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이 고인다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애란 작가는 에세이로 먼저 만났지만 그 당시엔 김연수 작가와 친분이 있는 작가인 것이 강한 기억으로 남았다. 그 다음에 소설로 읽은 첫 책은 [이중 하나는 거짓말] 술술 잘 읽히는 책이었다. 그리고 읽은 [달려라 아비]. 이 책으로 작가가 더 궁금해져서 출간된 책을 시간 순서대로 차근차근 읽어가고 있다.
문장이 꼭 시와 같아서 몇 번이고 다시 눈으로 더듬게 된다.
이 책에서 가장 좋았던 작품은 ˝칼자국˝

내가 끊임없이 먹어야 했던 것처럼 어머니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들어내야 했다. 딱히 할 일이 없어도 부엌에서 어머니가 이런저런 것을 재우고, 절이고, 저장하는 모습을 보면, 나는 새끼답게 마구 게으르고 건방져지고 싶었다. 그래서 어머니가 바쁘다는 걸 빤히 알면서도, 방바닥에 자빠져 티브이를 보거나 문지방에 기대 잔소리를 했다. 해가 지면 밥 짓는냄새가 서서히 풍겼다. 도마질 소리는 맥박처럼 집 안을 메웠다. 그것은 새벽녘 어렴풋이 들리는 쌀 씻는 소리처럼 당연하고 아늑한 소리였다. 나는 어머니가 쓰는 칼을 쥐어보곤 했다. 위험한 물건을 쥐고 있단 이유만으로 나는 그것을 통제하고 있다 믿었다. 나무로 된 칼자루는 노란 테이프로 감겨 있었다. 긴 세월, 자루는 몇 번 바뀌었으나 칼날은 그대로였다.
날은 하도 갈려 반짝임을 잃었지만 그것은 닳고 닳아 종내에는 내부로 딱딱해진 빛 같았다. 어머니의 칼에서 사랑이나 희생을 보려 한 건 아니었다. 나는 거기서 그냥 ‘어미‘를 봤다.
그리고 그때 나는 자식이 아니라 새끼가 됐다.

밥장사를 하다 보면 별일이 다 있지만, 어머니가 기억하는 일은 그렇게 사소한 것이었다. 어머니가 가장 인상 깊게 기억하는 손님이라는 것도 별 특징이 없었다. 어느 날 한 사내가 들어와 국수 두 개를 시켰다. 손님이 방을 원해서 어머니는 안방에 상을 봐줬다. 국수와 고추 다대기, 김치 한 종지가 전부였다. 사내는 빈 그릇을 하나 달라고 했다. 어머니는왜 그런가 싶어 사내의 행동을 유심히 살폈다. 사내는 자기맞은편 국수 위에 빈 그릇을 엎어놓았다. 혹여 국수가 식을까봐 그러는 거였다. 곧이어 한 여자가 나타났다. 여자는 방긋웃은 뒤 그릇을 걷고 젓가락을 들었다.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댄 채 조용하고 친밀하게 국수를 먹었다. 어머니는 멍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그런 일상적인 배려랄까. 사소한 따뜻함을 받아보지 못한 ‘여자의 눈‘으로 손님을 대하던 순간이었다. 밥 잘하고 일 잘하고 상말 잘하던 어머니는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살면서 중요한 고요가 머리 위를 지날 때가있는데, 어머니에게는 그때가 그 순간이었을 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