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무튼, 정리 - 엔트로피에 쓸려 가지 않기 위하여 ㅣ 아무튼 시리즈 56
주한나 지음 / 위고 / 2023년 4월
평점 :
아무튼 정리 라니.. 나랑 완전 대척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정리를 잘하게 되었는지 정리에 대해 꿀팁이 있으려나 좀 따라라도 해볼까해서 읽었다. 그러나 반전..
우유부단한 자신과 부단한 싸움을 해오는 지난한 과정을 그려놓았다. 어쩌면 나와 비슷한 결의 사람일지도..
많이 공감하며 읽었다.
20년 동안 그를 지켜보면서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말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의 우유부단하고 느슨한 태도는 정리의 영역에서만 끝나지 않는다. 일 처리할 때, 사람들을 대할 때, 그 외 삶의 모든 순간에서 나는 비슷하게 우유부단하다. 타월은 각 잡혀 개여 있지 않고 내가 설거지를 마친 개수대는 말끔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런데 그런우유부단함이 내게 해가 되지만은 않았다. 그냥 두고보자 했다가 이득을 본 투자도 있었고, 처음에는 떨떠름했던 사람이 좋은 인연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모든 것에서 최대한 빨리 분명하게 결정을 내겠다는 태도가 부족한 만큼 많은 것을 그냥 두고 보면서 그 나름의 리듬대로 흘러가는 모습도 지켜볼 수 있었다. 삶의 어떤 방식은 모든 구석에서 반복되지만 그게 꼭•좋고 나쁨 중 한쪽으로만 귀결되는 것은 아님을 이제 안다.
나의 작은 세상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한번 흐른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나는내가 한 선택의 결과를 책임지고 살아야 한다. 주변인들의 시선 역시 내가 어쩔 수 없다. 나에게 부족한부분은 노력으로 어찌어찌 메꾼다 해도, 노력할 수있는 역량조차 내가 타고난 것에 크게 좌우되는 느낌이다. 그렇게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찬이삶에서,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지금 존재하고 있는공간뿐. 어질러진 것들을 줍고 한곳에 담아 빈 공간을 약간 넓히고, 같은 것들끼리 분류하고 모으고 정리하여 아주 조금이나마 질서를 찾아야 엔트로피에쓸려 가지 않을 수 있다.
세상일이 참 다양하지만 본질은 비슷할 때가 많다. 집안일이든 회사 일이든, 보고서든 원고 작업이든, 할 일을 정의하고 그 일을 효율적으로 처리할 방법을 찾고 시간을 계획하여 작업을 시작하고 깔끔하게 정리해가는 과정을 거친다. 그런데 반드시 해야하는 일은 언제나 제일 하기 싫다. 나는 지금 당장 성취감을 느끼고 싶다. 그리하여 대체할 활동을 찾는다. 코드 재정리 대신에 서랍과 옷장을 뒤집어 정리한다. 디자인 문서를 훑어보며 수정하는 대신에 부엌바닥을 스캔해 구석구석 걸레질을 한다. 그렇게 꼭해야 할 일은 미룬 상태로, 뭔가 정리하고 해냈다는성취감을 얻는다. 오래전에 철학 교수 존 페리가 쓴 에세이 『미루기의 기술(The Art of Procrastination)』을 읽다가structural procrastination(구조적으로 미루기)‘이라는 개념을 인상 깊게 보았다. 해야 할 일을 제쳐두고 그보다 덜 중요한 일을 처리하면서, 즉 구조적으로 미루면서, 해야 할 일들을 돌려 막기로 수습하며살 수 있다는 주장이 너무나 와닿았다. 내 삶은 그가말한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카드 돌려 막기 식으로급한 일 대신에 딴짓을 하지만 그 딴짓도 어차피 언젠가는 해야 하는 일이라 그럭저럭 삶이 굴러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