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역하는 말들 - 황석희 에세이
황석희 지음 / 북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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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에게 오역은 그저 괴롭고 끔찍한 존재에 그치지 않는다. 물론 오역을 실수로 인정하고 유용한 도구로 여길때 얘기지만, 상사의 일상적인 질책 같은 게 없는 번역가게 오역은 자기 결과물을 강제로 돌아보게 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속 쓰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보완해야할 결점들을 지적받은 거라고 생각하면 한결 마음이 편하다. 그것들을 보완하면 보완한 만큼 어제보다 더 나은 번역가가 된다는 뜻이니까. 그리고 내일 마주할 번역 현장에선어제보다 한 발짝이라도 앞선 자리에서 출발할 수 있다는뜻이니까. 번역가에게 오역은 이렇게 애증의 대상이다. 도망칠 수 없는 필연적인 저주인 동시에 결국 나를 키우고 자성하게 하는 존재다.

그 누구에게도 정의되지 말자. 특히나 내게 무가치한 사람이 하는 좋지 않은 말에는 더욱. 그들에게 정의되지도, 한정되지도 말자. 나를 정의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나이며나를 정의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누군가의 의견을 참고해야할 필요가 있다면 나를 가장 잘 알고, 나를 가장 아끼는 사람들의 의견을 반영하기로 하자.

그것은 ‘지식의 저주‘ 혹은 ‘저주받은 지식의 오류 The Curse of Knowledge ‘일 가능성이 크다. 특정 지식이나개념이 나에게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다른 사람들도 이를알고 있을 거라고 가정하는 인지편향. "집에 가요."라는 말이
"나와 함께 내 집으로 가요."로 들린다면 <하데스타운>의 플롯을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거다. 

개인이고 사상이고 사건이고 뭐든 판단하는 ‘대판단의 시대‘이지만 정작 중요한 건 나를 제대로 판단하는 게 아닌가 싶다. 궁극적으로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어떤사람으로 인식되고 싶은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지를 깊이 숙고하고 판단해야 한다는 거다. 우린 나와 관계도없는 타인의 모습은 쉽게 평가하면서 정작 나의 모습이 어떤지 진지하게 들여다볼 생각은 하지 않는다. 내면의 거울을 보지 않고 살다 보니 나의 내면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는전혀 모른다. 오물이 묻었는지, 인상이 구겨지진 않았는지,
괴물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건 아닌지. 자주는 아니더라도의심이 들 때 한번씩은 들여다봐야 한다. 어느 날 진지하게들여다보면 매번 손과 입을 쉽게 놀리는 악플러 따위가 되어 있는 추한 모습에 크게 놀랄지도 모르니까.

나이에 비례해 자연스레 여러 죽음을 목격한 사람으로서, 가족을 잃어 본 사람으로서 좋은 위로의 말을 찾을 수있으면 좋으련만 아직도 어렵다. 아니다. 애초에 좋은 위로의말이라는 게 존재하는지도 의문이다. 격과 식을 갖춘 말이야 있겠지만 온전히 마음을 달래 줄 수 있는 마법 같은 위로의 말 따위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난 이번에도 위로의 말을 찾지 못하고 종일 먹먹하다. 그저 어울리지않게 딸기가 담긴 유리그릇을 한 손에 들고 부엌에 서서 같이 울어 주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개인적인 행복과 타인의 불행을 동시에 마주하는 순간에도, 때로는 죄책감으로 때로는 감사함으로 삶을 이어간다. 삶은 이토록 모순적이고 불가해하다. 감히 번역해 낼 수 없을 만큼.

늘 매정했다. 그런데 매정한 사람이라고 평생 매정한 것도아니다. 어느 순간엔 정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어느 순간엔 다시 찬바람 쌩쌩 부는 얼굴을 하기도 한다. 정이 넘치고 따스한 시대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때때로 개인들이 따스함을 비추는 순간들이 있고 그 순간을 운 좋게 많이 누린 사람은 그 시대를 따스하게 기억하는 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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