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밀레니엄 (문학동네) 1
스티그 라르손 지음, 임호경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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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엄을 읽고

 

올해 노벨 문학상은 가즈오 이시구로에게 수여됐다. 나를 보내지 마, 녹턴, 우리가 고아였을 때, 파묻힌 거인 등 국내에서도 인기 많은 작가였지만 예상을 빗나간 수상자임에는 전 해와 마찬가지였다. 이시구로는 SF, 판타지 장르 문학을 선보이던 작가로 알고 있었기에 신선하다는 느낌과 더불어 일종의 장르문학에 대한 편견을 자각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유행처럼 쏟아져 나오는 일본범죄스릴러, 범인이 드러나면 흥미가 사라지는 무수한 추리소설, 중세를 배경으로 전투를 벌이는 판타지 등 세속적인 돈벌이문학이라 치부하고 염증을 느낀 나머지 글에 담긴 시대적 이슈와 사회문제, 담론 들을 애써 외면해왔을 뿐이었다. 누구나 선호하는 문장과 장르, 작가가 있지만 그 안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해서 거리감을 둘 필요도 없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아직도 읽지 못한 작가와 작품은 무궁무진하므로 이에 따른 나만의 양서의 기준었는지 모르겠다.)

때마침 이러한 때에 한층 힘을 실어주는 동력이자 뼈대가 된 책이 있었으니 바로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이다. 과연 그러한가 리뷰를 써보며 살펴보기로 한다.

 

1. 소개

 

밀레니엄은 2005년 스웨덴에서 첫 출간되어 전 세계적으로 베스트셀러가 된 소설이다. 10여 년 전 국내에 첫 출간되어 현재까지 많은 인기를 누렸고 영화로도 선보이며 관객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누미 라파스가 리스베트로 분한 파격적인 연기는 그녀가 할리우드의 주연급으로 성장하는 데 큰 공헌을 했고 데이빗 핀처가 연출한 할리우드 작품도 리메이크되어 선보였지만 기대치에 미치지 못해 후속 시리즈는 나오지 못하고 있다(영화보다는 드라마로 제작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본다.)

 <누미라파스가 주연한 스웨덴 버전의 영화 밀레니엄>

(하지만 기대치에 미치지 못해 후속 시리즈는 나오지 못하고 있다.) 국내 도서판권은 10년 사이 아르테에서 웅진출판으로 올해 문학동네로 이어졌다. (영화보다는 드라마로 제작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본다.)

미리 밝히자면 누미 라파스가 출연한 영화를 보고 소설은 여태껏 외면하다가 최근 개정판으로 읽게 되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영화는 영화일 뿐, 텍스트는 영상화될 순 없다는 것을. 플랫폼이 변환되는 과정에서 데이터의 열화가 발생하듯 텍스트가 가진 상상과 형식, 작가의 생각 등은 본연 그대로 옮길 수 없다는 것을. (무엇보다 연출자는 그만의 방식으로 영화화할 테고 또한 여러 스태프와 연기자가 협동해야 하는 작업이니 결과물은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영화와 소설은 달랐다. 그러니 영화를 봤다하더라도 소설은 읽지 않았다면 꼭 무손실 텍스트로 '체험'해보라고 당부하고 싶다.

 

<홀로그램의 영롱한 빛깔이 예사롭지 않다>

<커버를 볏겨내면 리스베트 혹은 희생당한 여인이 등장한다> 

2. 줄거리

 

기본적인 골자는 기자와 해커가 투합하여 실종사건의 전모를 밝히는 사회고발 미스테리이다. 일종의 버디물에 사회추리물을 섞은 뻔한 장르소설로 폄하될 가능성이 농후한 축약이니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탐정과 조수에서 기자와 해커로의 전환

 

