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퀸 : 적혈의 여왕 1 레드 퀸
빅토리아 애비야드 지음, 김은숙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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칙릿 + 판타지


내가 좋아하는 판타지 소설에는 공통점이 있다.

일단 주인공이 13~19살 사이의 청소년 여자여야 하고, 그녀를 중심으로 여러 남자들이 있다.

그런 점에서 '트와일라잇', '섀도우 헌터스', '헝거게임', '다이버전트' 등이 일맥상통하다.

위의 소설들을 모두 원작도서와 영화 시리즈로 접하였으며, 소장하고 있는 도서도 많다.

반면 소녀가 성장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가 아닌 '나니아 연대기', '반지의 제왕', '호빗' 시리즈가 조금 재미없기도 하다.


'레드 퀸 : 적혈의 여왕' 은 어떠한가?

딱 내가 좋아하는 소녀 주인공에 소녀 주변으로 많은 남자들이 있다.

최소 2명 이상의 남자들, 완벽하다.

작가가 피터 잭슨, J. R. R. 톨킨, C. S. 루이스, J. K. 롤링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내 맘에 쏙 드는 소설이다.


주인공 메어 배로우는 십대 소녀로, 그녀 주변에는 킬런 워렌이라는 친구가 있다.

마치 '헝거게임' 에서 그랬듯이 그녀는 킬런을 친구로만 생각하지만 애틋한 감정이 많아 계속해서 도와준다.

그런가하면 약혼자이자 왕자인 메이븐이 있다.

비록 왕과 왕비에 의한 전략적 결혼이기는 해도 메이븐에게 감화를 받아 그를 진정으로 아낀다.

그런데 여기서 '트와일라잇' 의 벨라보다 더 한 상황이 나타난다.

적혈의 마을에서 처음 본 왕세자 칼과 운명적으로 끌리게 되고 그 감정을 어찌할 수 없다.

칼에게는 약혼자 에반젤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다고 해서 메어 배로우가 벨라처럼 욕을 먹어야 하냐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왜냐하면 메이븐은 처음부터 그녀를 이용할 목적이었기에 그녀의 러브라인에서 제외된다.

메어가 사랑하는 사람은 오직 칼인것처럼 묘사된다.




그는 문틀에 기대면서 웃음을 터뜨린다. 하지만 그의 발은, 마치 그럴 수 없는 것처럼 결코 내 방에 들어오지 않는다. 아니면 그러면 안 된다는 듯이. 너는 칼의 동생의 아내가 될 거잖아. 그리고 그는 이제 전쟁터로 갈 거고. 


레드 퀸 : 적혈의 여왕 II  p. 30



그가 내 손을 잡고는 나를 자신에게로 끌어당긴다. 그는 자신의 유일한 동생을 배반하고 있다. 나는 나의 조직, 메이븐, 심지어 나 자신까지도 배반하고 있지만, 멈추고 싶지 않다.


레드 퀸 : 적혈의 여왕  II p. 50












계급사회


영화 '설국열차' 에서는 기차의 칸 별로 계급이 존재한다.

꼬리칸, 감옥칸, 단백질 블록 생산칸, 온실칸, 객실칸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꼬리칸은 난민촌이며 앞으로 갈 수록 혜택받은 자들의 장소로 바뀐다.


'설국열차' 의 수직버전이라 불리는 영화 '하이라이즈' 에서 건물 주민들은 각자의 신분에 맞는 층에 거주한다.
그들은 결코 자신의 신분에서 벗어나 다른 층으로 옮겨갈 수 없으며, 이로 인해 갈등이 시작된다.


소설 '헝거게임' 에서는 1~13구역별로 각자의 역할이 있다.

사치품 제조, 무기류 제조, 수산물 생산, 곡물 생산, 탄광 등 다양한 일을 하면서 수도인 캐피톨에 모든 것을 바친다.

이들은 캐피톨을 먹여 살리기 위한 거대한 톱니바퀴의 톱니에 지나지 않는다.


한 편, 소설 '다이버전트' 에서는 구역 대신 분파에 의해 사람들이 나뉜다.

애브니게이션, 애머티, 캔더, 돈트리스, 에러다이트 등의 분파는 자신이 태어날 때 피와 가족으로 이미 정해진 것이다.

그리고 이를 따르지 않고 모두 아우르는 분파가 바로 다이버전트이다.


이렇게 다양한 영화와 소설 속 계급사회에 비해 '레드 퀸 : 적혈의 여왕' 의 구조는 굉장히 단순하다.

