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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처럼 비지처럼 달달북다 5
이선진 지음 / 북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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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씩 나아가는 우리 사랑]

 

『빛처럼 비지처럼』은 4대째 손두붓집을 하고 있는 남매의 이야기이다. 오빠옹순모가 엄마에게 커밍아웃하고 두부로 싸대기를 맞은 것을 본 동생옹모란은 본인도 같은 처지이지만 고백하고 싶은 마음을 접고 살아간다. 그래도 애인유정과 연애하며 불안하지만 해사한 사랑을 지켜간다. 그러다 오빠 순모가 어플로만 연락하던 애인을 만나러 간다는 이야기에 그들 모두 동행하게 되는데. 세 명이서 두 대의 자전거를 끌고 약속 장소에서 만난 건 말해줬던 나이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 어수룩한세중이다. 넷은 과연 어떻게 될까.


순모와 모란 남매의 밍숭맹숭한 말장난에서 두부 맛이 느껴지는 귀여운 소설이었다. 처음에는 비지라는 소재가 소설과 어떻게 연관될지 상상이 안 갔는데 남매를 보다 보니 두부에서 살짝 떨어져 나온 비지와 비슷한 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지는 두부 생산 과정의 부산물이다. 잘 알다시피 두부는 불린 콩을 매에 갈아 간수를 넣어 엉기게 만드는 것인데 그 과정에서 나오는 콩 일부가 비지가 되는 것이다. 합쳐지지 못하고 떨어져 나온 콩이 두부가 아닌 비지라고 불리는 건 어찌 보면 조금 억울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뭉쳐지지 못해서 두부라 불리지 못하다니.


뭐처럼 굴어야 하느냐는 세중의 말에 모란이 홀로 중얼거린 말이 기억에 남는다. 어수룩하게 거짓말을 하며 세상에서 벗어나 있는 것 같은 세중을 보며 모란은 다른 사람이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짜증 나고 이해할 수 없는 세중에게 그렇게 살라 말하고 싶었겠지. 모란은 모란에게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을 테니까.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한다고 말할 때 고민을 해야 하는 남매는 자신을 탓하다 가도 이런 세상을 억울해하다 다시 자신을 탓한다. 뭉쳐지지 않은 잘못으로, 너를 좋아해서. 내 마음에 솔직해서 두부가 아닌 비지가 된 그들은 어쩌면 가장 순수한 사랑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침이 되면 비춰오는 빛처럼 1년이 다 돼가면 찾아오는 크리스마스처럼 모란이 유정을 사랑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 문제는 다른 사람들은 나를 비켜날 수 있어도, 나는 죽었다 깨나도 나 자신을 비켜날 수 없다는 거였다. 브레이크가 안 듣는 자전거를 타고 내리막을 내달릴 때처럼 속도가 감당 못할 만큼 빨라지는데 이 세상 모든 나쁨이 내게 길을 터주는데 삶의 막다른 길목으로 접어드는데 나는 내 사람에서 도저히 중도 하차할 수가 없었다. 버리는 시간 버리는 마음 버리는 삶인 셈 칠 수 없었다. p.56


🏷️ 이게 눈 감고 제자리에서 몇 초만 걸으면 몸이 어느 쪽으로 틀어졌는지 알 수 있대. 걸음걸이도 주인을 닮아서 지금껏 자기가 살아온 방향으로 삐뚤어지는 거래. P.60