시사지 밀레니엄의 공동 창업주이자 소속기자인 미카엘 블롬크비스트 (이하 미카엘)는 성공한 기업가 벤네르스트룀의 비리를 고발하는 기사를 쓰고 명예훼손죄로 징역3개월에 15만 크로나 (현재 환율로 대략 2천여 만 원이다.)의 벌금형을 선고받는다. 일 년 육 개월 전 우연히도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회포를 풀다가 나온 이야기가 기자의 촉을 건드려 발단이 됐지만 벤네르스트룀 측에서 유인한 가짜정보마저 무는 바람에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기자로서의 윤리와 신념을 신성시하는 미카엘은 주변 언론과 매체의 먹잇감으로 전락하고 대중들의 신뢰도 꺾이지만 최후의 보루인 밀레니엄은 지켜야 하므로 소속된 직함을 내려놓는다. 에리카는 연인으로서는 붙잡아두고픈 마음이 크지만 동료로서는 미카엘의 사퇴에 달리 손 쓸 방도가 없다. 이 모든 사태를 지켜보고 미카엘의 뒷조사까지 마친 방에르 그룹의 회장인 헨리크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한다. 37년 전 자신의 조카딸 하리에트 실종사건을 다시 조사해달라는 것이었다. 슬하에 자식을 두지 못한 그는 유달리 큰 형의 손녀인 하리에트를 자식처럼 각별하게 대했고 또한 그룹의 대를 이를 영특한 재원으로 점찍어두었었다. 하지만 37년 전 가족모임이 있던 당일 감쪽같이 사라진 후 온 마을을 수색하고 탐문했지만 시체는커녕 단서 하나 발견하지 못한 채로 종결된 사건이었다. 미카엘은 두툼한 포상금과 벤네르스트룀을 요리할 자료를 주겠다는 옵션을 제시받자 고민 끝에 수락하고 사건지이자 헨리크 친지들이 거주하는 헤데뷔 섬으로 정착한다. 한편 밀톤 시큐리티의 리스베트 살란데르 (이하 리스베트)는 방에르 그룹의 변호사 디르크의 의뢰를 받아 미카엘을 조사하는데 이를 통해 밀레니엄과 미카엘의 존재를 인식하고 흥미를 갖게 된다. 자유로운 무정부주의자이자 천재 해커인 리스베트는 어릴 적부터 사회와 소통하기를 거부한 댓가로 정신이상자로 판명되고 피후견인의 신분으로 살고 있었다. 밀톤의 CEO 드라간은 리스베트의 비사회적인 행동과 외모가 탐탁지 않았지만 임무를 완수하는 능력과 실력을 확인하고 점차 그녀에게 매료된 상태였다. 하지만 리스베트는 일찍이 타인과 벽을 쌓고 살아왔기에 그의 관심과 애정을 거부하고 독립된 자아를 보호하려 한다. 가족과 친지는 요양원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는 어머니와 (언급만 된) 동생 카밀라뿐이고 그나마 후견인 홀게르의 이해와 관심 덕분에 밀톤에 입사하였고 그렇게 사회에 첫발을 내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해와 포용의 홀게르는 뇌출혈로 쓰러지고 더러운 사디스트의 닐스로 배속되어 온갖 모욕과 강간을 당하지만 처절한 복수를 통해 자유를 되찾고 독립된 자아를 재확인한다.

 

소설은 미카엘의 몰락에서 이야기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발판을 마련했다. , 현실 세계의 미카엘이 장르적 세계의 탐정으로 변모하기 위한 일종의 통과의례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초반 미카엘의 격정적 토로와 저항은 기자로서의 자아를 굳건히 하려는 의지로 읽히며 장르적 세계에 대한 의심과 거부마저 느껴진다.

 

"에둘러 말씀하실 필요가 없단 말이죠. 제게 원하는 일을 말해주세요. 그럼 제가 할 수 있는 일인지 곧바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p.105>

 

"도대체 제가 월 해주기를 원하십니까?" <p.140>

 

"지금 제게 뭘 요구하는지나 아십니까? 굉장히 유능한 경찰들과 수사 전문가들이 지난 수십 년간 매달려도 해결하지 못한 미스터리를, 갑자기 제게 마술처럼 해결해내라는 소리입니다. 일어난 지 사십 년이 다되어가는 사건을 지금에 와서 해결하라는 소리이고요.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이죠?" <p.142>

 

미카엘은 기자이지 탐정이 아니다. 사건의 수많은 팩트와 거짓 사이에서 증거를 찾아내기 위해 머리보다 몸이 고생하는 기자다. 미카엘이 탐정이었다면 미카엘의 추락과 몰락, 헨리크의 뒷조사와 은밀한 제안 없이 의뢰만으로 쉽게 이야기는 시작될 수 있었다. 하지만 미카엘은 기자다. 마치 작가에게 미카엘이 항의하는 듯하다. 나를 왜 이곳(장르적 세계)으로 끌어들인 거야? 한편으로 작가는 독자에게 이렇게 주의를 주는 듯하다. , 이제부터 범인찾기 혹은 밀실트릭 등의 추리적 쾌감은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범죄추리소설이 아니니까요.

