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가장 소중한 일은 하루하루를 지나친 기대와 미움 없이살아내는 것이다. 사는 일은 누구에게나 만만치 않으니 나 힘든걸 애먼 데 화풀이하지 않고, 최소한의 교양과 상식을 유지하며나이 드는 것이다. 다가오지 않은 것들을 염려하지 않고 흘러가는 것들에 목매지 않으며, 그렇게 사는 데에 글쓰기는 도움이 되는 것 같다.
물론 성냥불은 언제라도 다시 대형 산불로 번져 나를 위협했다. 삶은 성실하게 인간을 시험한다. 네가 버틸 수 있는지, 버틴다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는지, 못 버틴다면 어쩔 것인지. 바이러스가 신체를 위협하듯이. ‘믿는 구석‘이 있는 인간은 버틸 수 있다. 그게 나한테는 글쓰기였다. 진통제처럼, 소염제처럼, 때로는 백신처럼. 이런 내 ‘사적 치료‘의 근거를 실제 과학에서 찾을 수 있다는것은 나중에 알았다. 인간의 뇌에는 감정을 관장하는 부위와 이성을 관장하는 부위가 따로 있다. 전자가 편도체, 후자가 전전두엽이다. 슬픔에 빠지면 편도체가 과로한다. 그런데 그 슬픔을 ‘슬프다‘라고 쓰는 순간 편도체가 쉬고 전전두엽이 일한다. 슬픔의진창에서 발을 빼고 ‘슬프다‘라는 언어를 가만히 응시할 수 있는것이다. 슬픔이 언어가 되면 슬픔은 나를 삼키지 못한다. 그 대신내가 슬픔을 ‘본다‘. 쓰기 전에 슬픔은 나 자신이었지만 쓰고 난후에는 내게서 분리된다. 손으로 공을 굴리듯, 그것은 내가 가지고 놀 수 있는 무엇이 된다. 그래서 썼다. 나를 괴롭혔던 모든 감정에 대하여. 그 감정을 일으킨 사건에 대하여. 그 사건을 차단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하여. 내
마음이 나 자신보다 부풀어 마음에게 질질 끌려갈 때 썼다. 유난히 자주 과로하는 편도체를 가진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내가 그중 하나라면 의식적으로 전전두엽의 노동을 독려하지 않을 수 없다. 언제나 많은 언어가 필요했다. 기분도 안 좋은데 글 쓰면 더머리 아프지 않으냐는 물음은 적어도 내게는 어불성설이었다. 책을 출간한 뒤로는 내가 어디에 무슨 글을 아무리 길게 써도누구도 질문하지 않는다. 작가가 글을 쓰는 건 당연하니까. 다음책을 쓰겠지, 습작을 하겠지, 마감이 있고 돈을 받겠지. 하지만 나는 여전히 ‘마음을 붙잡기 위해 쓴다. 타인을 위해, 세상을 위해, 역사를 위해 쓰지 못한다. 그런 글들은 워낙에 함부로 흥분하지않는 편도체와 고도로 훈련된 전전두엽을 가진 분들의 몫일 테다. 나는 다만 나의 편도체를 덜 날뛰게 함으로써 내 주변의 사람들을 덜 다치게 하고 싶다. 어차피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 상처라면 너무 깊지는 않게, 당신 또한 당신만의 ‘믿는 구석‘으로 금세아물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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