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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소녀를 사랑하다 ㅣ 올 에이지 클래식
낸시 가든 지음, 이순미 옮김 / 보물창고 / 200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여고 시절, 교내에서 은밀하게 돌던 소문이 하나 있었다. 바로 누구와 누구가 선생님들 주차장에서 키스를 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그 애들은 우리 보다 더 성숙했던 걸로 기억한다. 외모며, 옷맵시며, 두루두루. 그때 나는 그 소문을 듣고, 그 모습을 상상하면서도 사실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는 사랑이란 남자와 여자와의 관계 안에서만 성립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 소문의 주인공인 아이들을 보면 '레즈비언' 이라는 낯선 단어를 떠올리며 호기심 어린 시선을 던졌었다. 그러다 몇 달 전, 버스 안에서 어린 '레즈비언' 커플을 실제로 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둘의 취향보다는 행동이 기본 매너에 어긋났기에 눈살만 잔뜩 찌푸렸을 뿐이었다.
지금은 나이를 하나 둘 더해가면서 드는 생각이 어느 것이든 확실하게 단정지을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내 생각은 이렇거든, 하고 단정짓는 순간 그 생각 속에 갇히고 만다는 생각에 슬슬 겁나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고, 내 생각에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아서 도피형으로 뒤로 물러서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또 생각이라는 게 때론 변하기도 하기 때문이리라. 아마 지금 이런 말을 쓰고 있는 것도 이 책이 말하고 있는 내용에 대해 다소 혼란스러움을 느끼고, 때론 나 자신의 솔직한 심정에 적잖이 당황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이야기는 소녀와 소녀의 사랑을 사실적으로 잘 그려나가고 있다.
소녀와 소녀의 사랑. 청소년 소설이라는 장르 속에서는 정말 용기있는 소재의 선택이었고, 글의 기능을 잘 해냈다고 생각한다. 리자와 애니의 첫만남에서부터 사랑의 진실을 더이상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사랑을 고백하는 마지막 장면까지, 나는 이를 지켜보며 가슴 따뜻한 감동까지 받았으니 말이다.
굳이 '레즈비언'을 편들 생각은 없지만, 그들을 비난할 생각도 없다.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고, 모두가 다양한 생각을 하며 자신의 삶을 가치있게 보내기 위해 움직인다. 사랑의 방식도 마찬가지이다. 누구나 똑같은 사랑을 할 수 없으며, 사랑은 그 자체로 행복하기 때문에 계속 이어나가는 아름다운 감정인 것이다.
하지만 사회는 동성간의 사랑은 마녀사냥이라도 하듯 심판하고 억압하려 든다. 그래서 문득 동성간의 사랑이 확산되면 새로운 생명이 탄생되지 않기 때문에 그런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물론 이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은 나와는 다른 모습의 존재를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들때문이겠지만 말이다. 언제나 답답한 목줄같은 것을 사람들의 의식에 채우려 달려드는 사회의 편견이 이제는 정말 지긋지긋하다. 사랑도 '사랑' 그 자체로 보지 않고 능력을 내세운 돈으로 판가름하는 것도 싫고, 정해진 구닥다리 규범을 비롯해 다수의 사람을 하나의 가치관 속에 묶어두려는 그 생각이 정말 싫은 것이다. 물론 내가 아무리 싫다고 해도 이런 답답한 현실은 개선되지 않을 것이다. 이미 돌이키기에는 썩어온 시간이 더 많은 것이다. 그러니 일단은 그 현실이 싫은 사람부터라도 의식을 전환해야 할 것이다.
똥묻은 개가 되지 않기 위해.
이 책을 읽으면서 리자와 애니의 사랑이 깊어질수록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지만, 일단은 이야기의 배경이 한국이 아니라는 것을 감안하면서도 이 땅에서 이러한 것들로 고민하고 있을 아이들도 있을 거라는 생각에 이야기를 이야기로만 읽을 수가 없었다.
나야 리자와 애니의 사랑을 인정해주고 싶다. 리자가 어서 편지를 완성해서 기다리고 있을 애니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빨리 어루만져주길 바랐으니까.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만약에 나중에 내 아이가 동성애를 하게 된다면 나는 어떨 것인가? 아마 리자의 부모와 똑같은 모습을 보이게 될 것 같다. 그렇다면 결국 내 문제가 아닌, 타인의 일이므로 제 3자로서 묵인이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그래서 혼란스러웠던 것이다. 이해는 하는데, 내 이야기가 됐을 경우는 거부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하기가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지금은 처음보다는 낫다. 아직 내게 이런 상황이 다가온 것도 아니고, 그 일은 차후의 문제이고, 좋다면 나라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또 그들을 벌레처럼 바라보는 시선 쪽에 서 있는 것이 아닌, 이해하는 입장에 서 있는 것만큼은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소년 아이들이 이 책을 읽고 어떤 생각을 하게 될 지 무척 궁금해 졌다. 물론 내가 아는 유형의 부모들은 이 책을 반가워 할 것 같지는 않다. 그들은 오로지 아이들의 학업과 연장된 독서만을 최고로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모들은 알아야 할 것이다. 아이들에게 숨길 수 있는 이야기란 없다는 것을. 오히려 아이들이 이야기로 현실을 간접적으로 만나고 자신의 의식을 형성할 수 있도록 자율의지를 주는 것이 더 좋은 교육이라는 것을 말이다. 청소년 시기가 되면 정체성으로 인한 고민을 하기도 하지만 아이들은 어른 못지 않게 생각할 줄 알고, 그것을 토대로 가치관을 형성하기도 하고, 열린 생각과 마음을 얻기도 한다. 그러니까 내 아이를 특색없는 공부만 잘 하는 아이로 만들 것인지, 스스로 생각하면서 자유롭게 커가는 창의적인 인물로 만들 것인지는 부모에게도 달려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답답한 사회는 보수적인 부모로 인해 되물림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소녀, 소녀를 사랑하다>가 조심스러운 소재인만큼 청소년들에게 동성간의 사랑이 참 아름답다는 환상만을 주기 보다는 그들에게 사랑의 다양성과 존중의 자세를 깨닫게 하고, '사랑'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을 만들어 주기를 바란다. 그로 인해 편견의 눈을 씻을 수 있게 해주기를.
사랑하는데 사랑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참 잔인한 일인 것이다.
나는 내 영혼의 선장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