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읽자는 고백 - 십만 권의 책과 한 통의 마음
김소영 지음 / 이야기장수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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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야 할 책과 봐야할 영화가 늘었다.

오랫동안 알고 지냈다고 해서 꼭 서로를 아는 것도 아니라는 흔한 진실을 뼈아프게 깨닫기도 합니다. 그리 놀랄 만한 것도 아닙니다. 실상 우리가 타인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하는 말을 믿는다는 건 항상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고 관계의 실체란 서로를 잘 모르고 있다거나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 아무리 좋게 봐도 일부만을 알고 있음에 지나지 않을 텐데요. - P-1

하지만 우리는 매일 표정을 봅니다. 너무 많은 표정들을봅니다. 그리고 잊지 못합니다. 어떤 순간들은 잊히지 않아서 선명히 쌓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기억이라고 부릅니다. 서로 다른 기억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다른 사람이 되어 또 새로운 표정을 하고서는 매일을 마주합니다. - P-1

 "결국 어느 누구도 책을 포함한 모든 사물로부터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을 수는 없다." (니체, 이 사람을 보라중에서) 흔히들 책을 읽고 나서 무언가를 ‘알게 되었다‘거나
‘새롭게 느끼게 되었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이미 알고 있는자신의 일부를 새 거울로 비춰보았을 뿐이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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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에 대해 생각을 않고 있다가 곧 일을 시작해야 할 것을 생각하다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일에 대한 고찰중 꽤 많은 부분이 공감되었다.

일은 세상과 관계 맺는 법이라는 말이 진득하게 남았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통해 어떻게 세상과 관계 맺고자 하는지 생각하며 일을 시작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일로 나를 대변하는 건 우리 모두가 일을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일까? 그보다는 자신의 일을 사랑해야 한다고 믿게 돼서,
일 말고는 어떤 방식으로 자아를 실현하고 존중과 보람을 얻을수 있는지 모색할 시간이 부족해서가 아닐까. 그래서 「노동의 상실속 이 문장이 정말 아프게 다가왔다. "(우리가 일을 비판할때의) 이 두려움은 자아상실에 대한 진정한 두려움이다." - P-1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세상에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한 일이 얼마나 있을까? 우리는 각자의 일을 서로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내 고통은 매우 구체적이고 남의고통은 단순하다는 말처럼, 내일의 기쁨과 슬픔은 입체적으로다가오지만 남의 일의 기쁨과 슬픔은 내게 잘 와닿지 않는다.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직업이라 해도 그 일의 세부는 당사자가 아니라면 알지 못한다. 나의 일은 이 일을 하지 않는 타인에게 어떤방식으로든 오해를 살 수밖에 없다. - P-1

「내 인생을 바꾼 거절을 읽다가 조이스 서트펀의 「당신이이력서에 쓰지 않은 사실들」이라는 시를 만났다. 일을 중심으로나를 설명하는 문서인 이력서에는 한 사람의 다면적인 모습을 담을 수 없다는 걸 보여 주는 시다. 이따금 이 시를 떠올리면서 나도, 일하면서 만난 타인도 저마다 복잡하고 입체적인 인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싶다. - P-1

내게는 내가 누구였는지에 대한 어떤 단서도 없다.
진실로 나는 한 가지도 알지 못한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다시 올리브 중 - P-1

그즈음 다시, 올리브」를 다시 펼쳤다. 이 안에서 사람들은서로 스쳐 지나가고 싸우고 사랑하고, 어떤 식으로든 관계 맺으며 자신을 알아 가기도 하고 타인을 알아 가기도 한다. 내가 누구였는지에 대한 단서는 오로지 나와 타인 사이의 어딘가에 있다. - P-1

팟캐스트를 듣다가 ‘전문성‘에 관한 흥미로운 인터뷰를 접했다.
「빅 리틀 라이프」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커리어 고민」 편에서진행자는 변호사·교사·개발자 등 다양한 일을 하는 이들에게당신은 전문성을 가진 사람인지, 어떤 직업이 전문성을 갖췄다고 생각하는지 묻는다.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현재 무슨 일을 하는지에 관계없이, 놀랍게도 하나같이 자신은 전문성을 갖추지 못했고 이런저런 업무를 병행하는 제너럴리스트에 가까우며 다른 일을 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전문성을갖춘 것 같다고 답했다. 요컨대 자신을 전문가로 여기는 사람은많지 않고, 전문성이라는 것은 달성하기 어려운 역량으로 여겨진다. - P-1

그러므로 남들도 경험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대수롭지 않게 치부했던 자신의 경험을새롭게 들여다봐야만 한다.
최혜은. 쟈스민 한, 「워크디자인」(21세기북스, 2020) - P-1

 내 약점 덕분에 다른 사람을 더 쉽게 존경하게 된다. 그럴 여지가 크다는 게 좋다. - P-1

뭉뚱그려 ‘일하지 않는 시간‘이 아니라, 내게는 정말 다양한종류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걸 아는 데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고,
지금도 계속 알아 가고 있다. 친구와 가족들을 만나고 돌볼 시간.
좋아하는 책에 마음껏 푹 빠져 있을 시간. 내 손으로 직접 식사를차려 먹을 시간. 좋은 날씨를 만끽할 수 있는 시간. 청소와 빨래를 하고 집 구석구석을 깨끗하게 돌볼 시간. 고양이들 빗질을 해주고 예뻐하고 놀아 줄 시간. 세상의 소식에 귀 기울이고 감정과에너지를 쓸 수 있는 시간. 혹은, 이 모든 것을 하지 않고 가만히앉아 시간을 낭비할 시간. 일하는 시간을 줄이면 할 수 있는 것이너무너무 많다.
실은 일하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고, 일하는 시간을 최소한으로 유지하고 싶다고 말할 때마다 여전히 마음이 조금 쪼그라든다. 남들이 나를 불성실한 사람으로 볼 것 같아서다. 그럴 때면시간을 어떻게 구성할지 직접 고민하고 행동하는 게 내 방식의성실이라고 말하고 싶다.
- P-1

