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르트는 《방법서설》을 다 쓰기까지 41년의 인생을 살았다. 착상은 더욱 젊을 때 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시간을 들여 확인했다.
현대인에게는 수많은 것을 빨리 알고자 하는 성향이 있다. 하지만 데카르트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빨리 아는 것‘보다는 ‘확실히 하는 것‘, ‘깊이 아는 것‘이다. 곧 알아야 할 것을 알아야 할 때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aestmapisonscoves가령 눈앞에 지팡이가 있어야 걸을 수 있는 노인이 있다.
고 치자. 그 앞에서 50대의 내가 ‘늙음‘에 관해 아는 척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지금은 모르겠다‘와 ‘지금 알고 있다‘는인식을 깊게 해야만 한다.
더욱 위험한 것은 잘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일이다. 나아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에는 의미가 없다고 단정하는 일이다.
현시점에서 모른다고 해서 반드시 그것에 의미가 없지는 않다. 때가 차지 않으면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이 있다.

학업의 전 과정을 끝내자, 나는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왜냐하면나 자신이 수많은 의심과 오류로 고민에 빠졌음을 깨닫게 되었고, 면학에 힘쓰면서도 점점 스스로 무지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 외에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학자가 되리라 마음먹었으나 공부를 다 끝냈을 때 마주한 풍경은 자신이 상상하던 것과 달랐다. 데카르트는 자신이 알려고 한 것, 알고자 한 것은 실은 공부로는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버린 것이다.
여기에서 데카르트가 말하는 것은 다른 이에게 배운 것을 모두 이해했을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실감感이다. 그것은 공부를 지속하여 지식을 모두 얻었는데도 더욱이 꼭스스로 찾아야 하는 것을 찾지 못한 느낌이다.

공부는 물론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아무리 공부해도 우리는 그것에서 다른 사람이 가르쳐준 것 외에는 배울 수가없다. 스스로 찾아야 하는 것은 결국 제 손으로 찾아야 한다. 데카르트는 그 사실을 깨달았다. 진정한 배움이란 공부바깥에서 자신이 만나야 하는 것을 발견하는 일이 아닐까.
데카르트는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일은 누구나 경험하는 것이리라. 가령 지금부터내가 ‘사랑이란 이러한 것이다‘라는 강의를 한다고 치자. 이때 내가 사랑이라는 문제에 대해 동서고금의 명저가 말하는 것을 소개하면 여러분은 그것에 관해 ‘배우는 일‘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진정한 사랑을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자신이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알수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설명으로 ‘사랑‘에 관해 이해했다고 생각한다면 진정한 배움이라 할 수 없다.

데카르트는 우리에게 무언가를 ‘배우는 일‘과 무언가를
‘사는 일은 다르다고 말한다. 나아가 무언가를 ‘배우는 일‘
과 ‘사는 일‘양쪽의 길이 있다고 전한다. 우리는 어느 한쪽이 아니라 양쪽을 동시에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데카르트는 밝혀낸 것이다.

해답을 찾을 수 없을 때 우리는 불안을 느낀다. 곧 아렌트는 답 없이 흔들리는 현실을 배경으로 자신의 철학을 수립하려 한다. 무언가 확고한 견해와 경험을 배경으로 삼는것이 아니라 배가 크게 흔들리는 듯한 불안정한 상태로 계속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of산다는 것은 작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는 것과 닮았다.
바다에는 파도가 있다. 그러므로 언제나 흔들린다. 흔들리는것이 바다에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러나 수영장은 다르다. 수영장에서는 배가 거의 흔들리지 않지만 우리는 그곳에서 살아갈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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