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22
정유정 지음 / 비룡소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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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거의 다 읽어가는 지점에서 가슴 속에 뭔가가 찡하게 울리더니, 끝내는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텅 빈 교실에서 이제 막 스프링 캠프의 여정을 끝낸 나는 그렇게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운동 선수들이 본격적인 시즌 개막을 앞두고 봄에 들어가는 합동훈련, 스프링 캠프.
그리고 우리의 인생에 있어 스프링 캠프는 다름 아닌, 우리의 학창 시절이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끝없는 배움의 시간에 놓여있었던 시간이니까. 어른이 되기 전의 시간 속에서.
 
어른이 된 오늘, 가끔씩 학창 시절이 떠오를 때는 그때의 추억이 문득 그립거나, 아니면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서 좀더 열심히 공부하며 살 걸, 하는 후회의 마음이 드는 순간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 때 좀더 즐기고, 좀더 공부할 걸 그랬다. 그때 좀더, 좀더 잘 했더라면 오늘 날 더 나은 순간을 맞이할 수도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운 미련이 가득 담긴 생각의 연장은 삶 속에 때때로 끼어든다.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은 자꾸 뒤돌아보지도 말며, 미련을 두지 않고 쿨하게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최고라는 걸 잘 알지만 그건 생각만큼 쉽지 않다. 어쩌면 나는 스프링 캠프때 얻은 것 보다 잃은 것이 더 많아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나는 공부도 열정적으로 하지 않았고, 노는 것도 열정적이지 않았다. 그저 평범한 학생으로만 머물러 있었을 뿐이다. 그나마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시간이 나를 조금 특별하게 만들어 주어서 다행이었다.
 
이야기는 김준호라는 주인공 소년과 정아, 승주, 할아버지, 개 루스벨트의 우연한 만남으로 시작된 우여곡절이 많은 모험담을 그리고 있다. 이들은 각자 자신만의 상처를 갖고 있으며, 스프링 캠프를 계기로 자신의 상처를 더욱 더듬어 보며 성장해 나간다.
주인공 소년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아버지의 행방불명과 엄마의 재혼으로 상처를 받았으며, 정아는 공부는 꽤 잘하는 우등생이지만, 개보다 못한 아버지의 폭행에 온몸과 마음이 상처로 얼룩졌다. 승주는 부모 나이 마흔에 태어난 부잣집 귀한 아들로 엄마의 지나친 보호때문에 피곤한 삶을 살고 있다. 한마디로 갑갑한 현실 속에서 상처받고 있는 아이였던 것. 그리고 할아버지는 누명을 쓰고 원래 살던 곳에서 도망쳐 살던 중에 누가 버린 딸을 키우게 되는데, 그 딸을 광주 항쟁때 잃고 만다. 그 딸은 할아버지에게 때때로 고기가 많이 잡히는 물길을 알려주기도 했던, 소중한 딸이였던 것. 그후 딸의 환상 속에서 남의 집 숭어 양식장에서 숭어를 잡다가 일이 꼬이게 되고, 할아버지는 친구의 농간에 속아 삼청교육대를 비롯, 미치지도 않았는데 정신병원에 수감된다. 그러던 어느 날 병원에서 탈출한다. 그리고 광주로 떠나는 트럭에 몰래 탄 준호와 정아, 승주, 루스벨트를 만나게 된다. (아, 루스벨트는 정아 집 개로 정아처럼 주인에게 늘 맞으며 살았었다. 이 역시도 상처받은 존재이다.)
 
상처는 불현듯, 예견하지 못한 사이에, 어쩌면 불길한 기운 속에서 혹은 아주 행복한 순간에 찾아오는 습성을 갖고 있다. 이렇게 우리가 피할 시간도 주지 않고 찾아오기에 우리는 상처를 고스란히 받을 수 밖에 없으며, 그 상처는 늘 쓰라린 고통을 동반한다.
 