주변에서 ‘꿈이 뭐야?‘ 혹은 ‘뭐가 되고 싶어?"라고 물어보면딱히 할 말이 없다. 일로써 이루고 싶은 것도, 꼭 달성하고 싶은꿈도 없어서다. 대신 이런 이야기는 할 수 있다. 썩 내키지 않는데도 타율에 의해 해야 하는 일을 되도록 하지 않으며 살고 싶다.
일 때문에 다른 즐거움을 접어 둬야 하는 삶이 아니면 좋겠다. 이윤과 생산성을 중심으로 삼고 싶지는 않다. 무엇보다 경제적 자유를 얻어 가능해질 ‘나중의 삶을 위해 지금을 희생하는 방식으로 살고 싶지는 않다.
이제 나는 무엇이 되고 싶은지 생각하지 않는다. 다양한 일을 거쳐 보았기 때문일 수도, 웬만큼 경력이 쌓였기 때문일 수도있다. 어떻게 살고 싶은지 고민하는 게 무엇이 되고 싶은지 고민하는 것보다 어렵지만 중요하다는 걸, 늦게라도 알게 돼서 다행이다. - P-1

오늘날 노동과 소비는 끈끈하게 이어져 있다. 노동에 지친사람들은 쉽게 소비하는 사람이 되고, 노동과 소비 사이를 끊임없이 왕복하다 보면 노동 시간을 줄이거나 노동환경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하지 못한다.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은 그만큼 성실하게일한 것이고, 그러니 좋은 것을 많이 누리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기도 쉽다. 한 사람의 성실의 정도와 벌이가 반드시 비례하는건 아닌데도 말이다. - P-1

일이 아닌 데다 에너지를 들이는 것,
사람들은 그런 것을 가리켜 흔히 사치라 한다.
류은숙, 「아무튼, 피트니스」(코난북스, 2017)

때론 이런 종류의 사치가 우리를 바꿔 놓는다. - P-1

아침에 일어났을 때 세상이 멀쩡하다면,
자는 동안 우린 그만큼 다른 이의 노동에 빚진 것이다.
조경숙, 「액세스가 거부되었습니다.
(휴머니스트, 2023) - P-1

어떤 사람이 그다지 즐기지도 않는 일을 하고 싶은정도 이상으로 힘껏 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를나쁜 사람이며 소속 공동체의 사랑과 보살핌과 지원을받을 자격이 부족한 사람으로 여기게 되었다.
데이비드 그레이버, 「불쉿 잡」(김병화 옮김, 민음사, 2021) - P-1

프로젝트 마감일을 향해 전력으로 달려가지않는 분위기가 낯설었다. 그동안 경험해 보지 못한 감각이었다.
그렇게 활동한 지 1년쯤 지나자 나 역시 거기에 익숙해졌다.
회의에 늦을 수도 있고, 빠질 수도 있지. 오늘까지 마무리하기로한 일을 못할 수도 있지. 모든 것에 기력을 쏟지 않아도 된다는걸 깨달았다. "저 최근에 에너지가 별로 없어서 약속한 일을 못했어요. 다음 주까지 공유해도 될까요?"라는 말을 편하게 하게됐다. 그즈음 BIYN에 새로 합류한 동료가 말했다. "여기는 누워있는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 곳 같아요." 참신하고 정확한 표현이었다. 개인의 사정이나 성향 때문에 열심히 하지 않거나 못하는사람들을 싫어하거나, 다그치거나, 공동체 바깥으로 밀어내려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힘껏 일할 수 없거나 일하고 싶지 않을 때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다. 그러면 누워 있는 사람이 되는 것도, 누워 있는 사람의 동료가 되는 것도 다 괜찮다고 느껴진다. - P-1

일하는 사이에서 피드백이 적게 오가는 이유 중 하나는 피드백을 하는 게 누구에게나 조심스럽기 때문일 것이다. 이건 너무
‘꼰대‘ 같지 않을까? 내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 이런 생각에 망설이기 일쑤다. 내가 생각하는 피드백이란, 잘해 내지 못한 일을 지적하는 게 아니라 타인의 일에 적극적으로 반응해 주는 것이다. 내가 당신의 일하는 모습을 보고 있다고, 잘하는 걸알고 있으며 더 잘할 수 있게 돕고 싶다고, 어떻게 더 낫게 할 수있을지 함께 고민하고 있다는 리액션.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외롭지 않게 만드는 커뮤니케이션 방식이다. - P-1

