사랑이 살아있다는 표시다. 타성은 사랑을 죽인다. 성적인 사랑만이 아니다. 모든 사랑이 마찬가지다. 내 경험으로는 부부의 사랑에서 ‘놀라움‘은 첫 몇 년 뒤에는 가끔 그저 별난 행동 때문일 뿐이라는 게 드러나기도 한다. 더 나쁜 것은, 그런 행동이 단지 남편만이 아니라 자기가-사실은 삶 자체가 지겨워졌다는 표시라는 점이다. - P-1

-영어에서 ‘사랑‘이라는 말보다 신비화되고, 오용되고, 오해되고, 의미와 의도가 제멋대로이고, 오염되고, 거짓말하는 수많은입에서 나온 침으로 더럽혀진 말이 있을까? 이를 두고 불평하는것보다 진부한 것이 있을까? 이런 오용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말을 대체할 수 없으니 이 말은 동시에 강건하고 단단하고 그 갑옷은 뚫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물도 폭풍도 못 건드리고 벼락도비껴간다. - P-1

그분은 내 평생 이야기를나누어 다른 어떤 여자하고도 완전히 달랐어. 대부분의 여자는 ‘우리가 어떻게 만났나‘ 하는 이야기를 해" 그녀는 공중에 따옴표를 찍었다 "그리고 ‘뭐가 잘못됐나‘ 또 ‘어떻게 끝났나‘ 또 ‘내가 그 모든 것에서 뭘 배웠나.‘ 그걸 비난하는 게 아냐. 나도 그러니까 내 인생을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지. 우리 모두 그래. 그런데 EF는 그런 식이 아니었어. 결론은 주지만 서사는 주지 않았어. 왜? 뻔하고 일반적인 이유는프라이버시, 신중함 그런 이유겠지. 하지만 나는 어쩌면 이건그보다 큰 걸 수도 있겠다고 판단했어. 인생은, 우리가 아무리 그렇게 되기를 바라더라도, 서사에는 이르지 못한다는 느낌 - 또는 우리가 이해하고 기대하는 서사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느낌." - P-1

스토아 학파의 사상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일이 있고 어떻게 해보 수 없는 일이 있다. 우리는 그 둘을 구별하는 걸 배워야 하며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일은 어쩔 도리가 없다는 걸 깨달아야 하고 이것이 우리를 삶에 대한 올바를 철학적 이해로 이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 P-1

 그걸 보고 실패가 성공보다 흥미로울 수 있고, 패자가 승자보다 많은 이야기를 해준다는 EF의 말이 기억났다. 또 심지어 임종을 맞이할 때도 어쩌면특히 임종을 맞이할 때 우리가 어떻게 심판받을지, 또는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다 해도 어떤 식으로 남을지 알 수 없다고 말한 것도. 모래에 발자국을 남기지만 다음 바람이 쓸어가 버릴지도 모른다. 또는 먼지에 발자국을 남겼는데 우연히도 폼페이에 사는 바람에 수백 년 동안 그 완벽한 형태가 살아남을지도. 린다를 생각할 때면 안나가 수십 년 뒤 개입 - P-1

나는 율리아누스를 생각했다. 수백 년의 세월이 그를 해석하고 또 재해석해 온 방식. 여러 색깔의 조명을 받으며 무대를 가로질러 걸어가는 사람처럼. 오, 저 사람은 빨간색이야,
아니야, 주황색에 가까워, 아니야, 검은색에 가까운 인디고야, 아니야, 저 사람은 완전히 검은색이야. 이보다는 덜 극적이고 덜 극단적이지만 이게 어떤 사람의 인생을 보든 벌어지는 일인 것으로 보인다. 그 사람의 부모, 친구, 연인, 적, 자식이 각각 보는 방식. 지나가던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그의 진실을 눈치채기도 하고, 오랜 친구가 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기도 하고. 사실 사람들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보는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본다. 뭐, 사람으로 살려면 자기역사를 잘못 알아야 한다. - P-1

