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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도살장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0
커트 보니것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평점 :
언제부턴가 읽어야 할 책 목록 메모에 있던 책.
책 제목은 조금 잔인해보이기도 했지만 내가 읽었던 책의 작가들이 꽤 감명 깊게 읽은 책이라서 기록해둔 것 같았다. 그러다 최근에 읽은 하임 샤피라가 쓴 철학이 있다면 무너지지 않는다에서 또 이 책을 만났다.
드디어 이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겪은 세계 2차 대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이 책을 읽으며 작가가 20대의 경험을 30년이 지나 글로 표현할 수 밖에 없었던 사정들을 떠올렸다. 내 삶에서 도려내고 싶은 기억들을 다시 꺼낸다는 것. 보통의 사람이라면 지웠을 거다. 어떻게든 현실을 살아내기 위해 아픈 과거는 망각된다. 30년간 지웠다 떠올렸다 아팠다 지웠다 썼다 반복하며 쓰기보다는 지우기를 더 많이 했을 이 글을 쉽게 읽기에는 마음이 무거웠다. 글을 읽는 내내 지우고 싶은기 기억을 다시 꺼낼 수 밖에 없던 쓰는 사람 커트 보니것을 생각한다.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는 쓰는 사람 작가는 용감하다고 생각했는데 커트 보니것 앞에서 용감하다는 말이 가벼워진다.
감히 내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전쟁. 그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들. 무거울 수밖에 없는 그에 얽힌 이야기를 가볍고 우습게 만드는 문체는 아이러니하다. 그 전쟁에서 가장 살아남고 싶어하지 않는 빌리가 살아남은 것 또한.
이 소설에서는 106번이나 같은 표현이 반복된다.
˝뭐 그런 거지.˝
안타까운 죽음. 이유가 없는 죽음. 이 모든 죽음에 화자는 ˝뭐 그런 거지.˝ 라는 냉소적인 말로 상황을 설명한다. 너무도 많은 죽음을 보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 이미 다 경혐한 화자로서 세상에 모든 일에 이유가 없음을 드러내는 말일까.
모든 순간,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순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4차원의 트랄파마도어인들은 우주가 어떻게 끝나는지도 알고 있지만, 그것을 막으려 시도하지 않는다. 그 순간은 그렇게 구조화되었기 때문에 그대로 둔다는 그들의 사고방식은 3차원에 살고 있는 인간에게는 이해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운명론적인 생각이다. 이미 운명은 정해져 있으니 우리가 애쓰고 노력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결론 지어질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작가가 이 작품에서 작가가 의도한 것은 아우렐리우스가 말했듯
일어나는 모든 일은 일어나야만 하는 대로 일어난다. 모든 순간에 감사하고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순간 순간 누리라는 뜻으로 이해했다.
인생은 내가 가진 것과 판단한 선택으로 방향이 정해지기도 하지만, 늘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른다. 그 흐름 속에서 유.영.하듯 살기. 이것이 내가 이 책을 읽고 얻은 생각이다.
도살장에 도착했을 때 빌리는 마차에서 일광욕을 하고 있었다. 다른사람들은 기념품을 찾으러 다니고 있었다. 세월이 흐른 뒤 트랄파마도어인들은 빌리에게 인생의 행복한 순간에 집중하라고, 불행한 순간은무시하라고 예쁜 것만 바라보고 있으라고, 그러면 영원한 시간이 그냥 흐르지 않고 그곳에서 멈출 것이라고 조언했다. 이런 선별이 빌리에게 가능했다면, 그는 수레 뒤에서 햇볕에 흠뻑 젖은 채 꾸벅꾸벅 졸던때를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그럴 수밖에 없었소." 럼포드가 빌리에게 말했다. 드레스덴 파괴 이야기였다. "압니다." 빌리가 말했다. "그게 전쟁이오." "압니다. 나는 불평을 하는 게 아닙니다." "지상은 틀림없이 지옥이었겠지." "그랬습니다." 빌리 필그림이 말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을 가엾게 여기시오." "그러고 있습니다." "틀림없이 착잡할 수밖에 없었겠지. 거기 지상에서는 말이오." "괜찮았습니다." 빌리가 말했다. "다 괜찮습니다. 모두가 자신이 하는 일을 할 수밖에 없는 거지요. 나는 그걸 트랄파마도어에서 배웠습니다."
하느님, 저에게 제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차분한 마음과 제가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와 언제나 그 차이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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