피드백을 ‘잘‘ 받고 싶다면 요청의 기술이 필요하다.
김키미, 「오늘부터 나는 브랜드가 되기로 했다.
(웨일북, 2021) - P-1

내가 하는 일에 대한 ‘평가‘가 수반된다는 점이 피드백을 더더욱 꺼리게 만든다. 피드백을 스스로 요청하는 행위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대신 전략도 있어야 한다. 이 일에 대한 전체적이고 두루뭉술한 피드백을 부탁하기보다, 어떤 부분에 대한 피드백을 어느 정도 선으로 받고 싶은지 미리 밝히는 편이 좋다. 피드백하는 사람도 거기에 맞춰 피드백을 할 수 있어서 덜 부담스럽고, 피드백을 받는 사람 또한 좀 더 집중적인 개선이 필요한 부분에 대한 의견을 받을 수 있어서 효율적이다. 내가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던질 수 있는 무책임한 피드백도, 피드백을 요청하고도 방어적인 태도를 갖게 되는 결과도 방지할 수 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유명한 어느 ‘쌀‘처럼 ‘저에 대한객관적인 비평 또는 피드백? 그런 거 원하지 않습니다. 무조건박수갈채, 일방적이고 편향적인 칭찬 부탁드립니다‘라는 것이내 심정이다. 객관적인 피드백보다 무조건적인 칭찬을 받을 기회가 더 귀하기 때문이다. - P-1


다른 사람을 꼼꼼하게 칭찬하면서, 그들의 훌륭함에 감탄하고 너그러움에 감사하면서, 그 모든 것으로부터 배우면서 나도더 나은 사람이 되어 간다. - P-1

"저분 좀 봐, 자기만의 무대에서 공연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아?"
오사카의 한 카페에서 친구가 이렇게 속삭였다. 카페 주방은 손님들 좌석 쪽으로 활짝 개방되어 직원들이 커피 내리는 모습을아주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구조였다. 친구가 가리킨 곳에서는 한중년 남성이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사이폰에 물을 채우고, 커피가 끓기를 기다리고, 다 끓인 커피를 컵에 옮겨 따르고, 받침을받쳐 손님들에게 내는 그의 행동에는 군더더기라고는 없었다.
거기에는 아주 오랫동안 그 일을 해 온 사람 특유의 부드러운 흐름이 있었다.
얼마 전에는 동네 떡볶이 가게에서 점심을 먹다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 넓지 않은 주방에서 떡볶이집 사장님이 자신만의 리듬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주문이 들어오면 조리를 시작하고, 동료들에게 필요한 작업을 부탁하고, 길 쪽으로 열린 창을통해 아는 얼굴들에게 반가운 인사를 건네고, 완성된 음식을 담아 손님들에게 경쾌하게 날랐다. 그가 고유한 방식으로 일하고움직이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누군가 하는 일이 그의 몸에 새겨지고, 일과 사람이 하나가 되어 특정한 리듬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는 것이 신비로웠다.
뮤지션 이랑은 목수와 성우, 서예가, 직조사, 뇌공학자 등여러 가지 일을 하는 사람들의 동작을 안무로 만들어 「신의 놀이라는 뮤직비디오에 담았다. 나의 일은 어떤 동작으로 요약할수 있을지, 어떤 리듬을 그려 낼 수 있을지 상상해 본다. 아마 노트북을 멍하게 바라보고, 무언가 생각난 듯 키보드를 마구 두드리고, 또다시 멍해지고, 머리카락을 만지기를 반복하지 않을까싶긴 하지만……. - P-1

일을 하다 보면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기획법이 생긴다. 기획의사전적 의미는 ‘일을 꾀하여 계획한다‘라는 것인데, 콘텐츠를 만들든 사업을 구상하든 가닿고 싶은 목표가 있는 한 기획을 거치지 않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치매 노인들이 일하는 식당을 만드는 프로젝트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을 기획한 오구니 시로는 자신의 기획법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기획을 보는 사람들이 일단 궁금해지게 만들고, 실체를 파악하게 만든 다음, 각자 나름의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돕는다. 그가 주로 해 온 캠페인 기획에 적합한 방식이다. - P-1

"이 기사를 어떻게 쓸 것인지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많이 돌려 봐야 해." 신입 기자 시절 한 선배가 내게 이런 조언을 했다.
주제만 덜렁 있을 뿐 내가 이 기사를 쓸 수 있을지 없을지도 잘 모르겠는데 시뮬레이션을 해 보라니... 그땐 정말 울고 싶었다. 어떤 일을 두고 시뮬레이션이 가능해진다는 건 다양한 일을 해 본데이터가 쌓여 있다는 의미다. 나 또한 경력이 쌓이고 써 본 기사의 종류와 개수가 늘어나자 자연스럽게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할 수 있게 됐다. 그건 기사를 쓸 때뿐 아니라 다른 일을 할 때도 도움이 되는 기술이었다.
일을 앞두고 시뮬레이션을 해 본다는 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여러 방면으로 상상해 보는 것, 잘 안 될 경우의 대안을 미리고안해 보는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추가한다면, 이 일의 내용과 필요성을 타인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해 보는 것도 포함된다. 설명할 수 있다는 건 일의 의도와 방향을 내가 장악하고 있다는 뜻이고, 결국 일하면서 중심과 기준이 되는 건 전체적인 의도와 방향이기에 세부 사항을 시뮬레이션할 때에도 혼란을 덜 겪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어떤 일을 하기 전에 문서창 또는 업무용수첩에 기획 의도를 써 본다.  - P-1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서 글을 쓸 때의 기본은 내가 생각하는 바, 아는 바, 주장하는 바를 되도록 누락 없이 전달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이 글의 목적이 무엇인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무엇인지 명료하게 정리해야 하고, 목적 달성과 메시지 전달을위해 글을 어떻게 구성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물론 글을 통해 최대한 내 의도를 전달하고자 해도, 타인에게 가닿는 순간 해상도가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결과일 테다.
그럼에도 글을 더 명료하게 쓰기 위해 노력하는 건 단순히 ‘일잘러‘로서의 기술을 연마하는 게 아니다. 타인과 최선을 다해 소통하며 좋은 협업자로서의 태도를 만들어 나가는 일에 가깝다.
마지막으로, 브로콜리너마저의 「커뮤니케이션의 이해」라는 곡을 추천한다. ‘나만 이렇게 커뮤니케이션이 어렵나?‘ 싶을때 들으면 조금은 위로가 된다. - P-1