🏷️ 그러니까 어딘가 창백하고 있는 듯한 문장을 읽으면서, 나는 그럼 자전거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영혼도 자전거만큼 빠르게 달릴 없어서 자전거로도 어딘가를 배회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으스스한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소설 속의 인물들의 영혼도 여기 어디쯤을 거닐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면 왠지 모를 위로가 되기도 한다. 어쩌면 나는 소설 속의 인물들이 자신의 영혼을 버려두고 오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p.80 작업 일기 자전거를 타는 상상을 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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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공익 - 왜 어떤 ‘사익 추구’는 ‘공익’이라 불리나
류하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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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공익이란 무엇일까. 공익은 말뜻 그대로 공공의 이익, 즉 사회 전체의 이익이라는 뜻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 의미가 잘 와 닿지 않았다. 책은 먼저 공익의 개념에 대해 정리하며 시작한다. 사회에서 통용되는공익이라는 개념은사회적 약자의 사익 중 현재의 공동체 다수가 위험하지 않다고 보아 그 추구 행위를 허용하는 사익이라고 한다. 따라서 불온한 공익이란 다수에게 온당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사회적 약자들의 사익이라는 것이다. 저자인 류현경 변호사는 이에 대해 스쿨 미투 정보공개 청구, 경비 노동자 갑질 사망 사건, 삼성 최초 노조 설립 투쟁 등 직접 변호를 맡았던 사례를 통해 그 개념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다. 오랫동안 소수자와 약자의 편에 서서 함께 싸워오며 여러 사건을 겪으며 느꼈던 것들을 이야기하고 공익과 사익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책은 3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장은 국가가 국민의 공익을 보호하고 있는지 이야기하고 2장은 불온한 사익 투쟁들의 이면에 대해 다루며 마지막 3장에서는나의 사익 투쟁기로 변호사를 변호하는 현실적인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뉴스에서 흘리듯 들었던, 자세히 알지 못하는 사건들의 이면은 훨씬 답답했고 누군가는 올바른 판결을 받아내기 위해 길고 지난한 싸움을 계속해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공익이라는 이름으로 일어나는 모순들을 읽어나가며 단순히 공익을 위해서라는 말에 동의하기보다는 그 안에 담긴 진실을 살펴보게 하는 책이다. 여전히 사회적 약자들의 곁에서 노력하고 있는 그들에게 감사와 존경을 표하고 싶다.


🏷️ 장애인 인권 사권, 아동 인권 사건은 자연스레 공익,인권 사건이 되지만, 노동삼권 사건은 그냥 노동 사건이지 공익,인권 사건이라 하기엔 뭔가 개운치가 않다. 노동삼권 역시 다른 인권과 마찬가지로 헌법에 명시된 보편적 기본권인데도 그렇다. 특정 사회 구성원의 사익 추구 행위 간에도 이렇게 차이가 있다. p.5


🏷️ 권력이란 무엇인가. 상대방을 의지대로 있는 힘이다. 권력이 있으면 악다구니가 필요 없다. p.8


🏷️ 노동조합, 장애인 단체 상대적 소수자, 약자들이 가끔 강경 일색으로 보일 때가 있다. 그럴까. ‘화해 서로가 한발씩 양보하는 것인데 이상 양보할 것도 없거나, 도저히 양보할 없는 벼랑 끝에 한쪽이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단지 싸우지 마라’, ‘데모 때문에 막힌다 것이 아니라 대화를 통한 화해가 가능한 상황인지, 누가 많이 양보해야 화해가 가능한지 들여다보아야 한다. 진실을 대단히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p.313-314


🏷️ 그러나 우리는 상황을 들여다보지도 않고 거리에서 악다구니 쓰는 자들에게 무심코 떼쓴다 적은 없었을까? 돌아볼 필요가 있다. 다시 강조하건대 진실을 대단히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의는 대개 낮은 곳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높게 있는 자가 낮게 임할 평화도, 화해도 구현될 있다고 믿는다. p.314


* 본 게시물은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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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네 미술관 - 다정한 철학자가 들려주는 그림과 인생 이야기
이진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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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민 작가의 다른 책을 읽어 본 적이 있다.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것을 넘어 그 이면에 담긴 이야기를 고민해본 듯한 또 독자와 대화하는 따뜻한 말투가 기억에 남는다. 이번 책은근육, 마녀, 거울, 슬픔, 서투름, 사소함, 직선과 곡선, 앞과 뒤, 너와 나라는 9개의 키워드와 관련된 그림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속에 담긴 이야기를 파헤치며 철학과 문학을 통해 어렵지 않게 풀어낸다. 몇백 년 전의 미술 작품을 통해 우리 삶을 되돌아보기도 하며 지금 현대의 시선으로 그림 속 인물을 이해해보기도 하는데 그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그림은 메두사였다.


