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디지몬 - 길고도 매우 짧은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아무튼 시리즈 67
천선란 지음 / 위고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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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유년기는 암울했다. 폭력과 불화가 있었다. 나는 유년기라는 시절을 낭만적으로만 보려는 시도에 동의하기 힘든데, 그래서 이 책은 제법 내 이야기로 느껴졌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 모뎀을 넘어 ADSL과 메가패스(메가스터디 패스권 아님)라는 이름으로 인터넷이 보급되었고 디지털 세계는 안식처가 되었다. 거리에 생겨난 PC방과 크레이지 아케이드는 2000년대에 초등학교를 다닌 어린이들의 놀이 문화였다. 졸라맨과 마시마로를 포함한 각종 플래쉬 자료 그리고 안톤 오노에 대한 적대적인 게시물이 넘쳐나는 온라인 세계가 있었다. 이 즈음에 세기말 분위기에 나타난 디지몬 어드벤쳐는 디지털 세상 속 이야기다.


 포켓몬(스터)과(와) 기묘하게 다른 디지몬을 나도 열심히 봤다. 아구몬 진화를 성대모사하기도, 에테몬 닮은 친구를 놀리기도, 디지몬 온라인 게임을 했었다. 천선란은 현실을 도피해 디지몬이 사는 디지털 세계로 가고 싶던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왜 그토록 디지몬을 욕망했는지 그리고 지금은 욕망하지 않으려 하는지 책에 썼다. 나는 《천 개의 파랑》을 읽으며 휠체어 이용자, 엄마를 이름으로 부르기(보경), 여러 여성, 퇴역 직전 경주마, 로봇 기수라는 소수자성 있는 인물들의 화학 작용을 왜 생각해냈는지 궁금했는데 이 책으로 조금은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디지털 세상이 더욱 확장된 요즘 디지털 세계로 '피한다'거나 '숨는다'는 일이 아득하게 들린다. 디지털과 아날로그는 구분이 어렵기 때문이다. 병원도 앱으로 대기하는 시대가 되었다. 선택받은 어린이들의 모험에서 선택받지 못한 어린이들은 어떤 상상을 할 수 있을까? 디지털화되었다는 세상에서 내몰리고 자신을 내모는 어린이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나는 유년기를 건너와 이제는 디지몬을 애도할 수 있는 작가와 애도할 디지몬을 찾는 어린이들을 겹쳐 생각했다. 떠나보낼 수 없을 만큼 밀접한 디지털화된 세상에서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슬픔만 배분 받고 있을까? 이 책은 내 고민과 아무 관련이 없는 '건너온 사람' 이야기지만 그 안에서 손 내밀었어야 하는 사람들과 손 내밀지 못 했던 사람들의 모습도 조금은 상상해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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펼친 면의 대화 - 지금, 한국의 북디자이너
전가경 외 지음 / 아트북스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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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디자인의 세계를 탐구하는 귀한 내용입니다. 표4라 부르는 뒷표지에 '책의 가장 깊은 곳에서 펼쳐지는 열 편의 대화'라는 문장이 있습니다. 펼쳐지는 대화, 펼친 면이라는 말로, 책을 채우는(혹은 비우는) 묵직한 이야기들을 담았습니다. 표지 디자인을 넘어 본문 조판, 면 구성, 서체, 정렬은 책을 펴내는 작업에서 중요한 요소들인데 많이 이야기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애스터리스크(*)로 할 것이냐 물결로 할 것이냐. 글자 간격과 색깔과 잉크는 어떤 것을 할 것인지 고민하는 디자이너는 원고를 하나의 사물로 만들어내는 연금술사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책은 누구의 것일까요? 책을 썼다, 책을 냈다라고 표현하지만 저자는 원고를 쓰고, 편집자는 원고를 다듬으며 구성을 고민하는 프로듀서 역할을 하고, 디자이너는 책의 꼴을 만들어냅니다. 꼴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드는데요, 실제로 편집자들이 쓰는 단어기도 합니다. '책의 꼴'. 물론 이 책에 책의 꼴이 아닌 다양한 꼴들이 나오기는 하지만 저는 책을 펴내는 일이 당연하게도 공동 작업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목차도 그렇습니다. 