때로 어쩔 수 없어 하는 일조차우리는 의미를 부여하려 애쓴다.
제현주, 내리막 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어크로스, 2014) - P-1

정영선이 일하는 태도를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세상에좋은 일을 하고픈 마음‘이라는 모호한 말로는 부족하다. 내 생각에그의 태도는 ‘나의 일이 타인 그리고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고있는지 고민하고 그 관계에 책임을 지려는 노력‘에 가까운 것 같다. 어떤 일도 사람도 완전히 홀로 떨어져 존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문득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어떤 위치에서 무슨 일을하며 세상과 관계 맺는 중인지 고찰해 본다. 내가 맺은 관계에 책임을 지는 행위로서의 일. 이것이 앞으로 어떤 일을 하든 내 기준이 될 것 같다. - P-1

크게 봤을 때 제게 일은
‘세상과 관계 맺는 방법‘입니다.
조소담, 「일잘잘: 일 잘하고 잘 사는 삶의 기술」(김명남 외 8인 지음, 창비, 2023)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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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듬히 기대어 살아가기
비스듬히 기대는 누군가에게 기댈 곳이 되어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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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젓한 사람들 - 다정함을 넘어 책임지는 존재로
김지수 지음 / 양양하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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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듬히 낱말이 와닿았다.
정현종 시인의 <비스듬히> 중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바치고 있는 이여.

이 책에서 닮아가고 싶은 태도를 가진 여러 명의 어른을 만났다.

핵심은 지향입니다. 내 삶이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알아차리는 게 중요해요. 삶은 여행이라기보다는 순례에 가깝습니다. 특정 장소로 간다기보다 지향하는 바를 알고 계속나아가는 거죠. 중세 격언 중에 ‘여행자는 요구하고 순례자는 감사한다‘라는 말이 있어요. 여행자는 비용을 지불하기때문에 서비스가 만족스럽지 않으면 불평하죠. 그러나 순례자는 길에서 방해물을 만나도 가고자 하는 지향이 분명하기에 걸림돌조차 안내자로 인식합니다. - P-1

잘못된 결정을 할까 봐 두려웠던 건, 당신 잘못이 아니다. 요는 인생의 중요한 결정들은 ‘답이 없는 문제‘라는 것이다. 답이 없는 문제들은 측정을 거부하고 다스려지지 않는다. 결흔, 육아, 이직 등에 관해 ‘선택의 효용‘을 파고들었던 저명한 수학자, 과학자, 행동경제학자들도 똑같은 딜레마에 처했다. 심지어 다윈마저도러셀 로버츠는 중요한 인생 문제는 계량화하는 것이 불가하니 ‘최고의 결정‘에 압도되지 말고, 그저 마음이 인도하는 대로 ‘뛰어들라‘고 조언한다. ‘옳은 결정은 없다‘는 걸 인정한후 겸허하게 직관, 윤리관, 좋은 습관을 따라가 보라고.
‘인생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경험하고 음미해야 할미스터리‘라는, 우리에게 ‘완벽한 내일‘은 없고 오직 ‘결심이필요한 순간들‘만 있을 뿐
ㅡ경제학자 러셀 로버츠 - P-1

"결혼해야 할지 독신으로 살아야 할지,
자녀를 가져야 할지 무자녀로 살지.
이 일을 계속할지 그만둘지는근본적으로 ‘답이 없는 문제입니다.
개인의 삶에는 중요한 변곡점이 될 테지만통제의 범위를 넘어선 야생의 문제들이지요.
‘완벽한 결정‘은 없습니다.
‘결심이 필요한 순간들이 있을 뿐이죠.
인생은 어차피 지도 없이 하는 여행이기에 완벽함의 반대는 ‘엉성함‘이 아니라
‘그럭저럭 괜찮음입니다." - P-1

보통 사람이 보기에 체크리스트나 동전 던지기는 합리와 비합리의 극단 같지만 둘 다 비슷한 효용이 있습니다. 그런 행위가 감정을 자극해서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게 뭔지 알려주죠. 동전이 나온 걸 보고 실망한다거나, 장점 몇 개를 단점목록으로 이동하는 자신을 보며, 진짜 마음을 목격하는 겁니다.
다윈도 그랬어요. 끝도 없이 결혼 장단점 목록을 작성하다.
마침내 데이터를 무시하고 자신의 직감을 따르기로 했지요. - P-1

일단 미지의 세계에 뛰어들면 상상하지도 못했던 것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세상이 아니라 새로운 경험으로 달라진 자신이다. - P-1

한 명의 인간으로서, 경제학자로서 했던 좋은 선택은 어떤 것들이었나요?
당장은 실수처럼 보이지만 후회하지 않으려고 내렸던 결정들… 그것들이 지금 제 모습을 만들었습니다. 그런 결정들은 돌아보면 어떤 필연성을 가지고 있지요. 테드 창의 멋진단편 소설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읽어보길 권합니다.
그는 ‘인생은 당신이 쓰면서 동시에 읽고 있는 한 권의책과 같다‘고 했다. - P-1

