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은 본래 인간의 삶에 의미를 부여해 준다. 왜냐하면모험을 통해서 이야기가 생겨나고, 이야기는 한낱 본능적인삶을 살지 않는 인간의 삶에 있어 가장 탁월한 의미이기 때문이다.

아름답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시 보고 싶다는 것을 말한다.

나는 2장에서 아름다움의 본질이 다시 보고 싶다는 데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미키에게는 분명 아름다운 친구들이있었을 것이다. 물론 나는 가령 얼굴의 아름다움 같은 것을말하는 게 아니다. 미키에게는 아름다운 것들, 아름다운 말과 행위를 공유한 친척이나 친구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제더 이상 그들을 볼 수 없지만, 그들과 함께했던 인생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추억이 남아 있는 한, 미키는 죽어서라도 그들이 다시 보고 싶을 것이다. 죽어서라도 그들을 다시 보는 게 최대 희망이기에, 미키에게죽음은 더 이상 두려운 일이 아니다.
죽음의 관념이 삶에 불안으로서 작용할 때, 인생의 불안을 달래 주는 것이 오락=위락이다. 파스칼은 그것이 인생의답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인생에서 좋은 사•람들과 나누는 아름다운 사랑과 친교는 다만 위락으로 머물지 않는다. 청춘은 어쩔 수 없이 위락을 필요로 한다고 해도인간의 인생 전체가 위락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초로에 든 미키의 고백이 우리에게 알려 주는 교훈이다. 그리고 아름다운 인생의 비밀 열쇠다.

사람들은 "쓸데는 없다"를 자꾸만 "쓸데가 없다"로 치환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경향이 지배적인 곳에서는 유용성이 유일한 판단기준이 된다. 유용성의 영역은 인간 삶에서다만 일부분일 뿐이다. 타인과 우정과 사랑을 나누는 삶, 아름다운 예술작품을 향유하는 삶, 용감하게 세상을 바꾸는 모험을 하는 삶은 유용성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유용성과아무런 상관도 없는 이러한 삶은 인생에서 너무나도 광범위하고 중요한 것이어서, 사람들이 "쓸데는 없다"를 "쓸데가 없다"로 치환할 때 나는 사람들에게 혹시 세계의 아름답고 중요한 것들을, 혹은 세계 그 자체를 모조리 파괴하고 싶은 죽음충동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인간 삶의 본질적 부분이 펼쳐지는 문화적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것들은 쓸데는 없는 것들이며, 또한 아름다운 것들이다.

 아이들은 공부를 통해 어떤 세계를 확보하게되는 것일까? 특히 그 공부가 도대체 쓸데 있는 것과 관련어 보이지 않을 때 말이다. 이 물음에 대한 한 가지 유력한 달은 아이들은 공부를 통해 문화적 세계를 확보한다는 것이다즉 아이들은 쓸데는 없는 공부를 통해 쓸데는 없는 것들의세계, 즉 문화적 세계를 확보한다. 그리고 문화적 세계를 확보한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 분명 본격적인 경제적 삶만을 사는 것이 아니라 본격적인 문화적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문화적 삶을 산다는 것이 최고의 예술작품을 향유할 수 있다.
는 의미건, 우정과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삶의 동반자들과께 아름다운 일상적 모험의 삶을 산다는 의미건 말이다.

자율성은 오로지 상호성과 함께 출현한다. 개인이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고자 하는 욕구를 내부로부터 느낄 정도로 상호존중이 충분히 강할 때
ㅡ 장 피아제