천재해커, 리스베트를 살펴보자. 미카엘의 보조 임무 수행을 위한 꽤나 어울릴 직업과 능력을 갖췄다. 더군다나 사회로부터 소외당하고 학대받은 여성이자 신분을 드러내길 꺼려하므로 기자인 미카엘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녀는 이러한 독자들의 판단을 눈치라도 챈 듯이 과감하고 파격적이다 못해 (알레고리처럼) 피후견인인 신분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깨부순다. , 누군가의 보조와 부속이 아님을 스스로 증명하고서 이후 미카엘과 대등하게 조우한다.

작가는 미카엘로 대변되는 현실세계와 헨리크로 대변되는 장르적 세계를 대치를 통해 긴장감을 유발하고 미카엘을 현실 세계에서 장르적 세계로 끌어들이는 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내러티브 구성에서 이원화된 세계가 왜 필요했는지 탐정이 아닌 기자, 미카엘이 왜 필요했는지 의문을 남기고 이야기는 진행된다.

 

인물의 혼용과 발전적 과정

 

                 <헤데뷔 섬의 간략한 지도(뿐 아니라 스웨덴 지도까지)가 삽입되어 있다. >


미카엘은 헨리크 회고록 집필가로 자신을 위장하고 헤데뷔 섬의 친지들과 주변환경을 파고든다. 특히 헨리크에게 방에르 가의 음울한 연대기와 자료를 전해 받고 하리에트 실종은 단순히 독립된 사건이 아님을 직감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헨리크의 형제들인 리샤르드, 하랄드, 그레게르는 나치에 경도되었고 특히 리샤르드는 나치 완장을 차고 전쟁터에 목숨을 바쳤다. 그의 아들 고트프리드는 이자벨라와 결혼해 마르틴과 하리에트를 낳았는데 방탕한 생활을 하며 자식들에게 소홀했고 특히나 이른 나이에 고트프리드는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마르틴은 현재 방에르 그룹의 후계자로 대표이사직에 있지만 헨리크의 마음에 차지 않는다. 현재 헨리크의 남은 형제는 하랄드가 유일하지만 나치즘과 반유대주의자를 형제로 인정하기조차 끔찍했고 그와 척을 지며 지낸 지도 오래다. 미카엘은 하랄드의 딸 세실리아에게서 방에르 가의 내밀한 사정과 마르틴과 하리에트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 주변인물 등을 전해 듣는다. 하리에트가 다이어리에 남긴 이니셜과 숫자가 그동안 숱하게 자행되었던 여성살인의 연계점을 드러나게 하는데 여기에 리스베트의 합류로 수사가 탄력적으로 전개되고 방에르 그룹, 고트프리드의 행적과 연관이 있음을 파악하게 된다. 하지만 회장 헨리크와 고문 변화사 디르크를 제외한 방에르 가의 사람들은 미카엘과 리스베트를 향해 협박과 경고의 메세지를 날린다. 그럴수록 미카엘과 리스베트는 진실에 다가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서로 의지하며 사건을 분담하며 추적해나간다.

 

현실 세계에서 장르적 세계로 진입한 미카엘은 하리에트 실종사건보다 음침하고 불길한 나치스 경력 등의 가족력에 관심을 갖는데 (기자인 미카엘은 대외적으로는 연대기와 회고록 저술 때문에 머물고 있는 것인데 이는 독자에게 현실 세계의 인물을 장르적 세계로의 편입을 자연스럽게 이해시키는 장치로도 보인다.) 이러한 기자의 다른 시선은 사건을 푸는 계기가 된다. , 고립된 섬에서 벌어진 밀실추리 등으로 그동안 사건을 파악했던 형사와 헨리크의 오래된 관습을 벗어나 장르적 세계로 편입된 현실 세계의 인물을 통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미카엘만으로는 부족했다. 이질적이지 않게 장르적 세계로 덧칠되어 무난한 내러티브를 이끌 수 있는 리스베트가 필요했다. 그녀가 처한 신분과 상황은 꽤나 현실적이지만 외견과 직업, 능력, 과거 등은 장르적인 요소가 다분하다. 이를 테면 사이버펑크나 SF물에 튀어나온 스타일링과 무정부적인 가치관 등은 리스베트가 장르적 세계에서 꽤나 중요한 키가 될 것임을 암시한다. 미카엘과 함께 리스베트는 자신의 한정적인 임무에서 벗어나 자신에게 내재되어 있던 사건의 본질을 깨닫고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동안 개인과 사회, 기관, 정부의 폭력과 억압을 견뎌온 리스베트는 이제 자신만의 독립과 구원에서 더 나아가 타인의 아픔을 바라보는 시선을 갖추게 된 것이다. 여성연쇄살인을 다루는 소설에서 리스베트의 존재는 가장 적극적인 해결이자 복수라고 볼 수 있다.