지금까지 읽었던 청소년 소설 중에 정말 재밌게 읽었던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여기서 재미란 깔깔거리며 웃는 재미를 말한다. 그러니까 감동적인 이야기는 많았지만 웃기는 건 많이 없었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는 웃기면서 감동적인 이야기에 딱 들어맞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경쾌하면서도 감동적인 울림이 있는 완변한 연주였다. 정말 아이들이 기다렸던 이야기가 이제야 나왔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계절에서 출판되는 여러 청소년 문학도 아이들이 자주 접하고 있지만, 그건 웃기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저 잔잔한 감동만이 있을 뿐이다. 또는 깊은 성찰을 하게 만드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러한 잔잔함을 아이들은 지루함으로 여기기 쉽상이다. 빠르게 전개되는 이야기에 길들여진 아이들로서는 당연한 취향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여기서 '손도끼'와 이 책을 비교 하자면, 손도끼는 한 소년의 무인도 체류기를 그린 모험담으로 극복과 적응에서 오는 승리를 보여주면서 삶의 자세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 안에 웃음은 없다. 그래서 아이들은 그 책을 재밌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 소설 속 인물이 대단하다, 라고 평가할 뿐이다. 그렇기에 주인공은 실존인물이라기 보다는 영웅같은 가상인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더 나은 표현을 하는 아이도 있겠지만. 이런 점에서 스프링 캠프는 네 명의 인물이 힘든 순간을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힘을 통해 삶의 자세를 보게 하고, 더 나아가 그 과정에서의 진통을 웃음으로 그려나가고 있다. 그렇기에 아이들은 보다 현실적인 인물을 만날 수 있고, 그들의 솔직함에 웃기도 할 것이다. '내가 나인 것'의 가출 소년 히데카즈의 모험을 보고 공감하고 웃었던 것처럼. 그러고 보니, 일본 작가의 '내가 나인 것'의 주인공 소년 히데카즈와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의 준호를 보며 웃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솔직한 고백과 솔직한 행동 때문인듯 싶다. 물론 옆에서 움직여 주는 조연의 멋진 활약도 무시할 수 없다.
 
광주항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작가는 그것을 어른의 시선으로 본격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피해갔다. 광주항쟁은 그저 그들이 모험을 했던 며칠간의 짧은 시간 속의 배경으로만 자리할 뿐이다. 그렇다고 아예 광주항쟁에 대한 얘기를 거론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할아버지의 상처와 경찰을 피해다니는 형을 통해 광주항쟁의 비극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면서 소년의 시선 속에서 그들이 보고 느끼며 경험하는 세상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Y읍을 떠난 이래, 길과 산야를 전전하며 배운 것 중 가장 성취도가 뛰어난 학습은 바로 무언가를 넘어가는 일이었다. 다리를, 산을, 창문을, 울짱을, 담장을......'
 
"사람은 진구렁에 발을 딛고 있어도 눈으로는 별을 만져야 하는 거야."
 
'닥치는 대로 미워하고, 저주하고 혐오하고 증오하고 나자, 한 가지 의문만 남았다.
 나는 왜 이 길을 가고 있는 것일까.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푸름 마을을 지나오며 안개섬의 새벽을 생각했어. 우리가 봤던 낯선 것들, 아름다운 것들, 빛나는 것들, 아니 어떤 말도 그들을 칭하는 데 적당하지 않을 거야. 세상 깊숙한 곳에 숨어 있다가 조심스레 모습을 드러낸 같았던 그들을, 나는 그냥 '비밀'이라 부르기로 했어. 내 인생의 첫 비밀. 어쩌면 우리가 함께한 며칠은 우리 인생의 비밀을 찾아가는 법을 가르친 신의 특별한 수업이었는지도 몰라. 세상에는 신이 내 몫으로 정해 놓은 '비밀' 이 더 있을 거라고 생각해.' 
 
이제 막 스프링 캠프를 끝낸 우리, 본격적인 우리 인생의 시즌 개막을 위해 앞으로도 더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을 가지며 즐거이 달릴 일만이 남겨져 있다.
 
인생은 끝나는 순간까지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더 살 맛 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게임에서 지더라도 또 일어서며, 그렇게 즐기듯이 사는 게 인생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번 한 판 졌다고 포기하는 게 아니라, 더 달려들어서 다음 판은 이기도록 기를 써야 할 것이다. 물론 즐기는 자의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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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가 가출했다 힘찬문고 41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 지음, 한기상 옮김, 최정인 그림 / 우리교육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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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가 가출했다. 그랬다. 언니는 가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해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했다고 생각했기에, 언니는 다른 사랑을 찾아 집을 나갔다.
하지만 언니는 그곳에서도 외로웠다. 그래서 돌아온 언니는 여전히 혼자만의 공상 속에서 혼자만의 꿈을 꾼다. 그리고 그 꿈을 얘기한다. 진짜인 것처럼.
그렇게 언니는 사랑받지 못함으로 인해, 자신의 안에서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으며 아직도 현실 도피중이다.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 내가 참 좋아하는 동화 작가. 오이대왕, 머릿속의 난쟁이, 그 개가 온다. 깡통소년을 읽으면서 작가의 글에 푹 빠지고 말았다. 한마디로 어릴 적의 감성과 자유로운 상상력과 그것에서 오는 느낌을 마음에 품게 만드는 작가이다. 유쾌한 웃음으로 말이다.