아마도 내가 엘리자베스 핀치를 ‘알고‘ 또 ‘이해하는‘ 것은 율리아누스 황제를 ‘알고‘ 또 ‘이해하는‘것보다 나을 것이 없을 것이다. - P-1

다시 그녀의 모습이 보인다. 점심 테이블에서 내 쪽으로몸을 기울이고 있다. 내가 파스타가 아닌 송아지 고기 에스칼로프를 택한 뒤다. "어떤가요?" 그녀가 열띤 표정으로 묻는다. "실망스럽나요?" 마치 다른 모든 것에 관해서도 그렇게 물어보고 있는 것 같다. 인생, 하느님, 날씨, 정부, 죽음, 사랑, 샌드위치, 미완성 걸작의 존재. - P-1

그래서 나도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다. 운이, 우연이 자기뜻대로 하게 놓아두는 것. 나는 지금까지 쓴 것을 서랍에 넣어두고, 어쩌면 그 옆에 EF의 공책들도 놓아둘 것이다. 가끔 내 자식 하나가 내가 죽은 뒤 그걸 발견하는 상상을 한다.
"오 이것 봐, 아빠가 책을 썼네! 읽어보고 싶은 사람?" "그것도 미완성 프로젝트겠지." "우리 같은." 그런 다음 자식들은아버지로서 나의 결함을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내가 타자로친 것을 다시 서랍에 던져 넣고 청소부가 쓰레기통에 버리게할지도 모른다. 아니, 나는 지금 내 자식들을 지나치게 깎아내리고 있다. 셋 가운데 하나는 아빠가 하던 일을 보자 약간감상에 젖고, 약간 호기심을 느낄지도 모른다. 어쩌면 다른자식이 엘리자베스 핀치가 누구인지 궁금해하며, 우리가 연인 사이였는지 궁금해하며, EF의 공책들을 들고 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실망을 주고 너무 많은 결론, 불충분한 서사버려질 것이다. 나의 ‘책‘그게 그런 말을 들을 만하다면은 다른 책상의 다른 서랍에 들어갈지도 모르고, 그다음운명은 어쩌면 아직 태어나지 않은 누군가에게 맡겨질지도모른다.
이건 정당할 것이다. 어떤 일은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있고 어떤 일은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없다. 이 일은 지금 내가 어떻게 해볼 수 없고 따라서 내가 자유와 행복을 얻는 것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다. - P-1

결코 타인을 이해할 수 없다는 이 절망 앞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시 읽기뿐이다.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내 바깥의 세상을 바꾸기보다는 내가 변하기 위해서.
김연수 추천의 말 중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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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호프 단편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0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박현섭 옮김 / 민음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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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가은 감독이 유튜브에서 읽는 책이라고 소개해서 체호프의 단편소설집을 읽었다. 읽으면서도 난 왜 체호프가 러시아 단편 소설의 천재라고 불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마도 문학이 가진 역사성에 대한 내 이해가 부족했을터이다. 하지만 친절하게도 책 뒷편 작품 해설에서 왜 체호프가 천재인지를 알려주었다.
1. 특별한 사건이 아닌 일상적인 설정 속에서 전개되는 이야기(근대 이전의 소설은 거대 서사를 주로 펼쳐냈나보다)
2. 사건의 외부적 측면보다 사건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다양하고 모순된 반응에 초점
3.느슨한 플롯과 미결정 상태의 결말
4. 등장인물들 간의 의사소통 단절

제일 희극적이었던 <관리의 죽음>이 기억에 남는다.

물론 궁극적으로 볼 때 체호프의 심원한 세계를 일의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체호프는 한없이 차갑지만 따뜻하고 단호하지만 부드럽다. 그의 익살 뒤에는천근 같은 우수가 기대어 있다. 그의 페시미즘 속에는 질긴 낙관이 숨쉰다. 그의 비밀은 가장 단순하기에 결코 알아낼 수 없다. - P-1

<감옥에 유폐된 한 인간이 엄청난 독서와 구도의 노력을통해 궁극의 진리에 이른다>는 내용은 그다지 체호프답지않다. 대개 체호프의 주인공들은 궁극의 진리를 갈망하지만 결코 그것에 도달하지 못한다. 이들에게 유일한 진리는아무것도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일 뿐이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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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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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책 표지를 보고 말했다.
제목이 농담인데 왜 표지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 작가 사진은 이렇게 진지한 표정이냐고. 안 어울린다고.