 

현실 세계의 도래한 문제

 

드디어 가족사진과 문헌에서 결정적 증거를 포착해 용의자를 파악하는 데 성공한 미카엘과 리스베트. 섣부른 행동으로 목숨이 위태롭게 된 미카엘을 구사일생으로 건져올린 리스베트는 범인을 추격하지만 범인은 의도적인 사고로 스스로 죽음을 맞이한다. 범인이 남긴 살인사건의 증거를 토대로 마지막 퍼즐 맞추기에 돌입한 두 사람은 아니타를 도청해 하리에트가 호주에 있음을 파악하고 미카엘은 그녀를 만나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그녀로부터 비극적인 가족사와 도피할 수밖에 없었던 사연을 듣게 된다. 결국 헨리크는 그토록 사랑했던 하리에트와 운명적으로 재회하지만 기쁨도 잠시 미카엘에게 시련이 닥친다. 방에르 그룹과 후계자로 선임된 하리에트를 위해 연쇄살인사건을 묻어달라고 명령 아닌 명령을 내린 것이다. 시사지 밀레니엄은 방에르 그룹의 지원을 받기로 계약까지 하고 헨리크가 이사직을 겸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벤네르스트룀를 넘겨주겠다던 헨리크의 호언조차 사실은 미카엘을 끌어들이기 위한 건더기 없는 미끼였을 뿐이었다. 그간 확고한 기자 윤리와 철학을 신념 삼아 다수의 매체의 조롱과 비판, 소송 등으로부터 버틸 수 있었던 미카엘로서는 뼈아픈 자책과 배신, 비통함에 몸서리를 친다.하지만 리스베트의 위로와 선물 덕에 기운을 차리고 본연의 기자로서의 임무에 다시 다가선다.

선물은 다름 아닌 벤네르스트룀의 노트북 하드디스크였다. 리스베트는 벤네르스트룀의 노트북에 프로그램을 심어 그의 모든 파일과 메일, 계좌 등이 저장되어 있는 하드디스크를 그대로 복사할 수 있었고 미카엘은 이를 토대로 벤네르스트룀의 얽히고설킨 유령회사와 조세피난처, 범죄, 거래 등을 까발리는 특집기사와 책을 발간해 언론과 정부를 뒤흔들고 실추된 명예를 되찾고 영웅과 정의의 이미지까지 얻는다. 한편, 리스베트는 변장을 하고서 위조된 여권을 가지고 스위스 등지로 다니며 능숙하면서도 민첩한 두뇌와 연기를 통해 벤네르스트룀의 비밀계좌에서 거액의 돈과 채권을 빼내고 유유히 스웨덴으로 돌아온다. 벤네르스트룀은 미카엘의 기사보도 후 도주하며 은신하던 중에 총살을 당한다.

리스베트는 미카엘을 향한 감정이 사랑이라는 것을 비로소 인정하지만 에리카와의 다정한 모습을 목격하고 질투를 느끼고 다시 혼자가 된다.

 

장르적 세계에서 범인과 실종됐던 여인마저 찾는 데 성공한 미카엘과 리스베트는 이제는 낯설어진 현실 세계에 불현듯 귀착하게 된다. 미카엘은 탐정이 아닌 기자였고 장르적 세계의 문제는 헨리크에 귀속된 채로 해결되었을 뿐 미카엘의 문제는 현실 세계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인심 좋은 부호 의뢰인이 아닌 현실 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해타산적이며 냉혹한 기업가로 돌아온 것이다.

도입부와 마찬가지로 미카엘은 종반에 현실 세계로 돌아올 때도 헨리크에 의해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느낌마저 든다. 기업과 정부를 비판하는 기사를 줄곧 써오던 미카엘이 자신의 뒷조사까지 마친 헨리크의 지원을 받고 그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우를 범한 결과였다. 물론 헨리크는 미카엘이 표적했던, 벤네르스트룀과 같은 파렴치하고 부도덕한 기업인은 아니었다. 하지만 방에르 그룹에서 벌어진 중차대한 범죄를 눈감아달라는 부탁은 이해당사자 간의 청탁인 동시에 대중독자를 향한 기망이기도 하다.