적혈과 은혈.

게다가 구분하는 방법도 간단해서 붉은 피의 적혈, 은색 피의 은혈이고, 

은혈은 정신지배, 치료, 금속 조종 등의 특별한 힘을 갖고 있다.
그런데 적혈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은혈의 초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이 앞서 언급한 다이버전트와 같은 개념으로,

메어 배로우가 그러한 인물들 중 하나이다.
그녀는 어떤 은혈보다도 강해서 다른 도구 없이도 스스로 전기를 생산할 수 있다.











저항


소설 속 소녀들은 현실 속 소녀들과는 달리 강하며, 대의를 품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만약 내가 그들과 같은 상황이었다면, 핍박받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면,

나 역시도 그들과 같지 않았을까?


'헝거게임' 에서 주인공 캣니스는 여동생을 대신해 자원하여 헝거게임에 출전하게 되고,

그 곳에서 지배층의 기대에 부흥하는 듯 하다가도 결국 저항군의 편에 서서 모든 구역을 이끌고 싸운다.

'다이버전트' 에서 주인공 트리스는 다이버전트로서 권력층 제닌의 음모를 알게 되고 그에 맞서 싸운다.


그렇다면 '레드 퀸 : 적혈의 여왕' 속 메어 배로우는 어떠한가?

그녀가 처음부터 은혈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어떻게든 권력사회를 깨부수려 했던 건 아니다.

애초에 왕궁 하녀가 된 것도 자의가 아닌 왕세자 칼에 의한 타의였으며,

왕자의 약혼자를 뽑는 자리에서 자신도 몰랐던 힘을 우연히 선 보이게 되었고,

오빠 쉐이드가 속한 진홍의 군대를 돕게 된 것도 그녀 스스로의 힘 보다는 

약혼자이자 왕자인 메이븐의 독려와 설득이 컸다.

애초에 은혈임에도 불구하고 진홍의 군대에 들어가 적혈을 도우려는 메이븐에게 휩쓸렸다고 할 수 있다.

메어 배로우는 캣니스나 트리스와는 달리 타고난 싸움꾼, 혹은 저항자가 아니었다.

우연, 아니면 어떤 운명이 그녀를 그 자리로 데리고 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어가 다른 두 소녀들보다 훨씬 나은 점이 있다.

그건 어마어마한 초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캣니스는 활을 쏴서 명중시키는 능력을 지녔고,

트리스는 모든 분파의 감성을 갖고 태어나 지배층의 정신 지배가 통하지 않는다는 점을 제외하면 특별한 능력이 없다.

이에 반해 메어 배로우는 은혈도 못 하는 무언가를 '생산'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힘이 그녀로 하여금 저항군의 편에 서도록 이끄는 것이고, 의지는 힘에 따라가는 셈이다.









조력자



아무리 각박한 세상에서도 누군가는 나를 도와준다.

이는 우리네 현실에서뿐만 아니라 소설 속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인가보다.


'헝거게임' 에서는 캣니스를 최고로 돋보이게 멋진 의상을 만든 디자이너, 게임 설계자 플루타르크, 멘토 헤이미치 등이 

캣니스를 도와 캐피톨을 무너뜨리는 데 한 몫하는 조력자들로 나서고,

'트와일라잇' 에서는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던 뱀파이어들이 컬렌가를 돕기 위해 볼투리가에 맞선다.


그리고 '레드 퀸 : 적혈의 여왕' 에서도 메어 배로우를 돕는 인물들이 있다.

메어에게 의전 수업을 해주는 줄리언은 은혈이자 자신의 처남이 왕임에도 불구하고, 가족사를 이유로 적극적으로 도와준다.

루카스는 그가 속한 가문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친절한 은혈로, 나를 수행하면서 의도치 않게 도움을 주게 된다.

소설 속에서 일어난 진홍의 군대의 반격, 킬런의 탈옥 등은 모두 어린 소녀인 메어 배로우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했다.

그녀 곁에 있는 그녀 자신보다 경험과 지혜가 풍부한 이들의 도움으로 가능했던 것이다.


숨이 턱턱 막힐 것만 같은 은혈들만의 사회에서 메어 베로우가 살아 남을 수 있던 건 이들 덕분이다.

내가 사는 이 세상 또한 마찬가지이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이라는 말이 있어봤자 내 주변인들 없이 난 살아갈 수 없다.

내가 혼자 이뤄낸 것만 같은 일들, 그것들도 알고 보면 그 누군가의 덕택이다.