 
언니가 가출했다,에서는 뇌스틀링거만의 독특한 유머의 발랄함이 없지만 한 소녀의 시선을 통해 힘 없는 소녀가 겪고 있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물론 엄마가 새 아빠와 재혼한 후 생긴 어린두 동생에 대한 이야기는 여전히 발랄해서 재밌다. 이야기의 감초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 셈. 아무튼 그냥 지나가는 인물이 없다. 모든 인물마다 성격과 그에 맞는 특징이 부여되는데,
이 때문에 뇌스틀링거 작품 속의 인물은 늘 살아 숨쉬는 생생한 이웃처럼 느껴진다.

부모의 이혼으로 인해서 상처 받는 아이들의 이야기는 이미 많은 동화에서 접해 왔다.
하지만 뇌스틀링거의 이야기는 같은 소재를 취하고 있으면서도
사뭇 진지하게 생각 할 수 있도록 만드는 힘이 있다.

부모의 이혼으로 세 할아버지와 세 할머니,엄마, 아빠, 새 아빠, 새 아빠의 전 부인, 일곱 명의 형제자매들을 갖게 된 에리카. 에리카는 현재 자신이 아빠로 부터도, 엄마로 부터도 관심어린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언니 역시 마찬가지여서 부모의 사랑은 진작에 포기하고 자신만의 상상 속에서 자신이 원하는 꿈을 꾸며 그 세계 속에 숨어 버린다. 물론 처음에는 배부른 일탈이라 생각했지만, 늘 위압적인 엄마 밑이라면 그럴만도 하다. 이해받을 수 없는 존재가 된다는 것 만큼 서글픈 일이 또 있을까. 그것도 엄마로부터. 그러다 한 남자를 만나 자신이 학생임을 숨기고 그 남자에게 사랑을 느끼고 짐을 싸서 피렌체로 가출을 한다. 이때 언니가 죽겠다고 하는 협박을 못이겨 가출을 도와주게 된 에리카는 심적 고통을 겪게 된다. 그나마 자신이 많이 사랑하는 언니의 가출은 에리카에게 있어서 큰 상처였을 것이다. 그런데 언니가 떠난 후, 언니가 한 말들이 하나 둘 씩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또 돌아온 언니의 입에서 나오는 가출 동안의 환상적인 이야기 역시 거짓말이라는 걸 알지만, 에리카는 믿는 척 해준다. 그래야 언니가 자기 곁에 머물거라 생각했을 지도. 불쌍한 에리카. 그런데 에리카는 그저 지금의 이 삶이 불안할 따름이다. 손에 잡히지 않는 삶, 늘 누군가를 떠나고 헤어지는 삶. 지금의 삶이 언제 또 다시 깨질지 그저 불안할 따름이다. 에리카에게 있어 세상은 화합이 아닌, 해체일 뿐이다. 그것도 일방적인.

엄마의 쉬운 폭력과 지나친 간섭, 통제. 어른이라는 이유로 그 힘을 행사하는 엄마에게 두 딸은 한 발 씩 뒤로 물러난다. 물론 엄마가 딸들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다.
그건 그 엄마의 사랑방식의 하나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딸들과 소통하지 못하고 일방적인 것이 되었기 때문에 딸들에게는
그 자체가 폭력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이혼가정. 이혼 가정의 아이들이 겪는 소외감, 불안감 등. 완전한 것을 다 배우기도 전에 불완전한 것들을 배워가며 일찍 철이 들고, 적응력을 키워야 하는 아이들은 사실 너무 힘들 것이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 해도, 아이들은 힘든 것이다. 미치도록.

어쩌면 언니는 또 가출을 할지 모른다. 아니면 이번에는 에리카가 가출을 할지도 모른다.

자신을 믿어주지 않고, 언제나 사랑에 대한 만족도는 불만에 가까우니까.
그리고 이제 아빠에게 있어 자신들이 불필요한, 반갑지 않은 존재라는 것도 알았으니까.