여기서 리스베트는 헨리크의 마수에서 방황하는 미카엘을 현실 세계에 안착시키는 데 절대적인 공헌을 한다. 먼저 희생당한 피해자 가족과 여성단체에 헨리크의 보상과 기부를 약속받음으로써 기자로서의 딜레마에서 벗어나게 만들고 (내러티브 면에서는 어느 정도 자연스러운 전개이자 개연성도 확보해준다.) 벤네르스트룀을 잡을 수 있는 충분한 증거를 확보해 건네줌으로써 기자로서의 정체성을 되찾게 해준다.

여기서 리스베트의 역할의 한계성에 의구심이 생긴다. 리스베트는 미카엘의 조력자로써 기능하는 걸까? 내러티브 면에서는 미카엘을 돕고 해결의 열쇠를 쥐어주는 것은 분명하다. 다만 캐릭터 면에서는 아닐 것이다. 사건을 파고드는 동기는 피해자와의 동일시와 자발적 분노이다. 미카엘에게 느껴지는 알 수 없는 매력에 끌리지만 몇 번의 섹스로 인해 예속되지 않는다. 미카엘에게 벤네르스트룀의 비리를 건네줄 때도 애정에 이끌린 것이 아니라 미카엘과 밀레니엄에 대한 객관적인 상황 판단에 따른 신뢰와 믿음이었다. 미카엘이 제시한 수당을 거부하고 벤네르스트룀의 비밀계좌를 털어내어 미카엘과 다른 방식의 정의와 복수를 실현함으로써 대미를 장식한다. 리스베트는 전무후무한 매력적인 인물이자 아직 발화되지 않은 이야기다.

 

 

3. 제목

 

millennium [miléniəm] n. (pl. s, -nia [-niə])

 천년간; 천년기; 천년제.

 (the ) 성서 천년 왕국()(예수가 재림하여 지상을 통치한다는 신성한 천년간; 계시록 ⅩⅩ: 1-7). [cf.] chiliasm.

 (이상으로서의 미래의) 정의와 행복과 번영의 황금 시대.

 

소설의 제목은 표지와 함께 독자들에게 첫인상을 심어주는 중요한 오브제의 한 요소이다. , 제목은 독자나 작가 모두를 통해 작품에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생명을 주는 부적이라고 본다.

밀레니엄은 그런 차원에서는 다소 힘이 달리는 제목이 아닌가 의심했다. 1990년 대 후반부터 2000년 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Y2K 21세기니 하며 새천년을 목전에 두고 요란을 떨었었는데 특히나 밀레니엄이라는 단어도 그 당시엔 유행어처럼 쓰였지만 이젠 주변에서 찾아보거나 듣기 힘든 단어가 됐다. 시대적 유행에 휩쓸린 단어를 제목으로 쓴다니 몰개성적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일독 후 이것은 내 순진한 착각에 불과했다.

우선 밀레니엄이 가진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자면 천년이라는 뜻이 가장 눈에 띈다. 그에 딸려서 성서에 기록된 종교적 의미와 정의와 행복, 번영의 황금 시대라는 다소 형이상학적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작중 성서와 종교를 악용한 여성연쇄살인이라는 소재를 통해 과거의 종교적 예언과 통치, 구원의 밀레니엄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동시에 언론과 미디어, 기자, 기업, 정치, 사회의 유착과 비리를 끊고 정의와 번영, 미래의 밀레니엄을 조망하려는 작가의 야심이 담긴, 저널리즘 문학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제목으로써 밀레니엄은 그야말로 나무랄 데 없는 부적인 셈이다.

또한 밀레니엄은 이 책의 제목이기 전에 미카엘이 창간한 시사지의 이름이다. 다시 말해 이 책 밀레니엄은 소설 속 시사지의 이름을 빌려옴으로써 소설이라는 외피를 두른 또 다른 시사지이자 미카엘의 저서로 변주되는 것이다. 소설 후반 미카엘은 벤네르스트룀을 본격적으로 고발하기 위해 책을 쓰는데 이는 (한글판 687페이지 영어판 672페이지인 소설 분량과 비슷한) 600여 페이지다.