흉측한 뱀으로 가득한 머리를 가지고, 그녀와 눈이 마주치기만 해도 모든 사람은 돌이 된다는 신화. 이런 메두사의 캐릭터는 무섭고 강렬해 이목을 끄는데 화가들에게도 매력적인 소재라 여겨져 다양한 그림이나 조각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책을 읽다가 이런 무시무시한 캐릭터가 본래부터 그랬던 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변신 이야기에 따르면 원래 메두사는 지혜의 여신 아테나를 섬기는 신전의 무녀였는데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메두사의 아름다움에 취했다는 이유로 그녀를 신전에서 강제로 범한다. 이 일로 그는 아테나의 진노를 산다. 하지만 아테나는 강대한 포세이돈에게 벌을 내릴 수 없었고 엉뚱하게도 자신의 신전에서 그런 행위를 벌였다는 이유로 메두사의 머리카락을 뱀으로 바꾸고 그녀와 눈을 마주치는 모든 자가 돌이 되는 저주를 내려버린다. 메두사는 독신서약을 하여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남자들을 모두 거절하고 철저히 피해자였음에도 형벌을 뒤집어쓰게 된 것이다. 더 억울한 것은 이렇게 괴물로 변해버린 메두사는 참수될 뿐만 아니라 목이 잘려서도 안드로메다 공주를 구하는 데 이용되어 안식을 이루지 못한다.


이런 이야기를 보고 프란츠 폰 슈투크의 <메두사>를 보면 조금 다른 느낌이 든다. 이전에 무서워서 제대로 살펴보지 못한 얼굴에는 공포와 억울함이 담겨있는 것 같기도 하다. 오늘날 메두사는 여전히괴물, 참수해야 하는 대상으로 그려져 조롱과 혐오의 의미로 사용된다. 하지만 이런 메두사의 이야기를 알아본 사람들이 생겨났다. 엘렌 식수의 에세이에 쓰였듯, 그녀를 괴물로 만든 건 그녀의 존재를 두려워하는 사람들뿐이라고 묘사되기도 한다. 메두사는 이제 강하고 분노할 줄 알며 굽히지 않는 여성의 이미지로 활용된다. 분노가 강렬한 에너지로 표출되는 모습에 매력을 느껴 이탈리아 브랜드 베르사체의 로고로도 등장할 만큼 메두사의 눈을 들여다보고 그 고통을 들어주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림 뒤에 담긴 이야기를 통해 이제 나 또한 피하지 않고 그녀의 눈을 더 차분히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 외에도 우리의 신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슬픔과 서투름, 앞이 아니라 뒤의 진실을 보는 태도 등 인생의 여러 이야기를 작가의 따뜻하고 깊은 고민과 함께 풀어나간다. 책 안에 담긴 작품들을 통해 우리가 가진 삶을 조금 다르게 보게 되었다. 어렵지 않고 따뜻하게 풀어나가니 꼭 읽어봤으면 좋겠다.


🏷️ 예뻐야 가꿔야 하는 무슨 라인을 말하는 게 아니라 삶 속에서 휘청거리지 않고 단단하게 서 있을 수 있는 중심선. 그런 선이 무너지지 않게 다듬고 정돈하는 것이 운동의 가장 중요한 기능임을 깨달았다. P.37 1-1.근육


🏷️ 속에 몰랐던 근육을 찾아내듯 하나씩 새로운 것을 만나는 . 익숙함 속에서도 낯선 감각을 깨우는 은은한 도전. 그러므로 우리 모두에게는 최선을 다해 동사로 살아갈 근육이 필요하다. p.44 1-1.근육


🏷️ 알브레흐트 뒤러의 1514 <멜랑콜리아 1>이라는 작품 속에서는 여성인 듯하면서도 남성인 듯한 인물이 천사의 날개를 악마의 얼굴을 하고 있다. 이게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는 여성적이기도 하고 남성적이기도 하고,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다. 상대를 괴물이라고 손가락질하고 싶을 , 손가락으로 안의 괴물을 먼저 더듬어볼 있으면 좋겠다. 마녀를 닮은 수많은 단어를 만날 때마다, 슈투크의 그림 눈동자를 떠올리면 좋겠다. p.83 1-2.마녀


🏷️ ‘기억에 남을 만한경험을 꾸준히 만드는 것은 결국 내가 경험을 좋은 기억으로 남기는일과 관련된다. 둘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카이로스적인 순간은 결국 마음과 관련된다. 우리 가족 중에서 나만이 나무 밑에서 그런 감정을 느꼈듯이, 순간을 받아들이고 온전히 누리려는 마음이 그런 잊지 못할 순간을 만든다.  p.108 1-3.거울


🏷️ 하지만 슬픔은 섬세히 물어도 공명이 어려운 감정이다. 각자가 가진 슬픔의 회로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내밀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기쁨에는 교집합이 많지만, 우리가 슬픔을 느끼는 지점과 거기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각자의 고유한 식을 가진 함수 같은 것이다. 그저 물을 밖에 없다. 물어도 닿지 않을 확률은 높지만 혼자 슬퍼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만은 닿을 것이기에.  p.145 2-1.슬픔