영화



'레드 퀸 :  적혈의 여왕' 은 이미 유니버설 픽처스에서 영화화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나는 이 소설 시리즈가 인기있는 영화로 되살아날 것이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다만 '섀도우 헌터스' 처럼 관객층을 잘못 파악하여 지나치게 유치한 영화로 만들거나, 엉성한 로맨스 라인만 형성하지 않길 바란다.


내내 칙칙한 색깔의 옷을 입고 싸우는 '헝거게임', '다이버전트' 등과는 달리 

'레드 퀸 : 적혈의 여왕' 에서는 메어 배로우가 화려한 의상을 입고 화장하는 장면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이것만으로도 볼거리가 충분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거기에 사치스러운 장식의 왕궁을 들여다보는 건 빅토리아 시대의 궁궐을 보는 것과는 또 다른 즐거움일 것이다.




모든 구조가 그의 명령을 따라 정원의 바닥이 거대한 원으로 넓어질 때까지 이동한다. 낮은 층의 테라스들은 뒤로 물러나며 더 높은 층의 테라스들과 조정되고, 나선 모양은 하늘을 향해 열린 거대한 원통 형태가 된다. 테라스들이 움직이는 동안 바닥은 낮아지다가 가장 낮은 층의 특별석 아래로 거의 6미터쯤 낮아지고 나서야 멈춘다. 분수는 폭포로 바뀌어서, 원통 모양의 꼭대기에서부터 바닥에까지 물을 쏟아내고, 그곳에는 곧 깊고 좁은 웅덩이들이 생긴다. 우리가 선 단은 미끄러져서 왕의 특별석 위쪽에 가서 멈춘가. 그 덕에 저 멀리 아래쪽의 바닥을 포함해서 모든 것이 잘 보이는 자리가 된다.


레드 퀸 : 적혈의 여왕 I  p. 112





오랜만에 흥미로운 칙릿 + 판타지 소설을 읽어서 기분이 좋다.

어서 다음 편을 읽을 수 있길, 하루 빨리 영화로 만날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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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털갈이엔 브레이크가 없지 - 본격 애묘 개그 만화
강아 글.그림 / 북폴리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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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솔직히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싫어한다고 해야 맞겠지.

반면에 강아지는 엄청 좋아한다.

길가다가도 강아지가 보이기라도 하면 목이 돌아갈 정도이다.


나는 소설을 좋아한다.

그것도 프랑스, 영국, 미국 소설을 좋아한다.

나의 이런 편협한 독서 습관을 막아주기 위해 나타났다.

'고양이 털갈이엔 브레이크가 없지.'

그렇다.

변명은 저리 치워 버리고, 순전히 '재미' 때문에 읽게 되었고, 결과는 대성공이다.


처음에는 애초에 이 책이 페이스북에서 연재되는 웹툰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그런데 그렇다더라.

찾아 보았더니 꽤 재미있게 연재중이었다.

졸지에 팬이 되었고, 두번째 책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집사 1호기



고양이에 관한 많은 속설들을 보자면, 고양이는 인간을 자신의 '주인' 으로 여기지 않는다.

자신을 케어해주면서 평화로운 나날을 이끄는 '집사' 정도로 여긴다.

그게 나로 하여금 고양이에 대한 반감을 갖게 한 이유들 중 하나였는데,

생각해보면 인간이나 고양이나 다 똑같은 '동물' 인데 누가 주인이고 누가 집사겠는가.


아무튼 이 책에 나오는 집사 1호기는 바로 웹툰 작가 자신이기도 하다.

소위 말하는 엄청난 '고양이 덕후' 로서 고양이가 어떤 행동을 해도 반하고, 사진 찍거나 그림으로 표현한다.

그녀는 주로 고양이 밥주기 등 갖가지 일 (chore)을 도맡아 하고 있고,

어쩐지 점점 고양이화되어 가는 듯 하다.

고양이처럼 '꾹꾹이'를 좋아한다거나 하는 게 그렇다.


다소 냉소적으로 보이고 날카로운 이미지의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을 보면 참 신기하다.

'나에게 집착하지 않는 차가운 도시남/녀' 이미지에 반하는 걸까?

나는 전혀 귀엽다고 느끼지 않는 고양이의 여러 행동이나 표정을 보고 기어코 순간포착하려는 집사 1호기를 보고 있자면,

정말이지 Every man to his taste 라는 속담이 떠오른다.