왜 태어난 걸까. 자꾸 자유롭고, 평범하게 사는 친구들의 집을 보게 되면서 겪게 되는 혼란.

그 속에서 자꾸 다른 것들만 발견 하게 되고, 자신만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되고, 그것 때문에 점점 마음이 힘든 아이.

가출 후에도 계속 되는 언니의 거짓말은 정말 충격 그 자체였다. 현실이 싫어서 상상 속으로 도망 칠 수밖에 없는 오늘. 그리고 그 현실을 현재 어른들이 어떻게 해결 해 줄 수 없는 오늘,
오늘이 암울하기만 한 두 소녀의 미래는 과연 어떤 색채일까?

어른들이 약한 어린아이들의 힘을 무시하지 않기를, 생각을 존중해주기를, 그리고 그들의 눈높이를 진정으로 이해해 줄 수 있기를, 어른과 어린아이가 아닌,
하나의 삶과 하나의 삶으로 소통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하나의 삶 속에서 행복하기를. 그야말로 꿈꿔본다.

 

행복한 가정은 멀리 있는 미지의 섬이 아니다. 바로 내 마음 속에 있는, 내가 만들 수 있는 우리의 섬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이건 어느 하나가 잘 해서 될 수 있는 게 아니라 모두의 의지가 필요하다. 바로 행복함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소통의 시간을 아끼지 않으며 함께하는 마음.
이게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섬 속에서 행복한 일상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에리카가, 일제가 생겨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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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거짓말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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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어떤 것이 진실이고 어떤 것이 거짓인지 모호한 순간을 만나게 될 때가 많다.

때로는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 거짓으로 들통 나 버리기도 하고, 거짓이라고 믿고 싶은 것이 불변의 진실로 안착될 때가 있다.

그 속에서 과연 어느 것을 믿고, 어느 것을 버릴 지 언제나 선택을 강요받기도 한다.

그런데 그 순간 '과연 이 세상에 확실한 것이 있기는 한 걸까?' 하는 회의적인 생각이 들 때면 금세 맥이 풀린다.

 

학창 시절에는 믿어 의심치 않았던 도덕 교과서 안의 내용은 어른이 되어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는 방해만 됐고,

음악 시간에 죽어라 연습해가며 불었던 파라 피리는 지금 어디에 박혀 있는지도 모르며, 앞으로도 그 피리는 불 일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가정 시간에 배웠던 것들은 까먹은 지 오래다. 그래서 남성들이 환상을 갖고 있는 스웨터는 물론이고 간단한 목도리도 뜨지 못하며, 그 쉽다는 십자수도 못한다. 바느질의 기본인 홈질도 여전히 비뚤비뚤한 모양이 나온다. 마치 아직도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는 나처럼, 바느질도 더 이상의 변화가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후회가 남는 선택을 하게 되는 것마냥 아무리 노력해서 바느질을 해도 그렇게 비뚤비뚤한 모양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한 때는 재봉틀 수업 시간에 눈이 번쩍 뜨이기도 했으나, 내 손과 머리는 도무지 재봉틀과 친해지지 않았다. 재봉틀만 있으면 뭐든 쉽게 반듯한 모양으로 재단을 할 수 있는데 말이다. 결국 누군가 내 손을 잡고 도와주겠다고 나타나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내 고집대로 밀고 나가다가 후회를 하게 되는 상황과 꼭 닮았다.

국어, 수학, 사회, 과학, 미술, 체육 등등...이들도 상황은 똑같다. 학창시절에 그렇게 국어만큼은 자신이 있었건만, 지금 애들이 푸는

국어 문제집을 보면 모르는 문제도 있다. 수학은 선생님이 '이거 안 하면 인간이 못 된다'고 했는데, 적어도 인간처럼은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알 수 없는 미래때문에 괜히 그 시간에 잘 풀지 못해서 스트레스만 받았다. 또 사회 시간에 암기했던 것도 공중분해된지 오래고, 과학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미술은 당시에는 열심히 했는데, 지금 내 그림 실력은 점점 유아적 수준으로 후퇴중이다.

체육은 그때나 지금이나 나의 체력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다. 아무리 열심히 뛰어도 그때나 지금이나 몸은 언제나 불만족스럽기 때문이다.