인생이란 거대한 무의미의 바다 위에 의미의 배를 띄우고 항해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삶은 탄생에서 시작되며 죽음으로 끝난다. 이 절대적 무의미 사이에서 인간의 삶은 모험으로서 펼쳐진다.
간의 삶이 모험일 수 있는 것은 세계가 우연과 필연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연과 필연 가운데서 인간의자유는 기회와 도전을 발견한다. 그리고 삶의 의미를 삶아이의미를 찾을 때, 절대적 무의미의 세계 역시 의미를 찾을 수있다. 삶의 의미를 찾은 사람만이 자신의 탄생과 죽음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삶에 의미가 있다면, 우리는 모험을 함께한 사람을 통해 탄생과 죽음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사람들은 서로를 어떻게 알아볼까? 나는 너를, 그리고 너는 나를 말이다. 아직은 그렇게 친하지는 않지만 친해질 수도 있는 어떤 사람이 있다고 해 보자. 그리고, 그와 대화를 나누다가 최근에 본 영화 이야기가 나왔다고 해보자. 실제로나는 최근에 에릭 라티고 감독의 영화 <미라클 벨리에>를 무척이나 인상 깊고 즐겁게 보았다.
그런데 아직 나와 그렇게 친하지 않은 그 사람이 자기도그 영화를 보았으며, 아주 즐겁게 보았다고 말한다면, 더군다나 세부적으로 인상 깊었던 장면도 일치한다면, 나는 또다시 기쁠 것이다. 그리고 나와 그는 서로를 반갑게 알아볼것이다. 영화를 볼 때도 즐거웠지만, 나를 기쁘게 만든 것이너도 기쁘게 만들었다는 사실의 발견은 다시금 나와 너를 동시에 기쁘게 만들 것이다. 즉 알아봄의 기쁨. 그럴 경우 나와 너는 친구가 될 확률이 높아진다. 취미 내지는 취향이 같을 때 우리는 곧바로 동류의식을 느낀다.

알아봄의 기쁨을 좀 더 알아보자. 나는 "너도" 그 영화 "
보았고 나와 같은 방식으로 보았다는 것을 알고 기쁘다. 하지만 동일한 경험을 한 너 편에서 그 "너도는 바로 나를 가리킨다. 취미 일치의 발견으로 너와 나 사이에 없었던 통로가 생기는데, 그 통로를 통해 나는 나뿐만 아니라 너도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될 뿐 아니라, 너뿐만 아니라 나도 그렇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즉 영화를 즐겁게 본 사람이 그 누구도 아닌 나라는 것을.

친구란 공유하는 사이를 말하기 때문이다

내가 본 것을 친구가 볼 때, 나는 그것을 친구도 보았다는것을 알게 될 뿐 아니라 나 또한 그것을 보았다는 것을 다시금 알게 된다. 왜냐하면 친구 역시 그것을 보았다는 것을 내뿜가 안다면, 친구 역시 거꾸로 내가 그것을 보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친구가 알고 있는 그것은 우정의 공통 통로를통해 내게 전달된다. 다시 말해서, 내가 친구를 보면서 웃으면서 "너도!"라고 말할 때 그 친구도 나를 보면서 같은 표정으로 "너도"라고 말한다.

친구가 있기에 우리는 혼자 즐겼던 것을 삶 속에서 즐길수 있다. "나의 것"은 홀로 즐길 때 생겨나는 게 아니라 친구가 옆에 있을 때 생겨난다. 너가 있어야 나는 비로소 나의 것을 갖는다. 바로 그것이 너의 의미다.
불어에는 "conscience"라는 낱말이 있다. 이 말은 오늘날 "의식"이라는 뜻과 "양심"이라는 뜻을 갖는 낱말이다. 그런데 이 말은 원래 "같이 봄"을 뜻하는 말이었다. 같이 본다는 말과 의식한다는 말은 같은 말이었다. 그렇다면 이 말은또 왜 "양심"을 뜻하는 것일까? 나의 친구가 나와 같이 본 것을 보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할 때, 나와 친구가 같이 본 것을친구가 부정할 때, 나는 그 친구에게 양심이 없다고 말할 것이다. 양심은 공동의 목격자다. 양심의 부정은 같이 본 것의부정을 말한다. 양심이 사라지고 있다는 말은 친구도 우정도사라지고 있다는 말이다. 즉 너의 의미가 사라지고 있다는말이다.
알아도 내가 아는 것 같지 않을 때, 보아도 내가 보는 것같지 않을 때, 살아도 내가 사는 것 같지 않을 때, 우리는 나의 의미가 아니라 너의 의미를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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