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피부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1
알베르트 산체스 피뇰 지음, 유혜경 옮김 / 들녘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미지가 참 강한 소설이다.

고독과 두려움을 통해 인간의 숨겨진 욕망의 잔인성을 폭로함과 동시, 그 욕망을 다스려줄 사랑의 구원성을 보여주는 이야기. 그렇다면 이야기는 과연 희망적인가?

차가운 피부, 제목만 보고서는 인간의 냉정함을 차가움에 빗댄 것일지도 모른다고 짐작했었다.

현대 사회는 그만큼 차가운 인간들로 넘쳐나고 있고, 차가운 인간들마저도 따뜻한 인간을 그리워하고 있다. 그 속에는 언제나 서로가 적으로 싸워야 하는 고독한 현실이 자리하고 있으며, 더이상 잃을 것이 없는 자가 오히려 가진 것이 많아서 잃을 것이 많은 자보다 더 여유로운 현실을 보내는 아이러니도 생겨난다.

그러고 보면 인간은 참 잔인한 본성을 갖고 있는 것도 같다. 한 마디로 자신을 해치려 하는 존재에 대해서 만큼은 무자비할 정도의 잔인성을 드러낸다.

하지만 이러한 잔인성은 외로움에서 비롯된다.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욕심을 지닌 자의 외로움, 혹은 가진것이 없어서 드리워진 외로움.

 

무인도라는 공간 설정은 그동안 여러 책을 통해 만나봤기에, 솔직히 읽기 전에 약간 얕보기도 했다. 하지만 차가운 피부는 정말이지 기존의 무인도 이야기가 승리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냈다면,

패배하는, 또 그 패배를 인정하는 인간의 나약함을 그리고 있다. 그렇기에 패배의 시간이 찾아올 것을 알면서도 싸울 수 밖에 없는 그들의 상황이 애처롭다. 그래서 연민을 느끼게 만든다. 또한 그렇기에 그들의 사랑행위가 절실해보인다. 생의 마지막에 허락된 기회처럼. 그 순간만큼은 그들은 두려움에 떠는 나약한 인간도 아니고, 전쟁 속에서 잔인성을 보이는 비인간적인 괴물도 아니다.

결국 누구나 사랑을 통해 회생 가능성이 있음을 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사랑 또한 완전한 소통에 실패하면 그 또한 전쟁이 되고 만다. 그러고 보면 인간사, 정말 쉬운 게 하나도 없다.

존재함과 존재하지 않음에는 어떤 명확한 선이 있는 걸까? 존재함이 끈질긴 두려움의 연속이라면 차라리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의 평온을 꿈꿔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물론 두려움의 상황 속에서도 계속 살고자 안간힘을 쓰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은 현실의 두려움보다 현실에서의 존재불가 상태를 더 두려워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끝없이 살고자 치열하게 싸운다.

 

무인도에 나타난 괴상한 생명체, 그리고 매일 밤 이어지는 그들과의 전투. 여기서 누군가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반드시 누군가는 죽어야 한다는 법칙이 성립된다. 서로를 절대 악으로 생각하고 시작하는 싸움은 평화라는 단어를 거부한다. 오직 평화를 위한 협상과 양보가 정답인데 말이다.

어디든 내 영토, 내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인간의 정복에 대한 욕구는 언제나 전쟁을 만들어 낸다.

또한 나와 다름의 상태로 현존하는 것에 대한 불신은 하늘을 찌를 정도로 높다. 나와 다르기 때문에 벽을 쌓고, 그들과의 교섭과 소통을 완전히 피한다. 그래도 그들이 다가오면 그들을 없애기 위한 전투를 시작한다.

하지만 이야기에서도 드러나듯이 나와 다른 존재도 소통을 꾀하면서 그 존재만의 매력을 인지하게 되면, 그 순간 얼마든지 하나가 되길 꿈꿀 수 있는 것이다. 나와 동일하게 존재함으로써.

이 땅은 어딜가나 다 전쟁이다. 부모들이 하는 교육중에 "어디가서 맞고 들어오지 말아라. 하지만 때리고 들어오는 건 괜찮다." , "네 밥그릇은 꼭 잘 챙겨라." , "이상한 애와는 어울리지 말아라." 등등. 개인위주의 삶을 교육한다. 그런 아이가 자라서 전쟁놀이의 핵심이 되는 것일지도.

그러니까 이제는 싸워라, 이겨라, 너만 생각해라, 가 아닌 소통해라, 화합해라, 함께해라, 라고 가르쳐야 할 것이다. 

차가운 피부, 오감을 자극하며 그 사건을 체험하게 만든다. 그래서 책의 마지막 문장을 읽을 때는 피로감마저 느껴진다. 그만큼 흡인력이 강하다. 내가 주인공의 내면에 끼어들어서 그의 행동에 따라 사고하며 움직인다. 이때 주인공의 내면 속에 침투한 나는 주인공의 생각과도 일치한다. 그러다 보니 어느 지점에서는 내가 주인공인지, 주인공이 나인지 그 경계가 모호해진다.

이야기의 매력은 바로 이런것이 아닐까? 나를 완전히 잊고 다른 이의 삶을 경험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는 것. 한 마디로 또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선물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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