경제학자 러셀 로버츠는 괜찮은 선택을 위해서는 ‘모른다‘는 투항의 자세가 도움이 된다고 했습니다. 선택의효용에 평생을 매달려온 경제학자가 우리에게 ‘완벽한 결정‘은 없고, 오직 ‘결심이 필요한 순간들‘만 있을 뿐이니,
‘답 없는 인생 문제‘에 꼭 맞는 정답을 찾으려 힘쓰지 말고그저 훌쩍 ‘뛰어들라‘고 했습니다. 인생은 해결해야 할 문제 덩어리가 아니라 맛보고 음미해야 할 아름다운 미스터리라고 주장하면서요. - P-1

효용의 최전선에 있는 경제학자가 ‘도무지 모르겠다‘
고 생각될 때는 ‘뛰어드는 것‘이 가장 경제적이라고 결론내린 근거는 단순합니다. 잘못은 하루 빨리 수정하면 되고 설사 그리 되지 않더라도 생의 불가사의를 통과하고수용하는 것만으로도 성숙의 새 장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코넬 대학교 교수를 지낸 김현철이 《경제학이필요한 순간》이라는 책에서 무수한 사회 실험과 데이터로증명하고 있는 것도 ‘인생 성취의 8할은 운‘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넓게 보면 내가 태어난 시대의 운, 국가의 운, 부모의 운, 건강과 성품의 운, 리더의 운, 친구의 운, 업계의운, 그날의 행운과 불운이 절묘하게 스파크를 일으켜 지금의 내가 있습니다. 그렇게 던져짐과 뛰어듦의 균형을 잡아가며 사는 사이, 사람은 제 잘난 맛에 사는 줄 알지만 대부•분 남 잘난 맛에 산다는 의젓한 깨우침도 자리 잡겠지요. - P-1

때가 되면 ‘필요한 사람에게 메시지가 닿을 것‘이라고 위로해도, 다급하게 SNS 스크롤을 내리다 보면 ‘너는 재능이 부족하고, 이미 감이 떨어졌고, 쓸모를 다했으니 버림받을 것‘이라는 환청이 들려옵니다.
(빙그레 웃으며)그렇지 않은 작가를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고군분투하며 만들어 낸 책이나 영상은 다 자기가 낳은 아이니까요. 환영받지 않으면 내가 버림받은 느낌이 드는 건당연합니다.
그러나 진실은 버림받을 거라는 착각도, 대단한 피드백이올 거라는 상상도 옳지 않아요. 이미 세상에 내보내면 내것이 아닙니다. 알아서 자라고 퍼지고 성숙해져 돌아오길 기다려야죠. 결정권이 나한테 없을 때 최선은, 신경을 끄고 할 일을 하는 겁니다. - P-1

나는 장기하를 통해서 ‘즐거움‘과 ‘잘함‘과 ‘계속함‘의 평형은 ‘적절한 포기‘에서 올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포기는자기만의 두각을 나타내기 위한 ‘선택‘이었던 것. 그는 못하는게 있으면 짧게 절망한 후 자기를 잘 설득해서‘ 생의 방향을 틀었다고 했다.
<부럽지가 않아>라는 노래를 부르는 그를 보면, 경쟁과비교의 중력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듯했다. 포기할 때는약간 힘을 빼는 자세가 도움이 된다고 했다. - P-1

성격이 평상시에 여러분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준다면 품성은 힘든 시기에 여러분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줍니다. 품성은 낮은 본능을 극복하는 학습된 기량의 묶음입니다.
얼마나 높이 오르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멀리 가느냐가 중요하다. 지속가능성의 핵심은 품성이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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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를 철학하다 - 21세기 불교를 위한 하나의 초상
이진경 지음 / 휴(休)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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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의 가르침도, 사랑의 가르침도 이런 질문을 피할 수는 없을 것같다. 자비를 근본적인 차원에서 사유해야 하는 것은 오히려 이런 이유에서다. 자비란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기쁨을 주거나당장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만은 아니며, 많은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 사람들에게 공감하고 동조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진정한 자비란 악행을 행하는 그들이 부처로서의 잠재성을 향해 거슬러 올라가게하는 것이다.
꽤나 긴 시간 동안 공동체를 하면서 체험한 것인데, 공동체란 선물을 통해 인간관계를 형성하지만, 공동체 안에서조차 선물은 잘못하면사람들에게 의존성을 키워 무능하게 만든다. 여러 가지 선물이 있지만, 최고의 선물은 선물하는 마음, 선물하는 능력을 선물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선물하는 것 못지않게 선물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심지어 선물하지 않거나 선물을 그저 받기만 하는 것으로는 불편한일, 고통스런 일이 발생할 수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비행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눈앞의 누군가를 기쁘게 해주는 것이나, 그의 고통을 나서서 덜어주는 것을 무조건 자비라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로 하여금 부처라는 말에 근접한 사고와 행동을 하도록촉발하는 것이 바로 자비행의 요체이다. 악행을 한다고 판단된다면그가 지금 하고 있는 악행들, 남에게 고통을 주는 일들로 인해 불편함이나 고통을 느끼도록 해야 한다. - P-1

