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 - 김영민 논어 에세이
김영민 지음 / 사회평론 / 201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 맥락과 문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논어』에 담긴 생각은 죽은 지 오래되었다. 그렇다고해서 이 죽은 생각의 시체가 오늘날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말은 아니다. 사상사의 역설은 어떤 생각이과거에 죽었다는 사실을 냉정히 인정함을 통해 비로소 무엇인가 그 무덤에서 부활한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렇다면 생각이 죽어 묻히는 자리는 어디인가? 생각의 무덤을 우리는 텍스트text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텍스트가 죽어 묻히는 자리는 어디인가? 텍스트의 무덤을 우리는 콘텍스트 context라고 부른다. 콘텍스트란 어떤 텍스트를 그 일부로 포함하되, 그 일부를 넘어서 있는 상대적으로 넓고 깊은 의미의 공간이다. 죽은 생각이 텍스트에서 부활하는 모습을 보려면 콘텍스트를 찾아야 한다. 즉과거에 이미 죽은 생각은 『논어』라는 텍스트에 묻혀 있고,
그 텍스트의 위상을 알려면 『논어』의 언명이 존재했던 과거의 역사적 조건과 담론의 장이라는 보다 넓은 콘텍스트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서 소설가 밀란 쿤데라는 베이컨의그림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왜곡에도 불구하고· · · ·베이컨의 초상베이컨의 그림들은 대상을 닮아 있다.
화는 자아의 한계에 대한 질문이다. 어디까지 왜곡해도 개인은 그 자신을 유지할 수 있는가? 자신이 자신이기를 그치게 되는 경계는 어디인가?" 이러한 맥락에서, 오더블유제이O.W.J.라는 필명의 평론가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은 자아의 경계가 어느 지점인지를 시각적으로 확인하는지표"라고 단언했다.

따라서 배우는 이는, "말에 들어있는 실마리를 잘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 제자들을 위해 공자는 어떻게 가르침을 베풀었나? 공자 교수법의 특징은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느 날 맹의자가 효에 대해 묻자, 공자는 "어기지 말라"(無)고 간단히 대답하고 끝낸다. 나중에 다른제자인 번지가 그게 도대체 무슨 뜻이냐고 물었을 때야비로소 비교적 자세히 부연해준다. 공자는 상대가 분발하지 않으면 열어주지 않고, 하나를 보여주었는데 세 가지를 들어 반응하지 않으면, 다시 반복하지 않는다.

이런 가르침 방식에 대해 물론 제자들은 답답해한다.
공자 역시 제자들이 그런 불만을 가지고 있음을 잘 알고있다. 공자는 말한다. "너희들은 내가 뭔가 숨긴다고 생각하느냐? 나는 너희에게 숨기는 바가 없다. 행동하되 너희와 함께하지 않음이 없다. 이것이 나다."(以我爲隱乎 吾無隱乎爾,吾無行而不與二三子者, 是也.) 이 말이 흥미로운 점은, 자신이 숨기지 않는다는 것을 행동의 차원에 국한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말의 차원에서는, 숨기는 것이 있을수 있음을, 침묵의 차원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한 셈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발언은 암묵적으로 제자들에게, 침묵의의미를 깨달으라고 촉구하는 셈이다. 행동에서는 숨김이없되 말에서는 숨김이 있을 수 있는 이, "이것이 나다."
丘也.

고전의 지혜가 살아있게 된다면, 그것은 고전 자체의 신비한 힘 때문이라기보다는, 텍스트를 공들여 읽고 스스로 생각한 독자 덕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