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란 자기의 인식을 확인하는 방법이 아니며 상대방의 인식을 아는 일도 아니다. 두 사람 사이에 명백히 모습을 드러낼 무언가를 받아들이려고 준비하는 것 자로 그 자체다.

학교에서는 교사가 자신이 이해한 대로 가르친다. 그러나80우리 개개의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바로 다른 사람의 생각과 대면함으로써 자기 생각의 깊이를 더하는 일이다.
독서는 여행과 닮았다. 가령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읽는다는 것은 소크라테스가 있는 장소로 향하는 일이기도 하다.
18세기 독일 소설가 노발리스Novalis는 대표작 《파란 꽃》에서 ‘여행이란 자신이 있던 장소로 돌아오는 행위‘라고 말했다. 여행이란 어딘가로 가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출발 지점으로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행위라는 말이다.
그러고 보면 독서는 확실히 자신을 알기 위한 여행이다.
아니, 자신을 만나기 위한 여행이라고 해야 할까. 다만 점점멀리 가버리면 제 힘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된다. 멀리 가면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잘 알아도, 자신이 누구였는지 알 수 없게 되니까. 그러므로 읽기를 통해 자신을 단련하는 것은 좋지만, 항상 ‘지금 여기‘로 돌아와야 한다. ‘지금 여기, 곧 자신의 인생을 파헤쳐야 한다. 이것이 독서라는여행을 떠날 때 주의해야 할 점이다.

소크라테스는 ‘그럴듯한 말‘과 ‘진실의 단면을 비추는 말‘은 다르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도 세상에서 말하는 ‘진짜‘와 ‘진실‘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똑 부러지게 말한다고 해서 다 ‘진실‘은 아니리라. 오히려더듬더듬 이어나가는 말에 ‘진실‘이 담길 때도 있다.
나는 수긍이 가는 말을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언뜻 보면 평범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명확하게 구분 지을 수 없는 경우도 많다. 특히 소크라테스가 생각한 철학적 문제가 그렇다. 선이란 무엇인가, 정의란무엇인가, 혹은 경건이란 무엇인가. 소크라테스는 이 책에서묻고 또 묻는다.

러나 나는 나로 살면서 터득한 말로 이야기하게 된다. 그것은 어쩌면 ‘무작위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 말고 방법은 없다. 그것이 소크라테스가 서 있는 위치였다. 곧 ‘무엇을 말할 것인가보다는 ‘어떻게 말할 것인가‘가 더욱 중요하다. 오히려 ‘어떻게‘가 정해지면 ‘무엇을‘은 자연히 정해진다.
보통 우리는 무엇을 말할지 생각한 다음에 어떻게 말할지생각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다른 길을 간 것이다. ‘어떻게‘는 ‘무엇을‘보다 못하지 않다고 그는 확신했다.
현대에는 학설이나 견해 등을 말할 때 ‘무엇을‘에 중점을둔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대부분 요약할 수 있다. 요약할 수있는 것은 누가 읽어도 같은 내용으로 읽힐 수 있음을 의미한다.
한편 ‘어떻게‘는 요약할 수 없다. 곧 그 사람의 ‘말투는 요약할 수 없다. 게다가 치환 불가능하다. 그렇듯 요약하거나대체할 수 없는 것 중에서 ‘진실‘된 것을 발견해나가는 일이 중요하다. 바로 이것이 소크라테스의 생각이다.
말이 아니라 사건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그곳에 몸을 던져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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