가까이 지내는 초등학교 교사 한 분이 있다. 교육이나 삶에 대한 원칙이 확고하고 특이한 분인데 타협할 줄 몰라서 고생을 많이 한다. 며칠 전 이분에게 인상적인 얘기를 들었다. 거의 6학년 학생들을 맡는데, 학급에 대개 힘없는 애들을 못살게 구는 ‘나쁜 놈‘들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때문에 사고가 발생하거나 분란이 일어나는 일이 흔하다고 한다. 그런데 옆에서는 그 ‘나쁜 놈‘도 본성은 착하니 잘 달래야한다고 하는데, 자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단다. 오랜 경험에서 알게 된 것인데, 그런 친구는 습관 때문이든 자잘한 계산 때문이든 나쁜삶의 습성을 계속하게 마련이기 때문에 좋은 말로 달래봐도 잘 고쳐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은 그런 놈들을 설득하고 달래는일은 하지 않는단다. 대신 그놈 때문에 고통받는 아이들을 만나 말한단다. 너희들이 그냥 당하고 살면 섀도 너희도 평생 이런 식으로 살거라고. 너희들이 모여서 그런 놈에게 대항하고 싸워야 너희들이 겪는 고통도 줄어들고, 저놈도 저런 식의 삶을 고치게 될 거라고. 그게너희들을 위한 길이고, 저놈을 위한 길이라고.
옆의 교사들이 들으면 경악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분의 언행이 - P-1

미움의 감정에 따른 것이 아니라면 악행을 반복하는 학생에 대해 적절한 자비의 행이 될 거라고 믿는다. 자비란 어떤 대상에게 듣기 좋은말을 하거나 당장의 기쁨을 주는 언행을 하는 게 아니다. 그가 좋은삶을 살고 훌륭한 능력을 갖도록, 때로는 칭찬하지만 때로는 경책하며, 때로는 설득하지만 때로는 이 짓을 계속해선 안 되겠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도록 적절한 고통을 주는 것이 자비행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의 처지를 생각하여 가혹해 보이는 언행을 하는 그런 자비행도 있을 것이다. 근본적으로 말한다면, 자비행이란 누군가가 자신의 불성을 보고 부처가 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촉발을 제공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사랑하는 이의 죽음 같은 큰 고통 속에서 수행을 시작하게되고, 견디기 힘든 고통 속에서 자유로운 삶을 위한 각성의 계기를 얻는다. 이를 안다면 안타깝지만 그런 고통을 제공하는 것이 진정 최대의 자비를 행하는 것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다시 생겨나는 의문이 있다. 악행을 하거나 부적절한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 고통을 주거나 마찰을 일으켜 그 관성적인 힘(입력)을 정지시키는 것과 어떤 행동에 대한 분노나 미움, 앙심으로 그에 반발하여 마찰을 일으키고 고통을 주려 하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악인이나 권력자들의 부당한 행위에 대해 대항할 때조차 자비심이 아니라미움이나 분노의 감정에 의해 행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그건 사실이다. 그 감정적 행위를 ‘자비‘라고 한다면, 그건 자신을 정당화하기위한 위선적 개념에 불과하다. 감정적 행위가 대개 분노나 미움 같은
‘반동적 Reactive‘ 감정에 의해 이루어진다면, 부처의 마음으로 행하는 자 - P-1

비행은 저 중생이 부처의 삶을 등지는 것을 저지하고 제 방향을 찾아가게 하려는 ‘능동적 판단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마찰을 아기하든, 침묵으로 거리를 두든. 최소한 분노나 미음의 감정 없이 마음이 일어났다면 감정에서 벗어나서 판단했을 때에도 그렇게 했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다면, 그것을 감정적 행위와 구별되는 자비행이라 할수 있다.
앞에서 말한 교사에게 최근에 들은 얘기를 하나 더 해야겠다. 자기반에 부모가 없는 학생이 한 명 있는데, 조그만 일에도 툭하면 ‘욱‘하는 친구라고 한다. 어느 날 그 아이가 사고를 쳤다. 교실 옆 복도에서옆 반 여자아이가 자기를 기분 나쁘게 쳐다봤다고 그 여자아이의 머리채를 쥐고 난리를 쳤다는 것이다. 불러다 왜 그랬냐고 물었더니, 그냥 눈빛이 기분 나빴다고 했단다. 어이가 없었는데, 어찌해야 하나 한동안 고민하다 그 아이와 함께 복도에서 계속 울고 있는 그 여자아이앞으로 갔다고 한다. 그리곤 다짜고짜 여자아이 앞에서 그 아이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아이의 머리채를 잡고 교실로 끌고 가면서 울고 있는 여자아이에게 너도 따라오라고 했단다. 쉬는 시간이라 복도에 나와 있던 아이들은 모두 눈이 휘둥그레 쳐다보고..
교실로 오니 놀란 여자아이가 오히려 기겁을 해서 자기 눈빛이 나빴던 것 같다고, 자기 잘못이라고 했다고 한다. 머리채를 잡힌 아이는이글거리는 눈을 한 채 머리채를 잡은 손을 뿌리치려 할퀴고 난리를쳤지만 끝내 머리채를 놓지 않았다고 한다.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울려 여자아이는 가고, 그때 비로소 머리채를 잡았던 손을 풀어주었 - P-1