김다희의 책

조슬기의 책

박연미의 책


 속격 조사 -의는 소유를 나타냅니다. 내가 산 책도 나의 책이고 내가 원고를 쓴 책도 나의 책이면 디자이너의 책도 디자이너의 책이라고 할 수 있겠죠. 저자가 책의 권리와 권한을 모두 갖는다는 면에서, 서지사항에서나 '협조자'들을 겨우 찾아볼 수 있다는 면에서 민주적이지는 않아 보입니다. 물론 꼭 민주적이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책은 분명 저자만의 것은 아닙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디자이너들은 책을 만들 때 올려놓는 손들이 어떤 손들인지 알아보도록 다른 결을 충실히 보여줍니다.


 책의 디자인을 '이쁘다' 이상으로 읽을 대상으로 삼는 경우가 많아져야 하지 않을까요? 이때 디자인은 당연히 표지 디자인 이상을 말합니다. 리베카 솔닛 책으로 기억하는데, 인쇄를 파란색으로 한 글도 있었네요. 제가 쓴 책도 《사이렌과 비상구》에는 비상구를 상징하는 손가락 특수문자(☞)가 있더라고요. 마티 출판사에서 낸 《일인칭 가난》에는 본문 안에 빨간색으로 주석을 넣었습니다. 북토크에 갔더니 의도를 다르게 해석한 사람들이 있어 재미있었다고 편집자가 말했습니다. 


 내가 북 디자이너라면, 글을 체현하는 몸인 책의 꼴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 고민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북 디자인은 글을 묘사하는 게 아니라 그 자체로 창작이고 생산이므로 대단히 존중받아야 하는 영역이며 회자되고 언급해야 할 부분이라는 생각이 책을 읽으며 계속 했습니다. 이 책 표지에도 판형 사각형이 있지만, 디자이너들의 포트폴리오 도판에 판형도 제시되어 있어 실물 크기를 가늠할 수 있었고 펼침면을 다양하게 보여주어 이해가 쉬웠습니다. 물론 컬러 인쇄에 도판이 이렇게 많이 들어가는 작업은 제작비가 많이 들것이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서문에서 '책에 대한 책'이라고 저자는 밝혔는데요. 책을 좋아하는 사람과 글을 쓰는 사람은 책 만드는 일의 지난함과 어려움을 다소간 이해하리라 봅니다. 그 지난함과 어려움이 출판 시장의 불황 때문인지 독자들이 잘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이지 구분이 어렵지만 책의 꼴을 갖추려 고민하고 노력하는 디자이너들의 모습에서 어떤 책도 저절로 나오지는 않는다는 자명한 사실을 구체적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도서관 서가에 놓여있는 책등들의 색과 크기를 고민하는 사람은 실제로 있는 사람이니까요. 개인적으로는 문학과지성사의 시그니처인 빨간 박스 도상이 흥미로웠습니다. 책의 맥락이랑 상관없이 자신을 주장하는 모양새로 보여서요. 열화당에서 낸 존 버거 책을 보며 책의 질감이 버석하다고 느꼈는데 저간의 사정을 이 책으로 조금은 추측할 수 있었습니다.


 책 디자인의 이야기뿐 아니라 북 디자이너들의 고심과 퍼포먼스 그리고 내가 보는 책의 물성을 더 오래 생각하게 하는 책이었습니다. 어떤 책을 왜 썼는지 뿐 아니라 왜 이렇게 만들었는지도 역시 읽어보아야 할 거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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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렌과 비상구 - 학교는 모르는 몸과 마음들 이매진의 시선 21
오유신 지음 / 이매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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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쓴 사람으로서 반응이 궁금한데

제가 유일하게 보는 알라딘에 평이 없어 스스로 남겨봅니다.

말 그대로로 '마이리뷰'네요.


책을 쓰며 여러번 읽었지만 단행본으로 또 읽으니 신기했습니다.