아무튼 과거에는 전부라 생각하고 매달렸던 것들이 오늘 날에는 모두 거짓이 되어 있다. 내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나침반 역할을 하기 보다는 과거에 더 열심히 못했다는 자책과 후회만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때는 받아들였던 것들이 지금은 왜 존재조차 하지 않는 것인지, 나는 도무지 알 수 없다. 

 

정이현의 '오늘의 거짓말'은 여러 단편이 들어있는 소설집으로, 그녀의 첫 소설집인 '낭만적 사랑과 사회' 와 비교했을 때

뭐가 더 나아지고, 뭐가 변화됐는지 판단을 흐리게 할 만큼, 모두가 흡인력이 강한 이야기였다. 그 결과 읽는 내내 '역시 정이현이야' 를 연발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녀의 글 속 주인공들은 대부분 외로운 자들이다.

결혼이라는 제도 속에서 튕겨져 나와 결혼 전처럼 고독한 생활을 하면서 소통되지 않는 맞선을 보기도 하고,

자신의 자리를 쉽게 찾지도 못하며 존재의 증발로 인해 가슴 뻐근함을 느끼기도 한다.

또 자신과 영원히 화해하지 못할 삶 속에서 자신의 의지가 아닌 남편 혹은 아들이 만든 소용돌이 속에서 덩달아 움직이며, 자신의 아픈 어금니는 끝내 들키지 못한 채 혼자 쓴웃음을 삼킨다.

어떤 때는 자신의 거짓말로 인해 외로움을 맛보기도 한다. 그야말로 진실과의 단절 속에서 오는 후유증이라고나 할까.

그런가 하면 어떤 남자는 자신의 정체모를 냄새로 인해 타인이 코를 움켜쥐는 걸 보며 극심한 외로움을 느낀다. 그들은 남자에게서 어떤 냄새가 나는 지 말해주지도 않고 그저 아무 냄새가 안 난다고 하면서 피하기만 했기 때문이다. 남자는 그저 뭐가 문제인 건지 진실을 알고 싶었는데 말이다.

한편 어떤 아이는 어지럽던 시절, 불의에 대항하며 사라져가는 어른과 불법을 일삼다가 사라진 엄마와의 이별을 안고 성장을 한다.

사라진 그들이 도대체 어디에 갔는지 소리쳐 묻고 싶지만, 뉴스조차도 그들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또 한 소녀는 어떤 것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세상에 말하지도 못한 채 자살로 위장되어 죽는다.

그리고 곧 마흔이 되는 여자들은 사랑이라 믿었던 남자에게 버림받고 정신 이상이 되거나, 아직 사랑하는 남자를 찾지 못해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삶을 살고 있다. 반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생활을, 연애를 하고 있는 여자들은 남편과의 잠자리 혹은 애인과의

스킨쉽이 불만족스럽다. 또 남편의, 애인의 일로 방황하지만 이내 그것을 받아들이고 현실에 합의한다.

이들은 모두 이미 저질러진 사건 앞에서의 유약한 인간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결국 그들은 사랑과 결혼, 일과 현실, 그리고 미래, 친구와 가족 사이에서 혼자만의 고민을 떠 안은 채 누구와도 열렬한 소통을 하지 못하며, 삶에도 만족하지 못한다. 그래도 그들은 끝까지 자신이 속한 현실을 지키며, 그 안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에는 최선을 다한다. 어느 것이 옳은 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그 모호함 속에서 용기를 내 보는 것이다. 삶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때로는 마음과 마음 사이 알맞은 거리를 측정하는 일이 몹시 어럽기도 하고, 견디지 못하는 것은 이 땅의 날씨가 아니라 나 자신이 될지라도 언제나 암묵적 합의에 동의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소설 속 인물들이 현실 속에서 어떠한 사건을 만나든 그 현실에 착한 학생처럼 안주하듯이 말이다. 어찌보면 그들은 자신이 피해자라고 말하면서도 마치 자신이 가해자인 것 마냥 고백하고 사죄하는 듯도 하다.

 

정이현 소설 속의 인물들은 이렇게 능동적이기 보다는 소극적인 수동성을 보이기 때문에 얼핏보면 삶 속에서 뒤쳐진 자들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그 모습은 때로는 안쓰러움으로 다가오기도 하며, 종국에는 나의 또다른 모습은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고 보니, 작가가 나이가 들긴 들었나 보다. 이번 작품집에서는 그녀의 밝음이 옅었던 것 같다. 물론 그녀만이 던질 수 있는 경쾌한 생각들은 이따금 얼굴을 내밀었으나 어둡고 톤이 다운된 저 밑을 더 많이 보여줬던 것 같다. 이런 걸 '성숙' 이라고 하겠지? 