다고 한다. 짧지 않은 시간의 침묵이 흐른 뒤, 아이에게 말했단다.
내가 싸워줄 부모님이 계셨더라면 선생님 손이 이렇게 아프지는 않았을 거다. "그랬더니 그 아이는 눈물을 펑펑 흘리더란다.
무슨 말이냐고 내가 물었더니, 이런 일이 있을 경우 대개는 아이에게 조목조목 잘못을 따져 야단을 치고 여자아이에게 사과하게 한 후돌려보낸단다. 그런데 그랬다면 그날 여자아이는 아마 선생님 앞이니 ‘괜찮다‘ 하고 돌아서겠지만 그 분한 감정이 가시지 않아 부모에게호소했을 게 틀림없단다. 그렇게 되면 여자아이의 부모는 그날 저녁아이의 집으로 쫓아가 그의 부모와 싸우든가, 아니면 다음날 아침 학교로 찾아와 아이의 멱살을 잡았을 거라는 것이다. 그 아이에게 부모가 있었다면 그렇게 해도 좋았을지 모르지만, 부모 없는 3형제 중 하나로, 자신의 아이 둘까지 다섯 명을 이혼하고 혼자서 키우고 있는일용직 노동자인 큰아버지 집에 얹혀사는 처지인지라, 극히 난감한상황이 되리라는 느낌이 들었단다. 그래서 여자아이의 분한 마음을그 자리에서, 그가 당한 것 이상으로 풀어주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생각에, 폭력교사의 비난을 살 게 분명함에도 그런 ‘미친 짓‘을 했다는 것이다.
그 아이는 선생님의 이 ‘미친 행동‘을 이해했을까? 모를 일이다. 이런 행동을 이해하는 일은 오해하는 일보다 훨씬 희소하니까. 혹시 이과격한 행동에서 교사의 자비심이 보이는가? 그렇다면 말해보라. 던진 물음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 제자들에게 있는 힘껏 뺨을 때리기도 하고, 손가락 하나 들어 답하는 걸 따라 하던 동자승의 손가락을 - P-1

‘일체유심조 하면 흔히 예로 드는 원효의 해골물 고사도 그렇다.
마음먹기에 따라 해골물도 맛있을 수 있겠지만, 해골을 본 이상 마음을 고쳐먹으려고 발버둥을 쳐도 안 되는 게 문제다. 내 마음조차 내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 그것이 어쩌면 삶을 힘들게 만드는 가장 큰이유일 것이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을 애써 얻으려 하기보다는내 마음이나 내 마음대로 하자는 게 불교의 가르침이다. 하지만 그게마음대로 되는 분들은 부처의 경지에 올라 ‘대자유‘를 얻은 분들일 텐데. 그런 분들은 평생을 선방에 앉아있던 분 가운데서도 극히 희소하지 않을까. 그걸 보면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하는 것처럼 어려운 게없다는 생각이 든다.
지나간 것은 지나가 버렸으니 굳이 붙잡으려 하지 않으면 없는 것이고, 지나가는 것은 지나가는 것이라 애써 붙잡지 않으면 지나가 없는 것이라며 마음의 ‘실상‘을 보라고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그렇지않다. 오지 않은 것을 구하려 하고, 지나가는 것을 붙잡으려 애쓰며.
지나간 것을 잊지 못해 고생한다. 차우나 구양봉은 지나간 것을 잊지못해 그것을 붙잡고 산다. 아니, 그것에 붙잡혀 산다. 모용언은 오지않은 이를 미워하면서도 붙잡고 싶어 하며, 혹시 오지 않을까 기대한다. 이게 중생인 우리의 마음이다. 하여 그 마음이 만든 방황이 있고,
그렇게 고통스럽게 방황하는 세상이 있고, 그런 세상 속에서 매일매일 결정하고 행동하는 우리의 삶이 있다. 어쩌면 실상을 깨우치지 못한 우리의 실제 삶은 차라리 이 방황하는 마음이 만든 세상 속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사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 - P-1

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분들이 왜 ‘일체유심조‘를 말했던 것일까? 그렇게 말할 때의 ‘마음‘이란 대체 무엇일까?
내 마음조차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부터 다시 되짚어보자.
왜 내 마음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까? 가령 맛있는 음식을 보면 먹고 싶어지는 건 일종의 ‘조건반사다. 여기서 먹고 싶다는 마음은 정확하게 말하면 음식과 나의 감각기관이 만나면서 일어나는 것이다.
굳이 대비하여 말하자면, 절식해야지 굳게 결심하고 있는 내 마음에속한 것이라기보다는 꼬르륵대는 내 배에 속한 것이다. 혹은 배가 고픈게 아닌데도 어느새 손을 끌어당기는 저 음식에 속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지고, 침대에 누우면 자고 싶어지고, 매력적인 여자를 보면 사랑하고 싶어진다. 우리가 마음먹는다고 생각하는 것, 아니 부지중에 어느새 하고 싶어지는 것은 모두 이런 식이다. 음식이 있다고 다 먹고 싶지는 않다고하겠지만 그 마음조차 내 의지보다는 배부른 내 신체에 속한 것이다.
싫어하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미디어가 메시지다"라는 맥클루언의 유명한 명제가 뜻하는 게 바로 이것이다. TV나 자동차, 혹은 돈이나 옷 등의 미디어(매개)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중립적 매체가 아니라, 그 자체가 특정한 것을 생각하고 행동하게 만드는 메시지라는 것이다. 교환을 위해 돈이란 매개물을 만들었다고 하지만, 일단 돈이 나타나면 돈을 벌기 위해 생산하고교환하게 된다. 모든 것을 돈으로 바꾸라는 명령이 바로 돈의 메시지고, 우리는 대개 그것을 따르게 된다. 그건 우리 마음에 속한 것이라 - P-1

