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오스틴이 수행적 발화에 대해 논한 이후 학문과 예술을 불문한 다양한 분야에서 ‘수행적 전환‘이 일어난 것은 세계를 열어젖히는 수행의 힘이 경이로웠기 때문이다. 헵타포드의 언어만큼은 아닐지라도, 우리 언어의 큰 부분은 수행적발화로 이루어지며, 많은 순간 우리는 수행적으로 살아간다. 우리가 발걸음을 내딛을 때나 눈을 마주칠 때마다 세계는 우리가 발걸음을 내딛고 눈을 마주친 세계로 변한다. 어쩌면 생의 빛나는 순간들은 그런 질감으로 이루어진 것인지 모른다. 특별히 학자들의 이목을 끈 것은 우리의 행위가 우리의정체마저 구성한다는 사실이었다. 일찍이 현대철학은 눈에보이는 세계 이면에 그 어떤 본질적인 세계가 있으리라는 오랜 믿음을 내려놓았고, 이에 따르면 나라는 존재의 본질적인정체성도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 수행적 전환을 맞아, 가령 젠더 이론은 여성이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각종 관습적행위를 반복한 결과로써 만들어지는 것임을 확인했다. 존재가 수행을 통해 구성된다는 사실은 슬픔과 희망을동시에 주었다. 슬픔은 우리의 태생적인 휘청거림에 기인했으며, 희망은 그 휘어짐을 보다 바람직한 변화 쪽으로 기울일 수 있는 사람의 강함에 기인했다. 내가 반복해온 행위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면, 앞으로 발생할 또 다른 행위가 나를 바꿀 것이다. 우리는 수행을 통해 새로운 주체가 되고, 어쩌면 세상을 조금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변혁의 가능성이 뭇 예술가의 마음을 흔들었을 것은 자명하다.
도록 나는 알지 못했다. 웹상으로 인사만 나누다 어느 극장에서 처음 만난 날, 수줍고도 절박하게 질문을 쏟아낸 한 친구를 만나기 전까지는. 차별받은 경험이 없나요. 거리에서 니하오를 듣지 않나요. 그때 기분이 나쁘지 않나요. 그때 어떻게하나요. 그것은 환멸의 동지를 찾기 위한 질문이었으나, 그 순간그의 손을 맞잡기에는 내가 너무 긴 시간 니하오를 대수롭지않게 흘리며 지내왔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나는 잘 지내고 있으며 그다지 무엇도 불편하지 않다 말하는 내 마음이 그날 부끄러움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나는 생각했다. 니하오가 대수롭지 않은 나와 그것을 못 견디는 다른누군가가 있다면 언제고 그 사람이 옳다는 것을. 언젠가는 반드시 그가 옳다는 것을 나도 알게 되리라는 것을. 그렇게 미리 인정하고 나면 그 언젠가는 축복처럼 더 빨리 도래하곤 했다. 숨죽인 대상화의 폭력이 눈에 보이는 날. 기이한 기울기가 기이해지는 날. 그러면 세상은 조금 더 끔찍해지지만 나는 세계의 진실에 그만큼 다가갈 수 있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했던 그 모든 것은 나의 무지 바깥에서 늘 존재해왔으므로, 살아갈수록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 더욱 깊어지는것만큼 다행인 일이 또 있을까. 나는 아픈 쪽이 훨씬 좋았다. 나는 모르는사람이 아니라 아는사람이 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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