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실력은 다른 이들과 비교하면 어휘도, 문법도, 발음도 한참 부족하지만 나의 피드백은 나 ‘이길보라‘만이 줄 수 있었다. 아시아, 한국에서 자라 작업 경험을 쌓아온 나만이 줄 수 있는 의견과 코멘트. 그것이 유용한지 아닌지는상대방이 결정할 몫이었다. 물론 나의 의견이 토론을 유용하고 효과적인 방향으로 끌고 가는지 역시 고민해야 하지만 말이다.

그러자 교수가 말했다.
"습관을 바꾸는 건 쉽지 않죠. 그런데 꼭 습관을 버리고 뜯어고쳐야만 할까요? 훌륭한 습관이 있다면 그걸 활용하는 방법은 없을까요? 자신이 기존에 해왔던 방식과 방법론에는 분명히 장점이존재해요. 그걸 취해서 관점을 바꿔 다르게 접근하면 또다른 방법론을 만들어낼 수 있어요. 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기술과 방법론을그냥 버리려고 하는 거죠?"
그는 내가 해온 이전 작업을 잘 들여다보라고 했다. 나는 그작업이 이미 끝났다고 생각했다. 이미 책으로 출간되고 영화로 만들어졌으니 그건 ‘성과물‘과 ‘결과물‘이 되어 마침표를 찍은 거라고,
그러니 새로운 프로젝트와 작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교수는 예술적 연구에서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라고했다. 당신이 제일 관심 있는 건 나의 결과물이 아니라 그걸 어떤고민으로부터 시작했고 어떤 시행착오를 거쳐 만들었는지에 대한과정이라고 말이다.
나의 발자취를 되돌아보고 그것을 관통하는 주제가 무엇인지들여다보기. 그는 어쩌면 그 주제가 나에게는 ‘침묵‘일 수 있다고 했다.

영과 관련한 홍보 글을 올려야 하는데 죄책감이 들었다. 세월호 참사 사건으로 희생자 및 생존자 유가족들을 비롯해 모든 국민들이트라우마를 갖고 있었다. 다른 이야기를 꺼내기조차 어려웠다. 그런 와중에 영화 만들었다고, 영화관에서 상영하니 보러 오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 이야기 역시 중요했다.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장애 문제 역시 한국 사회에 꼭 필요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세월호 참사 사건과 관련하여 어떤 일도 하지 못했다는생각은 역시 나를 괴롭게했다. 광화문 부근에서 일이 생길 때면버스가 아닌 지하철을 탔다. 광화문광장에 있는 세월호 추모 부스를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국가가 구하지 못한 혹은 구하지 않은이들을 위해 슬픔과 아픔을 딛고 그곳에서 진상 규명을 위한 농성과 활동을 이어간다는 것이 대단하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 ‘국가‘란무엇인지에 대한 수많은 질문이 떠올랐다. 그곳에 갈 용기조차 쉽게 내지 못하는 나 자신이 무척이나 부끄럽고 죄송했다.
몇 달 후 내게 그곳은 영화 <기억의 전쟁>을 계속해서 제작해야할 이유가 생긴 장소가 되었다. 영화 <기억의 전쟁>은 1960년대 미국의 동맹군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둘러싼 기억을 다룬다. 한국은 이 전쟁을 통해 막대한 경제성장을 이루었지만 그 이면에는 한국 정부가 부인하고 있는 학살 사건들이 존

재한다. 1968년 2월 12일, 베트남 꽝남성 퐁니·퐁넛 마을에서 벌어진 학살에서 가족을 모두 잃고 오빠와 단둘이 살아남았던 응우옌티 탄은 그때의 기억을 증언하고 한국정부의 공식 사과를 요구한다. 영화는 그의 용기 있는 여정을 좇으며 학살을 둘러싼 이들의서로 다른 기억과 태도를 보여준다. 그렇게 전쟁은 50년의 세월을지나, 기억의 전쟁이 된다.

"이 영화는 한국군이 참전한 베트남전쟁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기억‘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이 세계의 모든 인간들은 계속다른 형태의 ‘전쟁‘을 일으키고 그 기억 속에서 살아가죠. 그럼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궁극적으로 ‘기억‘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아직 그 질문이 안 보여요. 그러나 희망은 이 영화 작업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 더 나아질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거죠."

그후 내가 한국에서 습득한 몸의 동작들을 돌아보았다. 늘 주변을 신경쓸 것, 겉모습을 단정히 할 것, 다리를 벌리지 않고 앉을것, 남들과 끊임없이 비교할 것, 화장할 것, 치마를 입을 것, 긴 머리 스타일을 고수할 것, 성별에 맞게 행동할 것. 이른바 정상성의몸 되기. 내 몸이 체화하고 있는 동작들은 결국 시스템을 유지할수 있는 몸이 되기를 요구하는 것이었고 나 혹은 우리의 몸은 그걸

지속하며 이 시스템을 지탱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 묻어야만 했던기억들을 떠올렸다. 그건 여성의 몸에 대한 질문이었고, 재생산권에 대한 논의와 연결되었다. 나는 나와 엄마, 할머니의 임신중지 경험을 소재로 영화를 통해 우리 몸의 기억을 드러내기로 했다.
작업은 쉽지 않았다. 마지막 학기가 시작하기 전에 촬영을 하러 한국에 갔다. 스튜디오에 엄마와 할머니를 불러 인터뷰를 했다.
꼭 하고 싶은 작업이었지만 동시에 정말 하고 싶지 않은 작업이었다. 감독으로서 꼭 해야 하는 일이었지만 딸이자 손녀로서는 하고싶지 않았다. 나는 엄마와 할머니에게 몸에 대한 질문을 던졌고 그들의 임신중지 경험에 대해 물었다. 할머니는 "박정희 정권 때는 실제로 인구 조절을 하기 위해 낙태 수술이 빈번하게 이루어졌고 당시에는 쉬쉬하지 않고 얘기할 수 있는 분위기"였다고 했지만 엄마는 말하고 싶지 않다며 인터뷰를 거부했다. 나는 그럼에도 이야기해야 한다고 엄마를 설득했지만 사실 그러고 싶지 않기도 했다. 나는 나의 임신중지 경험을 공유했다. 할머니는 놀랐고 엄마는 듣고싶어하지 않았다. 나는 질문했다. 우리는 한국 사회에서 태어난 여성들이고 나는 엄마의 몸으로부터, 할머니의 몸으로부터 나왔는데왜 우리는 각자의 임신중지 경험을 공유할 수 없는지. 여태껏 발화되지 않고 몸 어딘가에 묻어둔 기억들은 이상적인 몸을 갖추기를요구하는 국가·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나는 인터뷰 영상

연결되었다. ‘몸‘의 서사를 통해 국적과 문화를 뛰어넘어 연결되는 경험을 했다. <우리의 몸은 나와 엄마, 할머니의 기억에서 출발해 개인의 몸을 통제해온 한국 사회의 역사, 더 나아가 제1세계가 제3세계 국민의 신체를 어떻게 통제해왔는지를 보여주는 영화가 될 것이다. 이 작업은 기존의 관념과 통속을 벗어나야 하기에,
한국과 네덜란드가 공동으로 제작하는 방식으로 프로덕션을 꾸리고 있다. 내후년 정도에는 <우리의 몸이 또다른 ‘우리의 몸‘들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이 영화를 통해 나와 엄마의 몸, 할머니의 몸,
우리의 몸에 대한 여정을 계속 해나가면서 여성의 몸과 재생산권에 대해 질문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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