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밖의 모든 말들
김금희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의 오랜 떠돎은 결국 무용하지 않았다고, 우리가 이동하는 동안 일어났던 수많은 현기증과 감정들이야말로 생의 가장 본질적인 것에 가깝다고 믿으면서.
제발트의 소설을 읽어봐야겠다.

읽은 책인 줄 모르고 다시 읽었다.
읽으면서도 어쩐지 어디서 읽은 듯한 느낌은 들었다. 하지만 그 느낌이 완전한 것은 아니라서 처음 읽은 책처럼 다시 읽었다.
내가 의도적으로 책을 다시 읽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다시 읽는 책은 새롭게 읽혔고, 예전과 다른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나는 티롤로 돌아갑니다, 라고 쓴 쪽지만을 남겼다고 제발트는 적어둔다. 병원에 갇힌 채 맞아야 하는 죽음을거부하고 그가 찾아갔을 티롤, 고향, 그리고 집에 대해 생각하면 그후 아무도 그를 본 사람이 없었다는 언급조차 아무런 불행이 되지 않는다. 그 실종의 귀착지는 다른 어떤 비극적 결말이 아니고 오로지 귀향이었으리라 믿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집을 떠나온 자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으리라고.
물론 그렇게 해서 찾아간 집조차 이제 더이상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죽은 것들만이 수십 년 동안 방치해둔 물건들로만 가득한 제발트 생가의 다락방처럼 있더라도 우리는 가지에 달라붙는 작은 소금 알갱이처럼 견디며 어떤 아름다운전화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오랜 떠돎은 결국 무용하지 않았다고, 우리가 이동하는 동안 일어났던 수많은 현기증과 감정들이야말로 생의 가장 본질적인 것에 가깝다고 믿으면서.
소녀와의 슬픈 사랑을 끝낸 채 여행지를 떠나는 K 박사,
카프카는 "세상에서 가장 끔찍하고 소름 끼치는 두려움이 사랑의 두려움이지만" "그 두려움을 거두어주기 위해서는 어떤 종류의 사랑이라도 무조건 필요한 것"이라고 항변한다.
여기서 사랑이라는 단어는 생이라는 단어로도 훌륭히 대체되어 읽힌다. 이렇듯 생의 불가해를 그 불가해함에 대한 사랑으로 읽어내는 것, 나는 그것 이외에 제발트를 읽는 것에 대한 환희를 더이상 지시할 수가 없다.

ㅡ제발트의 ‘현기증.감정들‘ - P-1

수학자가 될 생각은 없었어
수학이 아름다워서 좋아한 것뿐이야.

피클맨에 따르면 수학자란 결국 전체를 볼 수 없을 것이분명한 대상을 평생 쫓아다니며 진리의 조각을 맞추려 하는비극적 운명의 사람들이다. 피클맨이 그런 삶을 거부한 것은 그런 본질적인 한계에 대해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니까 그렇게 완전무결한 진리를 상정하고 접근할 때 오히려 지금 나를 휘감고 있는 대상의 풍부하고 살아 있는 아름다움, 내가 느끼고 있는 이 생생하고 분명한 감각들이 결국 사라지고 만다는 사실을. 여기서의 수학은 내게사랑에 대한 비유로 읽혔다. - P-1

얼마 전 여섯 살 조카가 유치원 통학 버스에서 아주 기분좋은 얼굴로 내렸다. 선생님과 같은 자리에 앉아 와서 그런가 싶어 물어보니 말간 얼굴로 그렇다고 대답했다. "선생님이랑 뭘 하면서 왔는데?" "얘기하면서 왔지." "무슨 얘기 했는데?" 조카는 신이 나서 선생님이랑 나눈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점심시간에 누구랑 싸우지 말고, 수업시간에는 서 있지 말며, 무슨 시간에는 돌아다니지 말고, 통학 버스를 기다릴 때는 장난치지 말라는 지적과 당부였다. 결국 조카는 버스에서 오는 내내 혼이 난 것에 가까웠는데 뭐가 저렇게 얼굴이 환할 정도로 즐거울까.
그러다 조카는 어쩌면 겉으로 드러난 말 대신 선생님의 선의를 들으며 왔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조카가 그렇게 들을 수 있었던 데는 진심이 잘 전달되도록 표현한 선생님의능력이 있었겠지만 아무리 그렇게 표현해도 듣지 않고 믿지않으면 방법이 없지 않은가. 이렇게 타인의 선의를 듣고 신뢰할 수 있는 힘, 우리에게도 분명 있었을 그 힘을 우리는 언제부터 잃어버리고 만 걸까. - P-1

나는 일상에서도 여행에서도 서툰 사람이다. 일에 쫓기다허둥지둥 떠나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교토에서 죽 머물리라는 결심 외에 포부도 준비도 없는 여행이었다. 도착해서는라면을 먹고 쓰러져 잤다. 저녁에 깨서는 그래도 여행인데싶어서 교토역을 어슬렁거리다가 맥주를 사 들고 돌아왔다.
이 정도라면 집 근처에서도 할 수 있기에 한심하다 싶다가도기분은 좀 다르다고 생각했다. 일상의 루틴한 흐름을 정확히살아가는 교토 사람들 사이를 비틀비틀 지나가는 여행자의걸음걸이. 그렇게 걸으니 마음 어딘가가 풀어졌고 상대적으로 감각은 예민해졌다. 원망과 슬픔 같은 것이 들었다. 떠나온 사람들에게는 다 이유가 있고 나도 다르지 않으니까. - P-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