 

<밀레니엄>이 포문을 연 지 닷새 후 미카엘의 저서 '마피아 금융인'이 전국 서점에 배포됐다. (중략) 이 책은 포켓판으로 615페이지나 돼 벽돌처럼 두툼했다. <p.667>

 

소설 밀레니엄을 읽고 있던 독자는 동시에 소설 속 시사지 밀레니엄과 저서를 읽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된다. 이는 분명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를 테면 미카엘은 스티그 라르손의 문학적으로 가공된 클론이라고 봐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에는 반파시스트인 외조부에게 영향을 받았고 십대 시절부터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기울였다. SF 문학을 좋아해 관련 클럽과 잡지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1977년부터 20년간 스웨덴뉴스 통신사 TT에서 일했고, 1995년 사회고발 계간지 <엑스포EXPO>를 공동 창간한 후 1999년부터 편집장으로 활약했다. 반민주주의, 극우파, 나치즘 문제에 전착하여 기자로서 사회정의를 수호하는 데 평생을 바친 한편, 반대파의 살해 위협 때문에 32년간 연인이자 동료였던 에바 가브리엘손과 법적으로 혼인하지 못했다. <커버 날개의 작가소개 중>

 

미카엘뿐만 아니라 에리카 역시 에바를 바탕으로 가공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작중 미카엘이 추리소설을 읽는 대목과 에리카와 결혼제도로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연애와 섹스를 나누는 대목 역시 실재에 바탕을 둔 작가의 문학적 변주와 상상, 초월이었다고 사료된다.

문학은 가공된 이야기지만 그 안에는 진실을 담고 있다고 제임스 설터는 말했다. 시사지를 비롯한 신문과 매체보다 어쩌면 더 깊이 대중독자에게 가닿을 수 있는 형식은 문학일 것이다. 저자 스티그 라르손은 시사를 소설에 의탁해 논픽션 등의 형식적인 것에서 머물기보다 적극적으로 문학의 장르를 도입하여 현실보다 더 몰입감 있는 소설을 쓰는 데 성공한 점은 실로 놀라울 따름이다.

 

4. 구성

 

소설의 프롤로그를 다시 살펴보자. 헨리크는 압화를 선물받고 분노와 절망감을 동시에 느끼는데 범인의 악질적인 장난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사막의 눈으로 불리는 leptospermum rubinette>


하지만 이는 종국에 반전이 되어 슬프고도 아름다운 상징으로 탈바꿈되어 내러티브에 입체감을 불어넣기도 하는데 이러한 탄력적인 내러티브 중 또 다른 부분은 바로 미카엘이 수감된 2개월이었다. 소설은 미카엘과 리스베트를 비교적 동등한 위치와 분량으로 서술하고 있었는데 별안간 미카엘의 수감으로 이야기가 중간에 잘려나갔다. 미카엘의 수감으로 리스베트까지 등장시키지 않은 점은 인물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치명적인 실수 같았다. 그러나 역시 종반에 리스베트가 미카엘에게 건넨 선물을 통해 비로소 서술트릭의 일종임을 깨달으며 구성에는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다는 것을 증명해보였다.

살펴볼 또 다른 지점은 바로 미카엘이 세실리아와 우발적인 섹스를 벌이는 대목과 리스베트는 닐스에게 강간을 당하는 대목이 나란히 배치되어 두 세계의 주인공의 공존과 더불어 극한의 대조를 극명하게 표현해내는 지점이다. 이를 테면 닐스는 미카엘과 마찬가지로 중년의 이혼남이지만 별탈없이 경력을 쌓았다. 닐스가 더러운 사디스트 돼지라는 사실은 대중들은 알 턱이 없고 이로써 미카엘과 닐스는 사실상 구분하기 힘들지 모른다. 세실리아는 리스베트가 당했던 여성혐오적 모욕을 부모로부터 받고서 상처를 품고 살아왔다. 장르적 세계의 섹스를 현실 세계의 강간으로 치환함으로써 섬뜩한 경고마저 느껴지는 듯하다. 시간에 흐름에 따른 전개의 느슨함과 지루함을 두 세계와 인물의 배치만으로도 허물어버리는 구성능력은 빼어나다.