나이가 들어간다는 건 그런걸까?

어렸을 적 동심을 점차 잃고 어느 순간부터 알건 다 알게 됐듯이,

설렘만으로 출렁일 것 같던 미래가 부조리하다는 것을 알게 됐듯이,

그렇게 삶은 하나 둘씩 부담스러운 한숨의 짐을 업게 되는지도 모른다.

그 속에서 어떤 이는 진짜 진실을 찾아갈 것이고, 어떤 이는 거짓에 기댈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이가 아닌 나는, 여전히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방황하며 어느 것이 나에게 유리할지 잔머리를 굴리느라 바쁠 것이다.

때로는 내가 하는 거짓말은 모두 선의의 거짓말이라고 변명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나의 '오늘의 거짓말'은 계속 될지도 모르겠다.

조심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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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피부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1
알베르트 산체스 피뇰 지음, 유혜경 옮김 / 들녘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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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가 참 강한 소설이다.

고독과 두려움을 통해 인간의 숨겨진 욕망의 잔인성을 폭로함과 동시, 그 욕망을 다스려줄 사랑의 구원성을 보여주는 이야기. 그렇다면 이야기는 과연 희망적인가?

차가운 피부, 제목만 보고서는 인간의 냉정함을 차가움에 빗댄 것일지도 모른다고 짐작했었다.

현대 사회는 그만큼 차가운 인간들로 넘쳐나고 있고, 차가운 인간들마저도 따뜻한 인간을 그리워하고 있다. 그 속에는 언제나 서로가 적으로 싸워야 하는 고독한 현실이 자리하고 있으며, 더이상 잃을 것이 없는 자가 오히려 가진 것이 많아서 잃을 것이 많은 자보다 더 여유로운 현실을 보내는 아이러니도 생겨난다.

그러고 보면 인간은 참 잔인한 본성을 갖고 있는 것도 같다. 한 마디로 자신을 해치려 하는 존재에 대해서 만큼은 무자비할 정도의 잔인성을 드러낸다.

하지만 이러한 잔인성은 외로움에서 비롯된다.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욕심을 지닌 자의 외로움, 혹은 가진것이 없어서 드리워진 외로움.

 

무인도라는 공간 설정은 그동안 여러 책을 통해 만나봤기에, 솔직히 읽기 전에 약간 얕보기도 했다. 하지만 차가운 피부는 정말이지 기존의 무인도 이야기가 승리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냈다면,

패배하는, 또 그 패배를 인정하는 인간의 나약함을 그리고 있다. 그렇기에 패배의 시간이 찾아올 것을 알면서도 싸울 수 밖에 없는 그들의 상황이 애처롭다. 그래서 연민을 느끼게 만든다. 또한 그렇기에 그들의 사랑행위가 절실해보인다. 생의 마지막에 허락된 기회처럼. 그 순간만큼은 그들은 두려움에 떠는 나약한 인간도 아니고, 전쟁 속에서 잔인성을 보이는 비인간적인 괴물도 아니다.

결국 누구나 사랑을 통해 회생 가능성이 있음을 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사랑 또한 완전한 소통에 실패하면 그 또한 전쟁이 되고 만다. 그러고 보면 인간사, 정말 쉬운 게 하나도 없다.

존재함과 존재하지 않음에는 어떤 명확한 선이 있는 걸까? 존재함이 끈질긴 두려움의 연속이라면 차라리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의 평온을 꿈꿔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물론 두려움의 상황 속에서도 계속 살고자 안간힘을 쓰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은 현실의 두려움보다 현실에서의 존재불가 상태를 더 두려워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끝없이 살고자 치열하게 싸운다.

 

무인도에 나타난 괴상한 생명체, 그리고 매일 밤 이어지는 그들과의 전투. 여기서 누군가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반드시 누군가는 죽어야 한다는 법칙이 성립된다. 서로를 절대 악으로 생각하고 시작하는 싸움은 평화라는 단어를 거부한다. 오직 평화를 위한 협상과 양보가 정답인데 말이다.

어디든 내 영토, 내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인간의 정복에 대한 욕구는 언제나 전쟁을 만들어 낸다.

