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빛과 그림자가 그곳에 있었고
정멜멜 지음 / 책읽는수요일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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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시작된 스튜디오가 어째서 지금은 주로 사진을 찍고 있는지, 부업으로 작은 빈티지 가게는 왜 하고 있는지, 아직 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많지만, 중요한 건 틀어진 계획으로 우리가 지금 여기에 있다는 사실이다. 크고 작은 실수들 뒤엔 늘 예상치 못한 배움이 있었다. 말 못할 고충도 뼈저린 교훈도 있었지만 이렇게 시작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환희도 있었다. 멋이라고는 없는 시작이었지만 뒤를 돌아보면 그래도 틀리지 않은 방향으로 걸어오고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지금도 엉망진창일 때가 많다. 처음 해보는 일이 수두룩하고, 해봤지만 여전히 어려운 일들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 그러니까 이건 그냥 내가, 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다. 번듯한 성공담에서 얻을 수 있는 용기가 있듯 우스운 실패담만이 주는 안도가있다고 믿는 내가 하는 이야기. 어쨌든 우리들은 생선을 굽거나 맥주를 따르는 대신 조리개를 조이거나 렌즈를 닦으며 오늘도 열심히 일하고 있다.

내가 스튜디오와 중고 잡화점을 병행하게 된 건 그 후로도 꽤 시간이 지난 후의 일이다. 사실 매일매일 열렬히 꿈꾸던 일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오래전의 경험들이 언제나 내 주변 어딘가에 서성이고 있었다. 말하자면 언젠가부터 내 안에 작은 종자를 심어두고 있었던 셈이다. 그 후의 모든 체험들은 의도하든 그렇지 않든 이 작은 근원을 싹트고 성장하게 했다. 정말 무얼 원하는지 구체적으로 검증할 수 있었고 인식을 바꿀 수 있는 계기들을 예기치못했던 길목에서 만났다. 그렇게 의지와 상상을 메마르게 두지 않으면 그 씨앗은 어느새 성큼 현실이 되어 다가오기도 하는 것이다.

이 삶에 강렬하고 대단한 의지가 있는 편도 아니고 ‘주어졌으니 그럭저럭 열심히 산다‘ 정도의 마음가짐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었지만 조심성 없게 나를 써온 대가가 생각보다 컸다. 지금의내게 건강은 정말 중요하다. 여러 가지로 필요하다. 무엇보다 하루하루가 무량하지도 않을뿐더러 필연적으로 마침표가 있는 생이니까 그 과정을 좀 더 즐겁게, 가능하면 괴롭지 않게 지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내가 아주 소중하고 고귀한 어떤 존재여서가 아니라주어진 나날들에 알맞게 살아가고 싶어서. 나를 아끼고 아껴가며

언제나 나는 그런 부자연스럽고 비현실적인 순간들에 강하게 매료되었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남기고 싶었다. 일상에서 아주 잠깐씩 찾아오는 장면들. 평범한 하루하루보다는 조금 특별하고 사라지면 정말 있었던가 싶지만 또다시는 만날수 없을 정도로 기적까지는 아닌, 내 기준에서는 찬란한 어떤 찰나들. 막연한 마음으로 조금씩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렸지만 여전히 나처럼 특색 없고 희미한 표현들을 만들어내고 말뿐이어서 언제나 괴로웠다. 아주 운이 좋게 잘 맞는 카메라라는 도구를 찾아내었다. 그리고 때로는 어떤 방식이나 공식들을 무시한다.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가능한 선에서 종종 균형에서 멀어지고 싶다. 때로 가공이필요하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 고르지 않아도 주저 없이 기록하고싶다. 그래서 사진이 내게 꼭 필요해졌음을 잊지 않는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는 마음이 때로는 나를 바로잡아준다고 믿는다.

마가렛 버크화이트의 초상을 한동안 홈페이지 메인에 걸어둔 적이 있다. 한눈에 보아도 1930년대의 여성 복식과는 다른 차림의 마가렛 버크화이트가 커다란 대형 뷰 카메라를 들고 씩씩하게 서 있는 사진으로 나의 모종의 바람이 담겨 있는 사진이었다. 늘많이 찍고 오래 찍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지만 많이 찍는 것보다는오래 찍는 사람에게 점점 더 무게를 싣게 된다. 왜냐면 오래 찍으려면 여러 가지를 섬세하게 조절하는 방법을 배워야 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재능도, 근력도, 기개도, 운도. 그래서 무리하는 습관을 조정하고 조금씩 더 쉬고, 덜 찍으며 가려고 한다. 철저하게 계획해서 오래오래 찍고 싶기 때문에. 반세기 전의 기세 좋은 사진가처럼, 때로는 욕망을 숨기지 않으며, 흑백 사진 속에서 마가렛 버크화이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 인생과 경력은 우연이 아니었다. 철저히 숙고했다." (Mylife and my career was not an accident. It was thoroughly thoughtout.)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에서 아날로그 사진작가숀 오코넬(Sean O‘Connell)로 나오는 숀 펜은 아프가니스탄의 히말라야 산맥에 올라 눈앞에서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눈표범을 보고도 지켜만 본다. 그리고 왜 찍지 않느냐는 월터의 질문에 대답한다.
"어떤 때는 안 찍어. 아름다운 순간을 보면 난 개인적으론카메라로 방해하고 싶지 않아. 그저 그 순간 속에 머물고싶지." (Sometimes I don‘t. If I like a moment, for me, personally, Idon‘t like to have the distraction of the camera. I just want to stayin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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