이런 말이 안되는 상황을 이해하는 과정이 어른이 되는 것 아닐까?
하나뿐이기에 진지하게 임해야 할 삶이지만 불가해한 일이 너무도 많기에 농담처럼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농담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에 진지한 삶의 통찰을 담은 이 책이 표지 하나로 다 표현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단지 그녀의 단순함이 내가 그때까지 몰랐던 새로운것이어서 내가 루치에에게 끌렸다고 생각한다면 잘못이다.
그녀는 순진하고 배움이 모자랐으나 나를 이해하는 데 전혀문제가 없었다. 그 이해는 많은 경험이나 지식에서 나오는것도 아니었고, 어떤 문제에 대해 토론하고 조언을 해 줄 수있는 능력에 기인하는 것도 아니었으며, 다만 그녀가 내 말을 귀기울여 들으며 그대로 다 받아들여 주는 데서 오는 것이었다. - P-1

나는 스물두 살이었고, 내게 무언가 여성적이거나 어린아이 같은 분위기를 풍기게 할 만한 것들은 무엇이든 피할 때였다. 거리에서 꽃을 들고 다니는 것도 창피스러웠고 꽃을사는 것도 싫었으며 꽃을 받는다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나는 거북해하며 루치에에게 꽃은 남자들이 여자에게 주는 것이지 여자가 주는 것이 아니라고 했지만, 거의 울음을터뜨릴 것처럼 되어 버린 그녀를 보고는 얼른 꽃이 참 예쁘다고 하면서 받아들었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날부터 우리가 만날 때마다 꽃다발이 나를 기다렸고 결국 나도 익숙해졌다. 그 선물이 하도자연스러워 어떻게 할 수도 없었고 또 루치에가 그렇게 나에게 선물을 주는 것을 아주 소중하게 여긴다는 것을 알게 되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말을 잘 못해서 괴로워하다가 꽃을통해서 어떤 말의 형태를 발견했던 것이었다. 그 말은 옛 꽃말들에 담긴 수많은 상징들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보다 더 오래되고, 더 알 수 없고, 더 본능적인 언어 이전의 어떤 것을 뜻했다. 언제나 말하기보다 가만히 있곤 하던 루치에는 언어가 존재하지 않아서 사람들이 세세한 몸짓들로 이
"야기를 하던 시대를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손가락으로 서로•나무를 가리키고, 소리내어 웃고, 서로 몸에 손을 가져다 대고, 그렇게 하던... - P-1

오스트라바에서의 생활도 벌써 일 년이 지났고, 처음에는견디기 힘들던 군복무도 이제는 내게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이 되어 있었다. 그 모든 고달픈 일들 가운데서도 나는 어쨌든 살아 낼 수 있었고, 친구도 두세 명 사귀었으며, 행복했다. 그 여름은 내게 정말 아름다운 여름이었다.(검댕으로 가득한 나무들도 탄광의 어두움을 겨우 씻어 낸 내 눈에는 그지없이 푸르게 보였다.) 그러나 불행의 씨앗은 더할 수 없는 행복의 한가운데 숨어 있는 법이다. 그해 가을의 슬픈 일들은 이 짙푸른 여름에 잉태되어 있었다. - P-1

 그렇다. 다시 돌아올 수 없이. 우리 삶의 모든 중대한 순간들은단 한 번뿐,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이렇게 다시 돌아오지 못함을 완전히 알고 있어야만 인간은 인간일 수 있다. 속임수를 써서는 안 된다. 그런 것을 전혀 모르는 척해서도 안 된다. 현대인은 속임수를 쓴다.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할 중대한 순간들을 모두 교묘히 피해 가려 하고, 그렇게 해서 아무것도 지불하지 않은 채 탄생의 순간에서부터 죽음까지 가려 한다. - P-1