🏷️ 서투르게 고민하는 거친 시간이 사랑이다. 매끄러움에 대한 강박이 오히려 사랑을 미끄러져 넘어지게 만든다. 인간은 모두 서툰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세상을 편안하고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일이다. p.177 2-2.서투름


🏷️ 앞서도 언급했듯이 음악이 되려면 각각의 음이 다른 소리를 내며 서로 곁은 내주어야 한다. 소중한 사람이 계속 소중할 있으려면 사이에 바람이 불게 하고 출렁이는 바다를 두어야 한다는 지브란의 말을 이제는 연인 아니라 주변의 모든 소중한 관계에 적용할 있게 되었다.껴안을 때는 전력을 다해 껴안아야 하지만, 그러고 나서는 놓아주어야 한다. p.314 3-3. 너와


🏷️ 인간은 항온동물이지만 마음의 온도마저 일정하게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는 여러 온도가 있고 온도를 넘나들며 여려 겹의 사람으로 산다. 따뜻해야 피는 꽃이 있고 서늘해야 피는 꽃이 있다. , 흘려보내고 맞는 여백. 그렇게 시원해진 곳에 새로운 사랑의 자리가 생긴다. P.316 3-3. 너와


* 본 게시물은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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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단보도에서 수호천사를 만나 사랑에 빠진 이야기 달달북다 4
이희주 지음 / 북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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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달북다’는 12명의 작가가 로맨스라는 주제를 다음(칙릿/ 퀴어/ 하이틴/ 비일상)과 같은 키워드로 풀어낸 시리즈이다. 단편 소설 1권과 작업 일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네 번째 작품으로 이희주의 『횡단보도에서 수호천사를 만나 사랑에 빠진 이야기』가 출간되었다. 전에 민음사에서 출간된 『나의 천사』를 읽은 적이 있는데 이번 작품에서도 천사 캐릭터가 등장하여 어떤 이야기가 진행될지 궁금했다.


책은 주인공인 ‘나루세’가 누나 ‘아오이’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진행된다. 나루세는 어릴 적 지진을 겪고 그것, 즉 유령과 같은 존재들을 보게 된다. 그리고 고향에서 벗어나 도쿄에서 생활하게 되는데 어느 날 횡단보도에서 교통사고를 보게 되고 유령 소년을 만나게 된다. 유령 소년은 죽은 사람들의 욕망을 처리하러 온 일종의 천사와도 같다. 천사와의 동행이 이어지고 결국 나루세는 그 소년을 사랑하게 된 사실을 누나에게 고백하게 되는데. 


누나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이러한 고백을 비롯해 지난 과거에 대한 진실도 담겨있다. 유령을 보기 이전의 일, 누나의 비밀 그리고 천사의 정체까지.


쌍둥이 누나에게 보내는 편지 끝에 밝혀진 비밀은 충격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슬펐다. 부정하면 할수록 커지는 욕망이 죽어서도 사람들에게 남아있고 그래서 거울을 보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한 천사의 이야기가 슬프게 들리는 건 왜인지. 70쪽 정도의 짧은 분량이지만 반전과 강렬한 이야기에 몇 번씩 다시 읽어보게 되는 단편이었다.


🏷️ 누나, 보아요. 나의 비밀을 얹어둘게요. 이제 무게가 같아졌으니 아무것도 계산하지 않고 이야기할게요. p.17


🏷️ 모르겠어요. 몇백 년 혹은 몇천 년을 살았을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렇게 웃을 수 있을까. 잠들 때마다 망각의 베개를 베지 않는다면 결코 지을 수 없는 표정이었어요. 매일 새로 태어나는 아기들의 얼구를 하나씩 훔쳐 오는 것처럼 티끌 없는 미소였어요.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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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에 합당한 우리 연애 - 박화성과 박서련의 소설, 잇다 6
박화성.박서련 지음 / 작가정신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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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잇다는 근대와 현대 여성 작가들의 작품을 같이 읽을 수 있는 작가정신의 시리즈이다. 이번 6번째 책에서는 최초로 장편 소설을 쓴 여성 작가 박화성과 여러 장르의 이야기를 넘나들며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내는 박서련 작가의 작품들이 실려있다. 책의 제목은 『정세에 합당한 연애』. 정세에 합당한 연애란 어떤 것일까. 책을 받고선 제목을 몇 번 읊어보다가 각 단어의 뜻을 사전에 찾아봤다. 