또한 나와 다름의 상태로 현존하는 것에 대한 불신은 하늘을 찌를 정도로 높다. 나와 다르기 때문에 벽을 쌓고, 그들과의 교섭과 소통을 완전히 피한다. 그래도 그들이 다가오면 그들을 없애기 위한 전투를 시작한다.

하지만 이야기에서도 드러나듯이 나와 다른 존재도 소통을 꾀하면서 그 존재만의 매력을 인지하게 되면, 그 순간 얼마든지 하나가 되길 꿈꿀 수 있는 것이다. 나와 동일하게 존재함으로써.

이 땅은 어딜가나 다 전쟁이다. 부모들이 하는 교육중에 "어디가서 맞고 들어오지 말아라. 하지만 때리고 들어오는 건 괜찮다." , "네 밥그릇은 꼭 잘 챙겨라." , "이상한 애와는 어울리지 말아라." 등등. 개인위주의 삶을 교육한다. 그런 아이가 자라서 전쟁놀이의 핵심이 되는 것일지도.

그러니까 이제는 싸워라, 이겨라, 너만 생각해라, 가 아닌 소통해라, 화합해라, 함께해라, 라고 가르쳐야 할 것이다. 

차가운 피부, 오감을 자극하며 그 사건을 체험하게 만든다. 그래서 책의 마지막 문장을 읽을 때는 피로감마저 느껴진다. 그만큼 흡인력이 강하다. 내가 주인공의 내면에 끼어들어서 그의 행동에 따라 사고하며 움직인다. 이때 주인공의 내면 속에 침투한 나는 주인공의 생각과도 일치한다. 그러다 보니 어느 지점에서는 내가 주인공인지, 주인공이 나인지 그 경계가 모호해진다.

이야기의 매력은 바로 이런것이 아닐까? 나를 완전히 잊고 다른 이의 삶을 경험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는 것. 한 마디로 또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선물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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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가 사랑한 수식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수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잠재된 피해의식이 많은 탓에 제목만 보고, '에잇!' 했던 책.
중학교 퀴즈 필독서라는데, 또 재미없는 책만 신청하게 됐다고 생각했다. (수학책인줄 알았음)
그런데 막상 신청해서 도착한 책을 살펴보니, 숫자가 얼핏 보이기는 해도 왠지 와 닿는,
읽어야 할 것 같은 책이 되어 버렸다.
우선 읽기 전에 나름 애지중지하는 아이에게 이 책을 권했더니, 책을 다 읽은 아이가 말하길,
'책에 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요. 정말 재밌어요.' 였다. 그래서 나도 읽겠다고 하니,
더 좋아하며 책에 대한 이야기를 주저리 늘어놓는다.
 
정말 그랬다.
이야기는 독특한 경험을 통해 새로운 시선을 형성하게 했고, 그렇게 새로운 만남을 만들었다.
 
교통사고로 80분 밖에 기억하지 못하는 수학박사.
어느 날 파출부인 '나'가 수학박사의 집에서 일을 하게 되고, 박사를 알게 된다.
게다가 아이라면 끔찍하게 소중히 여기는 박사는 파출부의 아들을 루트라고 부르며 좋아한다.
야구에서 한신팀 팬인 루트는 박사와 야구장에도 다니며, 박사의 기억 속에 남은 선수를 얘기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어쩌면 미혼모인 파출부는 박사를 정신적 남편 혹은 부재하는 아버지로 여기며 정성으로 대했을 것이다. 그리고 루트도 박사를 자신에게 부재하는 아빠로, 할아버지로 여기며 잘 따르며 이해했을 것이다.
 
수에 대한 박사의 사랑, 이해, 집중력, 헌신, 인내...
기억을 잃은 순간에도 뭔가를 사랑하며 생을 살 수 있다는 건, 큰 축복이 아닐까.
물론 아침에 일어나서 '나는 80분 밖에 기억을 하지 못한다.' 라는 옷에 붙은 메모를 보며
박사는 울지만, 그는 다시 수에 집중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자신이 사랑하는 수를 한없이
풀어가며 사랑해 준다.
 
파출부의 잔잔한 음성이 무엇보다 좋았던 책.
그리고 어린 애같은 박사의 모습이 무엇보다 순수하고 믿음직스러워서
호감이 끊이질 않았던 책. 루트의 어른스러움...이들 셋이 수로 인해 이야기 하는 시간 등.
이야기는 잔잔하면서 일상을 환기시켜주는 은근한 강인성을 지니고 있다.
 