우리의 삶과 관련된 말은 아무리 사소한 문장이어도 결국 우리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음을 보여주고 말았다. 우리의 전망, 우리의 미래가 두 갈래로 갈라지고 있음을. 우리가 서로 반대 방향으로 떠밀려가 버렸음을.
그래서 나는 아주 소소한 상투적인 이야기를 하려고 해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더 나빴다. 일부러 대화를 무의미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 곧 그대로 다 드러나 버렸고 그래서 견디기 힘들어져 버렸다. - P-1

거기에서 나는 이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푸치크가그저 자기 만족으로 썩어 빠진 인간이었을 뿐이라고?
•루드비크는 질주하는 말 같았다. 아니, 그로 하여금 그런글을 쓰게 했던 건 전적으로 그런 자만 때문만은 아니야. 약했던 거지. 아무도 지켜보는 이 없이, 타인들의 찬동도 없이,
오로지 자기 자신과 대면한 채 홀로 고립되어 용감함을 고수하는 일은 엄청난 자긍심과 힘을 요하거든. 푸치크는 대중의도움이 필요했던 거야. 감방의 고독 속에서 적어도 가상의대중이라도 만들어 내야 했지. 그는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이필요했던 거야! 박수 소리로 자신의 힘을 추슬러야 했지! 다른 게 없으니 상상의 박수라도 말이야. 감방을 하나의 무대로 바꿔 놓고 자신의 운명을 전시하고 내보임으로써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야 했던 거야.
나는 루드비크가 몹시 상심했으리라는 예상은 했다. 독기를 품고 있으리라는 예상도 했다. 하지만 이런 광적인 분노나 독설이 날아온 것은 전혀 뜻밖이었다. 그 가엾은 푸치크가 그에게 대체 무슨 잘못을 했다는 말인가? 나는 한 인간의가치는 그가 얼마나 신의를 지키는가에 있다고 본다. 루드비크가 부당한 처벌을 받았다는 것은 나도 안다. 하지만 그렇 - P-1

기 때문에 문제는 더 심각한 것이다. 그의 견해가 바뀐 동기가 너무도 빤히 들여다 보였기 때문이다. 모욕을 받았다는이유 하나만으로 삶 앞에서 자신의 태도를 완전히 뒤집어버릴 수 있는 것인가?
이런 말을 나는 루드비크에게 대놓고 모두 이야기했다.
그러자 예상치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루드비크는 내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 들끓던 분노가 갑자기 그에게서빠져나가 버린 것 같았다. 그는 묘한 눈길로 나를 물끄러미바라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조용하게, 언짢아하지 말라고 말했다. 자기가 잘못 생각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너무도이상하게, 너무도 차갑게 그 말을 했기 때문에 전혀 진심이아니라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나는 그렇게 마음에도 없는빈말로 우리의 대화가 끝나기를 원치 않았다. 기분이 씁쓸하기는 했지만 내 마음은 처음에 다짐했던 그대로였다. 루드비크에게 내 마음을 다 이야기하고 우리의 우정을 회복하고 싶었다. 아무리 서로 심하게 부딪쳤어도 나는 예전에 그토록밝고 환했던 우리 둘의 작은 공간, 이제 우리가 다시 함께 살수 있을 공동의 작은 공간이 어딘가에, 긴 논쟁의 끝에, 마련되어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대화를 계속해 보려는 내 노력은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루드비크는 이번에도 또 과장해서 심하게 말하는 자기 버릇이 도졌노라고 수도 없이 변명을했다. 그리고 자기가 한 말을 모두 잊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 P-1

그렇다. 갑자기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사람들 대부분은 두 가지 헛된 믿음에 빠져 있다. 기억(사람, 사물, 행위,
민족 등에 대한 기억)의 영속성에 대한 믿음과 행위, 실수, 죄,
잘못 등을 고쳐 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다. 이것은둘 다 마찬가지로 잘못된 믿음이다. 진실은 오히려 정반대다. 모든 것은 잊히고, 고쳐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엇을(복수에 의해서 그리고 용서에 의해서) 고친다는 일은 망각이담당할 것이다. 그 누구도 이미 저질러진 잘못을 고치지 못하겠지만 모든 잘못이 잊힐 것이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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