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여행의 꿈은 누구에게도 해석되지 않고, 나 자신조차도함부로 규정하지 않는 나를 만나는 일이 아닐까. 그르니에가 꿈꾼 여행은 화려한 풍경을 탐닉하는 것이아니라, 자기 자신을 둘러싼 모든 사회적 외피를 벗어던지는여정이었다. 그는 낯선 곳에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은 채겸허하게, 또 남루하게, 무엇보다 자신만의 비밀을 간직하며사는 삶을 예찬했다. 나는 그르니에의 문장에서 ‘비밀‘이라는단어를 만날 때마다, 가슴 밑바닥부터 천천히 차오르는기쁨을 느낀다. 내게도 낯선 곳에서 발견한 풀 한 포기와나누는 은밀한 공모가, 아직 말로 오염되지 않은 감정이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그르니에는 모든 것을 발설하는 행위를 ‘영혼의낭비‘라고 보았다. 그가 지금의 이 수다스러운 세상을 산다면어땠을까. "우리를 갉아먹는 내적인 고통을 침묵시키려면그저 침묵하면 된다"라고 말했던 그르니에라면, 자신의비밀을 품은 채 더 먼 곳으로 떠났으리라. 아침에 눈을 떠 이 삶이 지루하고 버겁다고 느낄 때, 나는 그르니에의 비밀과 침묵을 생각한다. 내 삶을 천천히둘러보며, 다 말해지지 않은 존재의 여백을 찾는다. 빛이너무 강하면 사물의 윤곽이 뭉개지듯, 모든 것을 발설하고전시하고 나면 삶의 본질이 사라진다. 어쩌면 내게 필요한것은 지중해의 선명한 빛보다 브르타뉴의 안개 혹은 나자신에게조차도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내면의 캄캄한방일지도 모른다. 투명하게 비워둔 마음에 안개가 차오를 때, 나는 그곳에 간직해야 할 것들을 가만히 넣어두고 싶다. 그 방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오롯이 나만의 기쁨과 슬픔이 될 수 있도록. - P-1
나의 하루를 복기해본다. 그 안을 채우는 것은 장소들. 그곳에 놓인 작고 사소한 것들이다. 커다란 무언가를기다리거나 대단히 의미 있는 것들을 찾으려 애쓰며 눈앞의것들을 제대로 응시하지 않는 것은, 내가 머무는 지금 이곳이아니라 허공을 쓰다듬는 것과 같다. 보통 이하의 것들로이루어진 나의 하루, 그것이 모여서 만들어진 나의 인생을돌보는 법은 어쩌면 내가 매일 돌아가는 집, 내 방, 그곳에놓인 침대를 제대로 바라보는 것이 아닐까. - P-1
물론 글쓰기가 완성된 무늬를 소유하는 일이라고생각하진 않는다. 내게 의미 있는 것은 그 무늬를 새기기 위해 ‘나‘라는 존재를 치열하게 들여다보고, 추적하고, 해체하는시간 그 자체다. 최근에 한 글쓰기 강좌에서 ‘AI를 이용하는글쓰기가 바람직한가‘라는 질문을 받았다. 내 대답은 AI에 큰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글쓰기를 오직 결과물로만생각한다면, 빠르고 효율적인 AI는 분명 쓰는 사람에게 위협이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쓰기는 오직 ‘과정‘에있다. 내가 아니라 인공지능이 글을 쓴다면, 다시 말해 쓰는 - P-1
사람이 자신의 글과 나눌 수 있는 시간, 경험이 삭제된다면대체 쓴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니 중요한 것은진실을 꺼내는 방식일 것이다. 마르크스의 말처럼 진실을꺼내는 방식 또한 진실이기 때문이다. - P-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