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사랑을 ‘맺거나‘ 사랑을 ‘이루지‘ 않고 사랑에 빠지는‘ 것일까? 그건 사랑이란 두 사람이 채워 넣을 수 있는 가장깊은 관계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집어넣어도 그관계는 채워지지 않는다. 정열, 갈망, 초조, 망설임, 투정, 침착,
냉정, 이기심, 헌신, 질투, 광기, 웃음, 상실, 환희, 눈물, 어둠,
빛, 몸, 마음, 영혼 등 그 어떤 것이든 이 깊은 관계는 삼켜버린다. 모든 게 비워지고 두 사람에게 방향과 세기만 존재하는 힘.
그러니까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원초적인 감정의 움직임

만 남을 때까지 그 관계 속으로 자신이 가졌던 모든 것을 밀어넣는 일은 계속된다. 그런 과정을 되풀이하다가 마침내 마음의숲속 빈터가 열리게 되면 뜨거운 육체의 아름답고 털 없는 동물들이 뛰놀게 된다고 서양의 어느 시인은 노래했다.
일단 온 존재가 완전히 비워지면 사랑에 빠진 사람은 그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사랑은 ‘나‘를 무한히 확장시킨다. 사랑에 빠졌을 때, ‘나‘는 질투로 몸이 달아 자살을 떠올리는 심약한 청년이되기도 하고 어떤 투정이라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너그러운성자가 되기도 하고 청소차가 지나가는 새벽 거리를 비스듬히누워서 바라보는 폐인이 되기도 한다. ‘나‘는 레너드 코헨의 노래처럼 권투선수와 의사와 운전수가 될 수도 있고 안치환의 노래처럼 그대 뺨에 물들고 싶은 저녁 노을이나 그대 위해 내리는더운 여름날의 소나기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랑이 끝나면 이 모든 가능성이 사라진다. 사랑의 종말이 죽음으로 비유되는 까닭은 그 때문이다. 사랑이 끝나고 나면 우리는 원래의 자신으로 되돌아가는데, 그러면서 무한히 확장됐던 ‘나‘는 죽어버린다. 진우의 말처럼 한 번 끝이 난 사랑을다시 되돌릴 수 없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죽음은 비가역적인 과정이다. 사랑의 종말도 그와 마찬가지다. 확장이 끝난 뒤에는 수축이 이어지게 된다. 사랑이 끝나게 되면 우주 전체를 품을 수 있을 만큼 확장됐던 나는 원래의 협소한 나로 수축하게 된다. 실연이란 그 크나큰 나를 잃어버린 상실감이기도 하다.

다락 같던 ‘나‘에게서 벗어나 엉거주춤 관계 속에 집어넣었던온갖 잡동사니들을 챙겨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가는 일은 우연히발견한 초등학교 시절의 일기장을 펼쳐보는 일과 비슷하다. 내가 그렇게 농담을 잘하는 사람이었구나. 슬픔이란 유행가 가사에나 나오는 얘기인 것처럼 늘 맑게 웃었구나, 참 떼도 많이 쓰고 참을성도 없었구나 등등의 회한이 들면서 그런 자신을 아련하게 그리워하게 된다. 처음에는 두 사람이 함께 빠져들었지만,
모든 게 끝나고 나면 각자 혼자 힘으로 빠져나와야 하는 것. 그구지레한 과정을 통해 자신이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뼛속 깊이알게 되는 것. 그게 바로 사랑이다.
여러 여자들과 연애하면서 진우는 사랑이란 프리즘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어쨌든 사랑을 통과하게 되면 자신의 모습은 여러 가지 빛깔로 나누어진다. 그 중의 어떤 빛깔이 두드러지는가는 사랑하는 대상에 따라 달랐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사랑이라는 관계에서 혼자서 빠져나올때마다 뭔가를 빼놓고 나온다는 점이었다. 그리하여 사랑이 되풀이될수록 그 관계 속으로 밀어 넣을 만한 게 많지 않다는 걸알게 된다. 그때쯤이면 누구나 자신이 누구인지 더 이상 헷갈리지 않게 되는데, 그건 이제 불타는 사랑이란 자신보다 더 어린사람들의 몫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나이가 됐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미 소진됐기 때문에 더 이상 사랑에 소진될 수 없을 때, 우리는 사랑 외에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나서게 된다. 그래서 인류는 실연의 상처로 멸망하지 않고 여기까지 그럭저럭 굴러온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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