이야기의 숨은 이야기는 박사의 형수인 안 채에 사는 미망인인데,
박사의 형이 죽자 박사와 사랑하는 사이로 지내게 된다. 둘이 다정하게 찍은 사진이,
사랑하는 미망인에게 바치는 박사의 논문이 그것을 말해준다.
하지만 미망인은 박사와 교통사고가 난 이후, 지팡이를 의지하며 늙어갔고...
박사는 30살까지만 기억하고 그 후의 시간은 매 80분 단위로 경험하고,
다시 삭제, 영영 잊어버린다. 이에 대한 대책은 메모를 해서 클립으로 옷에 붙여두는 것.
그 후 미망인은 박사를 별채에 둔 채 파출부를 둔다. 물론 박사가 쉬운 상대는 아니여서
파출부는 번번이 바뀐다. 한편 미망인은 박사와 가까이 지내는 '나' 를 질투해 그녀를 잠시 해고 하기도 한다. 다행히 박사와 계속 연결된 루트로 인해 다시 만남을 갖게 되고, 박사가 미망인과 '나'의 다툼을 종지부 찍기 위해 수식을 내미는 순간, 미망인은 다시 '나'를 고용한다. 후에는 박사가 기억이 더 어려워지자 박사는 요양원에 가게 되고, 그때는 미망인이 그의 곁에서 함께 있는다. '나'는 박사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박사가 죽기 전까지도 병원에서 만남을 유지하면서 아들이 수학선생님이 됐다는 소식도 들려준다. 이때 몰려오는 감동이란...코끝이 시큰했다.
박사의 집에서 해고됐을 때, 더는 박사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고 똑같은 일상을 시작할거라는 생각에 '나'는 괴로워 하기도 한다.
정말 내가 기억하는 소중한 뭔가를 상대가 잊는다고 생각할 때, 그 때의 허전함은 짐작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내 존재가 그렇게 쉽게 잊혀진다는 상황을 현실로 만나게 될 때, 그때만큼 외롭고 허무할 때도 없을 테니까. 또 두려울 것도 같다. 홀로 선 듯한 느낌. 상대의 기억 속에서 지워진 내가 과연 세상에 존재할까, 하는 물음과 함께 존재가 미미해질것도 같고... 
 
무엇보다 신의 수첩에나 존재하는 수학을, 그 수를 진정으로 예우하며 사랑했던 박사.
그리고 아이를 사랑하고, 상대에 대해 감사하고, 미안해 할 줄 알았던 박사.
80분 단위마다 기억을 쌓고, 다시 잃기를 반복하면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던 박사.
오히려 80분이라는 시간을 더운 여름에도 방에 꼼짝않고 앉아 수를 연구했던 박사.
언제나 그렇게 자신의 틀 속에서 최선을 다 한 남자.
그가 80분이라는 시간을 살아낼 수 있었던 건 다름아닌, 진리에 대한 사랑일 것이다.
물론 수 속에 갇혀 그것만 생각하고, 그것으로만 말하는 그가 좀 안됐다는 생각도 든다.
밖에 나가서 바람도 쐬고, 좀더 좋은 곳을 바라보며 살 수 있다면 더 좋을텐데, 하고...
하지만 누구나가 저마다의 삶의 방식이 존재한다.
'저 사람은 저렇게 사네, 왜 그러는 걸까?' 하는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은 저렇게 살아가고 있구나, 그것도 가치있는 일인 걸.' 하는 시선이
무엇보다 아름다운 건 아닐지, 생각해 본다.
 
 
나에게 박사처럼 80분만 재생되고 바로 삭제되는 기억이 존재한다면
나는 그 순간 무엇을 하고 있을까.
매 순간 자신이 열정을 다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존재할 수 있는 나를 꿈꾸며,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떠올려보는 중요한 시간이었다.
박사가 수식을 사랑했다면, 나는 글을 사랑하고, 사랑하는 그것을 위해 박사처럼
글을 더 존중하고, 글 앞에서 겸손하며, 열정을 다 해야 할 것이다.
내 모든 생각을, 내 모든 노력을...내 모든 것을 그 앞에 헌신할 때,
나 또한 박사처럼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 있지는 않을까.
그리고 그런 내 곁에 파출부 '나' 처럼 나를 이해하고, 함께 같은 곳을 보며 그것의
아름다움을,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삶이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이해해주는 동지가 있을 때, 더 든든해지는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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