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에 합당한 우리 연애 - 박화성과 박서련의 소설, 잇다 6
박화성.박서련 지음 / 작가정신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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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잇다는 근대와 현대 여성 작가들의 작품을 같이 읽을 수 있는 작가정신의 시리즈이다. 이번 6번째 책에서는 최초로 장편 소설을 쓴 여성 작가 박화성과 여러 장르의 이야기를 넘나들며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내는 박서련 작가의 작품들이 실려있다. 책의 제목은 『정세에 합당한 연애』. 정세에 합당한 연애란 어떤 것일까. 책을 받고선 제목을 몇 번 읊어보다가 각 단어의 뜻을 사전에 찾아봤다. 


정세 : 일의 되어가는 사정이나 형편. 

합당하다 : 어떤 기준, 조건, 용도, 도리 따위에 꼭 알맞다.


가장 인상 깊었던 단편은 박화성의 「하수도 공사」와 박서련의 「정세에 합당한 우리 연애」였다. 하수도 공사의 배경은 식민지 조선으로 하수도 공사 임금을 지불받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동권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노동자들 사이에서 대표급인 동권와 그의 동료들은 경찰서로 찾아가 임금을 받아내기 위해 싸운다. 그렇게 문제를 해결하고 동권은 임금 문제를 떠나서 사회적 변화라는 더 큰 이상을 실현하고자 결국 사랑하는 애인인 용희에게 이별을 말한다. 


정세에 합당한 연애는 대학생 진과 림의 이야기이다. 둘은 독서 동아리에서 활동 중인데 사실 이는 지난 학기 사라진 총여학생회의 재건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진은 동아리 활동을 통해 총학 선거에 나가 총여의 재건 안건을 말하고자 한다. 림은 진의 후배이자 그녀의 애인으로서 이를 적극 돕는다. 그러다 둘의 관계를 동아리 회원들에게만 밝히고자 하는데 진은 커밍아웃이 선거의 행보에 걸림돌이 될까 망설이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독서 토론 시간에 읽게 된 박화성의 「하수도 공사」에 대한 감상을 나누다 림은 상상인지 자기 입에서 실제로 나온 것인지 모르는 말을 내뱉는다. “우리는 정세에 합당한 연애를 하고 있어요. 정세에 합하지 않은 연애 같은 건 세상에 없어요. 아마도 용희는 동권에게 그렇게 말하고 싶었을거에요.”


두 단편에서는 각각의 정세에 놓인 사랑의 모습이 그려진다. 슬프게도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일 안에서는 주도권을 쥔 자와 그렇지 않은 자가 나오는데 두 이야기 모두 사회적인 변화를 이끌어야 하는, 즉 정세에서 해결할 것들이 있는 동권과 진에게 주도권이 놓여있다. 차이점은 주도권을 가진 자가 남자 주인공에서 여자 주인공으로 바뀌었다는 점 정도. 그런데 두 이야기의 사이에는 10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그 긴 시간이 지나고 성별이 바뀌어도 정세에 합당한 연애란 충족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정세와 연애 그 사이에 합당이라는 말이 들어가는 게 맞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시대나 흐름에 꽉 알맞은 연애라는 게 존재하긴 하는지 그런 것들은 누가 정하는지. 해결해야 하는 복잡한 문제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그 앞에서의 사랑도 여전히 똑같다. 진과의 연애에서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걸 감지하는 림을 보면 알 수 없는 정세가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은 든다. 그러나 망설이는 진의 모습을 보면 결국 시간 외에 바뀐 것은 많지 않구나 하고 깨닫는다. 진이 어떤 대답을 할지는 모른다. 그래도 100년 전의 동권과는 다른 답을 하기를 바라며 또 다른 진과 동권들에게 기대한다.


🏷️ “글쎄 생각해보면 알지 않소? 결혼할 수가 없는 사랑이 어찌 합당한 사랑이겠소. 내가 내 몸 하나도 변변히 처리 못하는 사랑이겠소. 내가 내 몸 하나도 변변히 처리 못하는 못난인데 어떻게 용희까지...... 무어 나는 아무리 생각해봤자 열에 하나도 좋은 조건이 없으니 영원한 사랑을 계속할 수는 없다는 말이오.” p.88 하수도 공사 


🏷️ 이 굉장한 하수도를 보는 자, 돈과 문명의 힘을 탄복하는 외에 누가 삼백 명 노동자의 숨은 피땀의 값을 생각할 것이며 죽교의 높은 이 다리를 건너는 자 부청의 선정을 감사하는 외에 누구라 이면의 숨은 흑막의 내용을 짐작이나 하랴. P.91 하수도 공사


🏷️ 그렇지만 좋아해. 그래서 림은 입을 다물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무슨 말인가를 찾고 있었지만 어떤 말도 적당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조금 시간이 흐른 뒤에야 림은 그때 했어야 하는 말을 찾았다. 쓰인 지 백 년이 다 되어가는 소설에서였다. 언니는 우리 연애가 정세에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하는구나. p.196 정세에 합당한 우리 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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