책을 만드는 일은 저에게 밥 짓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쌀을 드렸는데 편집자는 밥을 만들었습니다.


읽으며 흥미로웠던 점은 물성이었습니다.

제가 여러번 원고를 수정했지만 한 권의 책이 되어 손으로 종이를 넘겨보니

글을 읽는 맛이 다르더라고요.


내용을 본다면 제 언어로 쓴 말들이라 낯설지 않고

여러번 읽어서 빨리도 읽힙니다.

제 나름대로 펀치라인(?)이라고 생각하고 쓴 문장도 잘 보이더군요.

반대로 공감대가 없다면 뻔한 문장으로 읽을 수 있겠다고도 생각했습니다.


교육, 몸, 젠더, 폭력, 장애, 질병, 돌봄, 동물과 같은

유행(?)하는 테마는 다 넣은 것 같은데

트렌드에 맞춘 것도 있지만

트렌드가 제게는 사람들이 알고 있고 인식하고 있던 것이 언어화되고 표면으로 드러난 것이라 보기에, 그리고 세상 많은 일들은 하나의 기준으로 설명하기 어렵기에 짬뽕스런 글이 되었네요.


인터뷰를 하며 많은 생각을 했지만 역시 애정이 가는 부분은

장애가 있는 교사들과 만난 16장입니다.

편집자님도 강렬했다고 말씀해주셨는데요. 

저는 비장애인이라 오만하고 시혜적으로 보일 수 있음을 경계하며 썼습니다.

장애가 있는 몸들이 오히려 사회의 진실에 가깝다는 생각은 정희진 선생님이 영화 〈작전명 발키리〉를 주제로 쓴 기고문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썼습니다. 이 기고문의 제목은 '국가는 어떤 몸이어야 하는가' 입니다.


17장도 동물을 돌보고 동물을 다르게 보려했는데요. 17장은 사실 저명한 젠더 연구자 잭 핼버스탬이이 쓴 《Wild Things》에서 아이디어를 착안했습니다. 동물과 좀비를 다르게 보는 인식에서 배웠습니다. 강아지들 떼샷이 등장하는 영화 〈화이트 갓〉을 다루죠.


이 두 장은 르포처럼 본 것과 들은 것을 썼는데요. 다양한 몸 또는 동물과 관계 맺는 다른 모습에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몸 각본과 동물과 관계 맺을 때 사용하는 각본이 유일한 각본이 아니라 여러 각본 중 하나라는 점을 생각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썼습니다.


사람들이 목차를 봤을 때 다 알만한 내용이라고 생각했을까 궁금하네요.

절대 그렇지 않게 하겠다고 생각하고 썼고

읽으면서도 이게 이런 이야기로 빠진다고? 생각하길 바라며 썼습니다.

단순한 설명으로는 도저히 해명하지 못하는 삶의 층들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다시 읽어보아도 성공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교사들이 원하는 교육 도서도, 고급(?) 독자들이 읽을만한 이론서도 아닌 책 같기도 했습니다. 저는 사실 그래서 더 좋은데 말이죠. 봉준호 감독의 영화 〈플란다스의 개〉를 좋아하는데요. 스릴러인지 멜로인지 드라마인지 모를 오묘한 영화는 어떤 면에서 장르라는 개념을 조롱하는 느낌이었습니다. 비디오 가게 점원이 이 영화를 어느 칸에 둘지 고민했으면 좋겠다고 봉준호 감독이 말했다는 확인되지 않는 말도 있긴 하죠. 분류 자체가 사실은 임의적입니다.