고양이가 자신을 할퀴고 발로 차고 잠 자는데 깨워도 괜찮다면

당신은 진정으로 '고양이 덕후' 인 셈이다.










집사 2호기



고양이 '초승달' 을 데리고 온 장본인으로서,

'집사' 임에도 불구, 고양이보다 한 수위의 모습을 선보이는 그녀이다.
무심한 듯 고양이를 바라보다가도, 집사 1호기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 별 거 아닌 듯 척척 해낸다.

그야말로 '고양이 위에 군림하는 집사' 아닌가.

그녀를 보는 내 기분은 '사이다' 이다.


그녀는 마치 사람판 고양이인 듯 초승달과 닮아 있다.

서로 신경쓰지 않는 듯 하지만 서로를 신경쓰고 있다.

자신이 아끼는 바지를 자꾸만 내동댕이치는 초승달을 보고도 결국엔 용서해주고 있다.

귀찮은 목욕시키기, 약 먹이기 등에서 언니를 돕는 조력자의 역할을 한다.

결국 애초에 고양이를 집에 데려온 건 그녀 자신이 아니던가.


문득 생각해본다.

내가 고양이를 키우게 되면 그녀와 같은 모습일까 하고.

물론 집사 2호기의 자발성과 나의 반의지는 전혀 다를 테지만,

그래도 고양이를 대하는 나의 모습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어찌 됐든 같이 살게 되었으니 해 줄 건 해 줘야지.









고양이 '초승달'



작가는 진심어린 애정을 듬뿍 담아 초승달을 묘사했지만,

제3자의 입장에서 지켜보자면 초승달의 행동은 '짜증 유발' 그 자체인 것들이 많다.

자기가 배고프다고 자고 있는 집사를 깨우질 않나, 집사 자리를 차지하고 주무시질 않나,

거기에 싫으면 발로 차기도 하는 고양이.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봐도 그것이 '고양이' 인 걸.

이해하지 못하면 함께 살지 말아야겠지.

귀엽게 애교떨고 막 꼬리 흔들고 하는 건 강아지의 역할로 남겨야겠지.


이 책 속에서 초승달은 고양이이면서도 의인화된 모습으로 그려졌다.

처음과 달리 점점 아저씨화되는 과정이 보이기도 한다.

화가 나는데 자신에게 말 걸면 뒤돌아 앉는가 하면, 집사들이 싸우는 소리에 눈도 깜짝 안 한다.

또한 '전지적 고양이 시점' 으로도 많이 그려져 있다.








에필로그




이 만화책을 추천하겠는가?

적극 추천한다. 

물론 애묘인에 한해서.


표지에 그려진 고양이 털 그림이 진짜 먼지인줄 알고 털어낼 뻔 했다.

그만큼 털갈이에 대한 내용도 많이 포함되어 있다.

'우다다', '그루밍' 등 전문적인 고양이 관련 용어도 나오고 있다.

읽어라.

당신이 고양이를 키운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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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나비는 아직 취하지 않아
모리 아키마로 지음, 김아영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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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예전에 일본 소설 몇 권을 접한 적이 있다.

그런데 하나같이 주인공들에게 전혀 공감이 가지 않아 empathy는 커녕 sympathy도 되지 않은 경험이 있다.

그래서 일본 소설은 내게 전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



그리고 여기 오랫동안 가져왔던 나의 편견을 종식시켜 준 책 한 권이 있다.

무려 내가 좋아하는 작가 '애거서 크리스티' 상을 수상한 바 있는 작가의 소설이다.

그 이름부터 호기심을 끄는 이름 없는 나비는 아직 취하지 않아.



이 소설은 총 5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고, 모두 주인공 조코와 미키지마 선배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이 둘은 도야마대학교의 '취연' 동아리 소속으로 매일 고주망태 될 때까지 술 마시는 게 일인 동아리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술에 취한 듯한 기분으로 일어나는 갖가지 소소한 사건들을

추리하듯 취리하듯 풀어내는 동아리 회장 미키지마 선배.

그는 셜록 홈즈, 에르큘 푸아로, 미스 마플 등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형태의 '탐정' 으로 불릴 수도 있겠다.
 마약에 젖어 환상 속에서 진실을 탐구하는 셜록 홈즈,

은퇴한 사립탐정 에르큘 포아로,

동네 할머니 분위기이지만 온화하게 모든 것을 꿰뚫는 미스 마플,

마치 취권으로 상대방을 제압하듯 취연 속에서 술에 빠져 사건의 진실을 간파하는 미키지마 선배.