앞서 보듯 섹스는 이 소설에서 주요한 코드 중 하나이다. 미카엘은 섹스에 이끌려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난다. 리스베트는 원하지 않았던 가학적인 섹스에 희생당하고 하리에트는 가족 간의 근친상간으로 지울 수 없는 상처를 품게 된다. 이처럼 표면적으로는 섹스가 가족 해체와 사회문제를 야기하는 상징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고결한 가족주의와 사회관습을 비판하며 자유롭고 존중하는 연애관을 관철하고 있다.

방에르 가 사람들은 평생 떨어져 살더라도 절대 이혼은 하지 않는다. 파시즘의 광기에 쉽게 결합된 고정되고 낡은 가족주의는 여성에게 불합리하게 적용되는 측면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하리에트를 비롯해 세실리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자벨라는 더욱더 비극적이다. 그 누구보다 광기어린 관습에 전착하며 진실을 두려워하는 어리석음을 대변하고 있다. 심지어 자식이 처한 상황마저 모르쇠로 일관하며 기만적 삶을 영위하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발푸르기스의 밤에 태어난 리스베트와 이혼남 미카엘의 형식과 의미에 구애받지 않는 섹스는 체제 전복적이면서 저항을 담고 있지만 한편으로 아쉽게 마무리된다. 리스베트가 미카엘을 사랑하면서 그들이 가졌던 자유로운 섹스와 리스베트의 캐릭터가 다소 퇴색되는 결과를 불러왔다. 리스베트가 미카엘에게 질투하며 팽팽한 긴장감이 해소되는 결말은 그래서인지 더욱 아쉽기만 하다. (속편이 있으니 속단하기는 이르지만.)

 

5. 현실과 소설의 경계

 

크로아티아 출신의 드라간 아르만스키는 쉰여섯 살의 남자다. 부친은 벨라루스 출신의 아르메니아계 유태인이며, 모친은 그리스계의 보스니아 이슬람교도였다. (..) 처음 스웨덴 땅을 밟았을 때 이민국은 기이하게도 그를 세르비아인으로 등록했다. 현재 그의 여권은 그를 스웨덴 국민으로 명기하고 있지만 여권 사진이 보여주는 얼굴은 전형적인 스웨덴인이 아니었다. 검은 수염으로 덮인 각진 턱에 관자놀이께가 희끗한 다부지고도 이국적인 얼굴이었다.사람들은 그를 종종 아랍 사람이라고 부르곤 했지만 그의 몸에 아랍인의 피는 단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았다." <p.44>

 

드라간으로 대변되는 21세기를 살고 있다. 이제는 출신이나 종교, 가치관, 외모의 장벽을 넘어 하나로 소통하기를 바라는 시대다. 하지만 지역주의, 인종주의, 원리주의적 종교관, 여성혐오, 연쇄살인, 가족경영의 재벌기업 등 사실상 21세기에 사라져야 마땅할 전근대적인 것들은 여전히 그대로이다. 하지만 작가는 이러한 적폐를 장르적 세계에 대부분 몰아넣고 현실 세계에 조금씩 스며들게 한다. 장르소설에서 벌어지는 온갖 범죄와 비리는 하나의 틀이자 인장이다. 그 아무리 현실과 맞닿아 있는 사건을 다룬다 할지라도 쓰임이 다하면 금방 잊혀질 장르의 쾌락적 도구가 될 공산이 크다. 작가는 이런 점에 착안해 소설 안에 장르적 세계를 따로 마련하여 현실 세계와 대구를 이루는 듯 배치해 서로를 결합시켰다. 이로써 우리는 전근대적 가치와 이념들을 현실로 가져와 진지하게 바라보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는 것이다.

 

"그가 정치 활동을 했다는 증거는 아무데도 없습니다. 심지어 좌파운동이 한창이었던 고등학생시절에도 마찬가지였죠. 대학에 다닐 당시에는 노조운동을 했고 지금은 좌파 국회의원인 여성과 동거한 적은 있습니다. (중략) 그렇다면 왜 좌파라는 딱지가 붙었을까요? 아마 경제기자로서 재계의 부패와 수상쩍은 사건을 주로 파헤쳤기 때문일 겁니다. (중략) 하지만 범죄 사실을 밝혀냈다고 해서 좌파라고 하는 건 좀 무리 아닐까요?" <p.67>

 