기보다는 돈이라는 미디어에 속한 것이고, 돈으로 가치를 재는 세상에 속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마음먹는다‘는 것은 내게 주어진 조건에 따라 내마음 밖에서 오는 것에 반응하는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의미에서 ‘자유의지‘란 없다고 스피노자는 확언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글을 쓴다고 할 때에도, 그것은 그가 읽은 책이나 그가 겪은 어떤사건, 혹은 사람이 무언가 쓰도록 촉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자극을 표현한 글을 읽어주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화장실에 가는 행위조차 신체의 어떤 상태가 요구한 것을 따른 것이다. 신장이나 방광이 앞장서는 그런 촉발이 없다면 소변기 앞에 서려는 마음이 생겼을 리 없다. 소변을 누는 것도 내가 마음먹기 이전에 신체가마음먹은 것이고, 그 신체에 흡수된 수분이 마음먹은 것이다. 내가 내뜻대로 행위한다고, 즉 자유의지에 따라 행위한다고 믿는 것은 그 행위를 하게 만든 원인을 모르고 있음을 뜻할 뿐이다.
이런 점에서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 것이라고 할 때 그 마음은 저렇듯 나로 하여금 무언가를 하게 하는, 내게 다가온 것들에 속한 마음들이다. 그런 점에서 내가 하려는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 것‘이다. 음식에 속한 마음, 침대에 속한 마음, 바퀴에 속한 마음, 방광에 속한 마음 등등. 물론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것들과 내가 만나서 일어나는 게마음이니, 마음이란 그런 만남의 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만남의 장 안에서 일차적인 것은 내 마음 속에 이미 있는 어떤 게 아니라, 바깥에서부터 내 마음 안으로 밀고 들어온 것이다. 나의 마음이 - P-1

란 그런 것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텅 비어 있는 마당 같은 것이다. 그렇기에 나의 마음이란 밖에서 들어온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이게 어디나뿐이랴! 내가 하는 언행에 화를 내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는 내옆에 있는 사람들도 그렇다. 내 집에 사는 개미의 마음 또한 다르지않다. 과자부스러기에 스며들어 있는 인간의 마음이 개미의 촉수를부르고, 개미를 쫓아내려는 인간의 마음이 개미의 행적을 숨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 것‘이다. 내 마음 바깥에서 들어오는 저 마음들의 연쇄. 그것이 나의 마음을 만들고, 개미의 마음을만든 것이다. 그것이 나나 개미를 특정한 양상으로 행동하게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일체유심조‘는 연기법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연기법의 다른 표현이다. 내가 갖고 있는 마음이 일체를 만드는 게 아니라, 내 마음 밖에서 내게 다가온 연기적 조건이. 그 조건 속에 스며들어 있는 마음들이 나의 마음을 만들고 모든 것을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체유심조‘는 내 마음이 모든 걸 결정한다는 식의관념론과 반대되는 방향의 사고라고 해야 할 것이다. - P-1

유전자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움직여지는 우리의 신체, 우리의 마음은 35억 년 생명의 역사가 만들어온 것이다.
우리가 흔히 마음이라고 부르는 나의 마음, 너의 마음은 이런 점에서 보면 모두 35억 년간 생명의 역사라고 불리는 연기적 조건이 기억되고 집적된 것이며, 그런 외부적 조건이 내부화된 것이다. 나에게 작용하는 모든 마음이 응집되어 내부화된 것이다. 들뢰즈 식으로 말하면, 그 외부적 조건이 생명체의 마음속으로 접혀 들어가며 만들어진
‘주름‘들, 그것이 나의 신체요, 나의 마음이다. 만나는 조건마다 만나는 마음들에 따라 모두 다르게 접혀 들어가며 만들어진 주름들, 그것이 ‘소산‘으로서의 마음이다. 나의 마음이나 개미의 마음이고, 내 눈의 마음, 내 유전자의 마음이다. - P-1

무상한 것을 멈추고 고정하여 ‘알려는 것이 아니라, 무상함을 무상함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멈출 수 없는 것을 억지로 멈추려 하는 것이야말로 고통의원인임을 아는 것이다. 무상한 세계의 불가능성을 고정할 수 없고 포착할 수 없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지혜이다. 따라서지혜는 지식과 어쩌면 반대방향에 있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불가능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함은 세계의 실상이란알 수 없다며 포기하고 절망하는 니힐리즘 아닌가? 그렇지 않다. 나체의 말대로 멈출 수 없는 가변적 세계에 실망하여 변함없는 것, 피안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니힐리즘이다. 무상한 세계의 불가능성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알려는 모든 시도를 포기하는 게 아니다. 살려고 하는 한 세상에 대해, 눈앞의 저것이 무언지 알아야 한다. 알기위해, 포착하기 위해 우리는 변화를 감속시키고 멈출 수밖에 없다. 그리고 멈추어선 채 포착된 것에 이름을 부여한다. 무상한 세계의 불가능성을 인정한다 함은 그렇게 포착된 것이 실상과 거리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고, 고정한 순간 이미 실상은 옆으로 빗겨나기 시작했음을 아는 것이다. 그렇기에 내가 포착한 것이 그저 잠정적인 것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고정된 것을 떠나 다시 변화된 것을 향해눈을 돌리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지혜란 내가 포착한 것을 믿고 확장해가는 것이 아니라, 무상한 세계 앞에서 그걸 내려놓을 줄 아는 것이다. 알고 있는 것에서 눈을 돌려 다시 무상의 세계를 보는 것이다. 부처의 가르침도 다르지 않다.
"한 물건도 지고 있지 않을 땐 어떠합니까?"라는 물음에 조주 스님이 내려놓아라! 라고 했던 것, 이어서 선승들이 내려놓아라를 끊임없이 반복하여 가르쳤던 것은 이 때문이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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