정세 : 일의 되어가는 사정이나 형편. 

합당하다 : 어떤 기준, 조건, 용도, 도리 따위에 꼭 알맞다.


가장 인상 깊었던 단편은 박화성의 「하수도 공사」와 박서련의 「정세에 합당한 우리 연애」였다. 하수도 공사의 배경은 식민지 조선으로 하수도 공사 임금을 지불받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동권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노동자들 사이에서 대표급인 동권와 그의 동료들은 경찰서로 찾아가 임금을 받아내기 위해 싸운다. 그렇게 문제를 해결하고 동권은 임금 문제를 떠나서 사회적 변화라는 더 큰 이상을 실현하고자 결국 사랑하는 애인인 용희에게 이별을 말한다. 


정세에 합당한 연애는 대학생 진과 림의 이야기이다. 둘은 독서 동아리에서 활동 중인데 사실 이는 지난 학기 사라진 총여학생회의 재건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진은 동아리 활동을 통해 총학 선거에 나가 총여의 재건 안건을 말하고자 한다. 림은 진의 후배이자 그녀의 애인으로서 이를 적극 돕는다. 그러다 둘의 관계를 동아리 회원들에게만 밝히고자 하는데 진은 커밍아웃이 선거의 행보에 걸림돌이 될까 망설이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독서 토론 시간에 읽게 된 박화성의 「하수도 공사」에 대한 감상을 나누다 림은 상상인지 자기 입에서 실제로 나온 것인지 모르는 말을 내뱉는다. “우리는 정세에 합당한 연애를 하고 있어요. 정세에 합하지 않은 연애 같은 건 세상에 없어요. 아마도 용희는 동권에게 그렇게 말하고 싶었을거에요.”


두 단편에서는 각각의 정세에 놓인 사랑의 모습이 그려진다. 슬프게도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일 안에서는 주도권을 쥔 자와 그렇지 않은 자가 나오는데 두 이야기 모두 사회적인 변화를 이끌어야 하는, 즉 정세에서 해결할 것들이 있는 동권과 진에게 주도권이 놓여있다. 차이점은 주도권을 가진 자가 남자 주인공에서 여자 주인공으로 바뀌었다는 점 정도. 그런데 두 이야기의 사이에는 10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그 긴 시간이 지나고 성별이 바뀌어도 정세에 합당한 연애란 충족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정세와 연애 그 사이에 합당이라는 말이 들어가는 게 맞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시대나 흐름에 꽉 알맞은 연애라는 게 존재하긴 하는지 그런 것들은 누가 정하는지. 해결해야 하는 복잡한 문제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그 앞에서의 사랑도 여전히 똑같다. 진과의 연애에서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걸 감지하는 림을 보면 알 수 없는 정세가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은 든다. 그러나 망설이는 진의 모습을 보면 결국 시간 외에 바뀐 것은 많지 않구나 하고 깨닫는다. 진이 어떤 대답을 할지는 모른다. 그래도 100년 전의 동권과는 다른 답을 하기를 바라며 또 다른 진과 동권들에게 기대한다.


🏷️ “글쎄 생각해보면 알지 않소? 결혼할 수가 없는 사랑이 어찌 합당한 사랑이겠소. 내가 내 몸 하나도 변변히 처리 못하는 사랑이겠소. 내가 내 몸 하나도 변변히 처리 못하는 못난인데 어떻게 용희까지...... 무어 나는 아무리 생각해봤자 열에 하나도 좋은 조건이 없으니 영원한 사랑을 계속할 수는 없다는 말이오.” p.88 하수도 공사 


🏷️ 이 굉장한 하수도를 보는 자, 돈과 문명의 힘을 탄복하는 외에 누가 삼백 명 노동자의 숨은 피땀의 값을 생각할 것이며 죽교의 높은 이 다리를 건너는 자 부청의 선정을 감사하는 외에 누구라 이면의 숨은 흑막의 내용을 짐작이나 하랴. P.91 하수도 공사


🏷️ 그렇지만 좋아해. 그래서 림은 입을 다물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무슨 말인가를 찾고 있었지만 어떤 말도 적당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조금 시간이 흐른 뒤에야 림은 그때 했어야 하는 말을 찾았다. 쓰인 지 백 년이 다 되어가는 소설에서였다. 언니는 우리 연애가 정세에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하는구나. p.196 정세에 합당한 우리 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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