우리에게도 아주 익숙한 프레임과 주술이다. 진실을 밝히려는 미카엘에게 욕지거리와 협박을 하던 이자벨라와 하랄드를 보며 불과 3년 전 비극적인 사고로 자식 잃은 부모들에게 빨갱이라며 손가락질과 야유를 퍼부어댔던 사람과 순간 들이 떠올랐다. 국가기관이 조직적으로 개입해 사건을 축소 은폐하고 국론분열을 일으켰지만 진실은 결국엔 가라앉지 않고 떠오르기 마련이듯 진실을 두려워하는 자들을 두려워할 이유도 없다. 미카엘과 리스베트가 그랬듯 작지만 단단한 단결이 진실을 뜨게 하는 부력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밀레니엄>은 그렇게 쉽게 침몰하지 않을 겁니다." <p.310>


작년 가을, 우리는 헌정 사상 최대의 스캔들을 목격했다. 다 같이 분노하고 목소리를 높이며 광장에 모였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듯 세상은 조금씩 바뀌었다. 과거에 지나쳐온 것들을 냉철하게 되짚어보며 반성과 겸허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시간은 되돌릴 수 없지만 정의와 진실은 되찾을 수 있다고 믿으므로 우리는 모진 시간을 견딜 수 있는 것이리라.

정치 스캔들뿐만 아니라 최근 여성혐오와 소수인권차별, 실업문제, 관료제 마피아, 갑질행위, 조희팔 사건을 비롯한 각종 수많은 이슈와 사건들로 세상은 조용할 틈이 없었다. 그 중 강남역 살인사건으로 촉발된 여성혐오 논쟁은 아직도 대한민국을 뜨겁게 하고 있고 할리우드의 거물 제작사의 성추문 사건이 터지며 전 세계적인 이슈가 됐다. 또한 정치 경제 언론의 유착에서 비롯한 비리와 비위는 빼놓을 수 없는데 소설에서 특히 이 두 주제에 집중하고 있다.

리스베트가 당한 사회시스템 속의 모멸과 폭력은 여성이기에 더욱 가혹하고 무차별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겨내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절반의 승리일 뿐이다. 폭력에 대항한 폭력은 사회시스템 안에서는 인정받기 힘들다. 리스베트는 범죄의 동기와 원인을 환경과 교육에서 찾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녀가 가는 곳에는 범죄()의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 그래요? 당신은 이런 원칙을 고수하고 싶은 모양이군요. 마르틴 자신에겐 아무런 의지가 없었다. 그리고 인간은 전적으로 교육에 의해 만들어진다."

미카엘은 조심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혹시 네게 뭔가 민감한 일이야?"

리스베트의 눈은 억누른 분노로 이글이글 타올랐다.

(중략)

"다 엿 같은 소리예요. 이 세상에 맞고 자란 사람이 고트프리드만 있는 건 아니거든요. 그렇다고 해서 여자들을 죽일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되는 것도 아니고요. 모든 건 그의 선택이었을 뿐이에요. 이건 마르틴에게도 똑같이 해당해요." <p.551>

 

리스베트와 미카엘은 한 사건을 두고 대치되는 동시에 각자 방식대로 마무리 짓는다. 언론인 미카엘의 임무는 범죄와 비리를 밝혀내고 공론화를 통해 사회적으로 해결을 모색하게 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고 리스베트는 보이지 않는 추적과 감시를 통해 범죄의 파멸과 죽음을 이끈다.

장르적 세계에서 여성연쇄살인은 일종의 나치즘의 유산으로, 리스베트와 달리 하리에트에게는 저항할 수 없는 20세기 역사적 지옥(홀로코스트)이었다. 하지만 37년 사이에 두고 두 여성의 대처가 다를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사회가 변했기에 가능했다. 민주주의와 정부, 교육과 정치, 시장과 노동은 제법 대등하게 발전해왔고 20세기의 유산을 가려내고 정치적 올바름과 가치관도 갖출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미카엘의 존재를 통해 소설 속에서도 간접적으로나마 파악할 수 있는데 미카엘이 결국 20세기의 하리에트와 사라진 여성을 밝혀냈다. 물론 리스베트와 함께여서 가능했다.

두 여성을 수면 위로 부각시키고 문제와 해결을 동시에 진행시키는 저자의 적극적인 문학적 모험은 독자에게 내러티브의 신선함과 현실적 문제에 대처하는 용기도 심어주었다. 하지만 저자는 당부하고 있다. 세상의 변화를 당연시 하지 말 것을, 다수에게 억눌린 소수의 의지와 끈기가 있었기에 비로소 역사의 수레바퀴는 천천히나마 앞으로 굴러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아직도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산적해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밀레니엄은 결코 침몰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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