영화를 검색하며 더 알게 된 내용인데 이 영화를 비디오 가게에서 골라서 본 사람은 실제로 있었습니다. 송강호라는 배우인데요, 아주 재미있게 봤다고 밝혔더라고요. 영화를 본 다음 날 봉준호 감독을 만났는데 영화 잘 봤다고 했다는군요. 당시 둘은 초면도 아니었지만, 긴밀한 사이는 아니었다는 군요. 봉준호 송강호는 이후 살인의 추억, 괴물, 설국열차, 기생충에서 만나죠. 저에게도 송강호 같은 사람이 생길까요? 비디오 가게는 이제 사라졌지만, 집 근처 공립 도서관에는 제가 쓴 책이 들어와 있습니다. 물론 제가 신청했습니다. 저만 알아보는 일종의 이스터 에그입니다. 신간 서적 칸에 이 책이 빠져있지 않는 걸 자주 지켜봤죠. 그러다 누군가 빌려 간 사실을 확인하면 신기합니다. 이상한 놈 같다고요? 당신도 책을 써보면 독자가 궁금해질겁니다.


이 책을 준비하던 중 모 작가가 남 이야기 말고 자기 이야기를 먼저 써보라고 했습니다. 내 이야기를 쓰기. 내 이야기를 쓰기. 왜 써야 하는지, 쓰면 누가 볼 수 있는지 고민했습니다. 내 이야기가 나의 경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생각 이야기라면 이 책도 당연히 내 이야기입니다. 내 이야기가 필요한 이야기인지는 여전히 확신하지 못하지만 확신이 필요한가 싶기도 했습니다. 한 권의 책에서 저자가 확신을 가졌는지 보다 독자가 삶에 적용할 자원을 얻었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끝으로 아름다운 사람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지만, 책을 읽은 사람은 흔적을 남겼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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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없이 남의 책을 평하던 제가 책을 썼습니다.

그래서 많이 부끄럽네요.


저는 학교폭력을 겪고 이상한 결론이지만 교사가 된 사람입니다.

부모에게 돌봄을 박탈 당했고 남들이랑 관계를 잘 맺지도 못했습니다.

우울이나 약한 공황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의 이야기를 찾으려 많은 책을 뒤적였습니다.

그러다 글을 썼습니다.


저와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 말을 듣고 말을 했습니다.

제가 절박하게 알고 싶던 다른 몸들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나온 책이 《사이렌과 비상구》입니다.



제목이 사이렌과 비상구인 이유는 사이렌과 비상구가 필요한 사람들의 이야기면서, 누군가에게는 사이렌 울리고 비상구 돼줄 이야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나만 이렇게 살진 않는다는 감각을 말을 들으며 알았습니다.


ADHD 진단을 받은 교사, 코다로 부모를 돌봤던 청년, 소규모 동물단체 운영자, 정신질환이 있는 자녀를 돌보는 엄마, 전라북도에서 지방 교육의 변화를 마주한 초등교사, 지방에서 살다 서울로 이주한 논바이너리 레즈비언 당사자, 섭식장애가 있는 여성 청소년 등 교육-돌봄-몸을 아우르는 사람들을 만났어요.


하나의 정체성이나 이름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삶의 복잡한 맥락과 이야기들을 담았습니다.

이야기를 소재로만 삼거나 제가 다 안다며 대신 말하기보다는 본 맥락을 최대한 살리려 했지만, 여전히 남의 이야기를 전하려 했다는 원죄 의식이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목소리를 남겨준 분들의 선의와 공감을 핑계로 글을 계속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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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 2024-03-27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소 남겨주신 독서평들이 좋아서 제 독서 경험도 넓어졌는데 이렇게 책도 쓰셨다고 하니 꼭 읽어보겠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독서, 저자 활동해주세요 응원합니다!!

2024-03-27 23:49   좋아요 2 | URL
앗 저의 주절거림에 가까운 글이 도움이 되었다니 매우 기쁘네요. 부족한 글이라 창피하지만 소소하게라도 유익한 글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망가지기 쉬운 영혼들 - 우리가 무너진 삶을 회복하는 방식에 관하여
에리카 산체스 지음, 장상미 옮김 / 동녘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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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평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평가를 제가 다 알 수는 없지만요. 물론 좀 사소한 이야기도 있지만 일상에서 느끼는 ‘소수자 감정(마이너 필링스)‘과 자신의 몸과 관계를 통과하는 소수자성을 생각하는 글이 담긴 책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너무 내 이야기 같아서 뻔해 보이기도 했어요(좋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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