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가 사랑한 수식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수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잠재된 피해의식이 많은 탓에 제목만 보고, '에잇!' 했던 책.
중학교 퀴즈 필독서라는데, 또 재미없는 책만 신청하게 됐다고 생각했다. (수학책인줄 알았음)
그런데 막상 신청해서 도착한 책을 살펴보니, 숫자가 얼핏 보이기는 해도 왠지 와 닿는,
읽어야 할 것 같은 책이 되어 버렸다.
우선 읽기 전에 나름 애지중지하는 아이에게 이 책을 권했더니, 책을 다 읽은 아이가 말하길,
'책에 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요. 정말 재밌어요.' 였다. 그래서 나도 읽겠다고 하니,
더 좋아하며 책에 대한 이야기를 주저리 늘어놓는다.
 
정말 그랬다.
이야기는 독특한 경험을 통해 새로운 시선을 형성하게 했고, 그렇게 새로운 만남을 만들었다.
 
교통사고로 80분 밖에 기억하지 못하는 수학박사.
어느 날 파출부인 '나'가 수학박사의 집에서 일을 하게 되고, 박사를 알게 된다.
게다가 아이라면 끔찍하게 소중히 여기는 박사는 파출부의 아들을 루트라고 부르며 좋아한다.
야구에서 한신팀 팬인 루트는 박사와 야구장에도 다니며, 박사의 기억 속에 남은 선수를 얘기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어쩌면 미혼모인 파출부는 박사를 정신적 남편 혹은 부재하는 아버지로 여기며 정성으로 대했을 것이다. 그리고 루트도 박사를 자신에게 부재하는 아빠로, 할아버지로 여기며 잘 따르며 이해했을 것이다.
 
수에 대한 박사의 사랑, 이해, 집중력, 헌신, 인내...
기억을 잃은 순간에도 뭔가를 사랑하며 생을 살 수 있다는 건, 큰 축복이 아닐까.
물론 아침에 일어나서 '나는 80분 밖에 기억을 하지 못한다.' 라는 옷에 붙은 메모를 보며
박사는 울지만, 그는 다시 수에 집중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자신이 사랑하는 수를 한없이
풀어가며 사랑해 준다.
 
파출부의 잔잔한 음성이 무엇보다 좋았던 책.
그리고 어린 애같은 박사의 모습이 무엇보다 순수하고 믿음직스러워서
호감이 끊이질 않았던 책. 루트의 어른스러움...이들 셋이 수로 인해 이야기 하는 시간 등.
이야기는 잔잔하면서 일상을 환기시켜주는 은근한 강인성을 지니고 있다.
 
이야기의 숨은 이야기는 박사의 형수인 안 채에 사는 미망인인데,
박사의 형이 죽자 박사와 사랑하는 사이로 지내게 된다. 둘이 다정하게 찍은 사진이,
사랑하는 미망인에게 바치는 박사의 논문이 그것을 말해준다.
하지만 미망인은 박사와 교통사고가 난 이후, 지팡이를 의지하며 늙어갔고...
박사는 30살까지만 기억하고 그 후의 시간은 매 80분 단위로 경험하고,
다시 삭제, 영영 잊어버린다. 이에 대한 대책은 메모를 해서 클립으로 옷에 붙여두는 것.
그 후 미망인은 박사를 별채에 둔 채 파출부를 둔다. 물론 박사가 쉬운 상대는 아니여서
파출부는 번번이 바뀐다. 한편 미망인은 박사와 가까이 지내는 '나' 를 질투해 그녀를 잠시 해고 하기도 한다. 다행히 박사와 계속 연결된 루트로 인해 다시 만남을 갖게 되고, 박사가 미망인과 '나'의 다툼을 종지부 찍기 위해 수식을 내미는 순간, 미망인은 다시 '나'를 고용한다. 후에는 박사가 기억이 더 어려워지자 박사는 요양원에 가게 되고, 그때는 미망인이 그의 곁에서 함께 있는다. '나'는 박사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박사가 죽기 전까지도 병원에서 만남을 유지하면서 아들이 수학선생님이 됐다는 소식도 들려준다. 이때 몰려오는 감동이란...코끝이 시큰했다.
박사의 집에서 해고됐을 때, 더는 박사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고 똑같은 일상을 시작할거라는 생각에 '나'는 괴로워 하기도 한다.
정말 내가 기억하는 소중한 뭔가를 상대가 잊는다고 생각할 때, 그 때의 허전함은 짐작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내 존재가 그렇게 쉽게 잊혀진다는 상황을 현실로 만나게 될 때, 그때만큼 외롭고 허무할 때도 없을 테니까. 또 두려울 것도 같다. 홀로 선 듯한 느낌. 상대의 기억 속에서 지워진 내가 과연 세상에 존재할까, 하는 물음과 함께 존재가 미미해질것도 같고... 
 
무엇보다 신의 수첩에나 존재하는 수학을, 그 수를 진정으로 예우하며 사랑했던 박사.
그리고 아이를 사랑하고, 상대에 대해 감사하고, 미안해 할 줄 알았던 박사.
80분 단위마다 기억을 쌓고, 다시 잃기를 반복하면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던 박사.
오히려 80분이라는 시간을 더운 여름에도 방에 꼼짝않고 앉아 수를 연구했던 박사.
언제나 그렇게 자신의 틀 속에서 최선을 다 한 남자.
그가 80분이라는 시간을 살아낼 수 있었던 건 다름아닌, 진리에 대한 사랑일 것이다.
물론 수 속에 갇혀 그것만 생각하고, 그것으로만 말하는 그가 좀 안됐다는 생각도 든다.
밖에 나가서 바람도 쐬고, 좀더 좋은 곳을 바라보며 살 수 있다면 더 좋을텐데, 하고...
하지만 누구나가 저마다의 삶의 방식이 존재한다.
'저 사람은 저렇게 사네, 왜 그러는 걸까?' 하는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은 저렇게 살아가고 있구나, 그것도 가치있는 일인 걸.' 하는 시선이
무엇보다 아름다운 건 아닐지, 생각해 본다.
 
 
나에게 박사처럼 80분만 재생되고 바로 삭제되는 기억이 존재한다면
나는 그 순간 무엇을 하고 있을까.
매 순간 자신이 열정을 다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존재할 수 있는 나를 꿈꾸며,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떠올려보는 중요한 시간이었다.
박사가 수식을 사랑했다면, 나는 글을 사랑하고, 사랑하는 그것을 위해 박사처럼
글을 더 존중하고, 글 앞에서 겸손하며, 열정을 다 해야 할 것이다.
내 모든 생각을, 내 모든 노력을...내 모든 것을 그 앞에 헌신할 때,
나 또한 박사처럼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 있지는 않을까.
그리고 그런 내 곁에 파출부 '나' 처럼 나를 이해하고, 함께 같은 곳을 보며 그것의
아름다움을,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삶이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이해해주는 동지가 있을 때, 더 든든해지는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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