첫번째 에피소드는 주인공 조코의 절친 에리카의 실종 사건이다.

때는 4월. 

여느 때처럼 취연에서는 다들 미친 듯 술을 마시고, 그 와중에 다음날까지 미녀 에리카카 보이지 않는다.

다들 걱정하는 와중에 벚나무 아래에서 '시체' 인 줄 알았던 게 사실 새근새근 잠들고 있던 에리카였다.

그녀는 역사 덕후로서 칵테일을 마신 후 취하여 역사 속 야스베에가 되어 마치 그 인물처럼 행동한 것이었다.

그런 에리카의 마음은 조코에게 향해 있고 그것은 모두 앞에서의 키스로 이어진다.



그런데 심각할 수도 있는 사건 중간 중간 일어나는 술취한 취연 멤버들의 행동은 우리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아침드라마의 갈등 장면 속에서 갑자기 분위기가 반전되어 나오는 가벼운 이야기를 보듯 소소한 즐거움을 주기에 충분하다.


"미쓰토리 바보 자식, 어디 갔어?"

"네? 모르겠는데요."

"시치미 떼지 마, 네 가방에 숨겼지?"

트집을 잡기에 내키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가방 안을 보여 줬다. 이렇게 작은 가방 안에 그런 남자를 숨길 수 있겠느냐고 말하지는 않았다. 술자리에서는 술자리의 이치가 있는 법이다. 그건 정말로 확실하다. 여기서 그런 바른 말을 하는 건 오히려 비정상이다.

p. 24-25



..., 1학년 남자애는 가방을 메고 "이제 수업 갈게요, 9시부터 1교시가 시작돼요."라며 의미 모를 말을 하고 있었다. '이봐, 지금은 밤 9시야.'라고 지적하는 것도 우습다는 생각에 나는 어쨌든 그저 마지막까지 지켜보기로 했다.

p.26













두 번째 에피소드는 5월이 되어 '고독인가 연애인가' 의 병에 걸려 버린 취연 멤버 우치노의 이야기이다.

야오이와 야구 관전을 많이 하다가 유독 자신이 힘들게 구한 페어티켓의 장소인 도케이전에는 같이 가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절충안으로 영화관에서 만나기로 했으나, 끝내 우치노는 바람맞는다.

그 이유는 도케이전에서 야오이의 전 남친이 있다든가 하는 흔한 내용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도케이전 속 응원단장으로서 짧은 머리에 남자 교복을 입고 있는 모습이 부끄러워서도 아니었다.

응원부에게 신성한 무대인 야구장에서 스탠드에 연인을 데리고 왔다가는 '역시 여자는 응원단장을 해선 안 돼.' 등의 반응이 나올 것을 예상해서였다.  







세 번째 에피소드는 여름이 되어 취연 멤버들이 다 함께 MT를 가서 일어난 일이다.

그 곳에서 일찍 도착한 오야마 선배는 어쩐지 잔뜩 취해 정신을 잃고 있는데, 

이 모든 건 그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한 자루카와가 벌인 짓이었다.
'사랑' 이라는 깊은 늪에 빠져 허우적대던 그는 오야마 선배를 여배우 미우와의 전 연인인 미키지마 선배로 오해한 것.

여기서 진실은 미우와 미키지마 선배는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는 거다.

그저 인기많은 미우가 자신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미키지마에게 집착했을 뿐.





 





네 번째 에피소드는 9월 학교 축제에서 일어난 일이다.

술만 마시는 동아리 취연은 출점을 금지 당하고, 

취연과 일본어로 발음이 같은 추연의 멤버들을 잔뜩 취하게 하여 대신 출점하는 데 성공한다.

결국 대학 총장에게 들켜 쫓겨날 위기에 그와 친구인 듯한 주식회사 리큐르 CEO인 신이치가 총장이 좋아하는 나호를 언급하며 말린다.

나호가 한 때 몸 담았던 동아리가 취연이었던 것이다.




이번 편에서는 주인공 조코가 처음으로 추리 매니아다운 행동을 하게 된다.

추연 동아리에 잠입하여 그들을 무장해제시키는 그녀는, 아역배우 할 적의 소녀를 보는 듯하다.



이 말을 믿고 나는 추리연구회에 몸을 던졌다. 안경을 벗고 마스카라를 잔뜩 바르고, 언제나 축 내리고 있던 머리를 아주 약간 정성을 들여 위로 정리하는 등 엉성한 변장을 시도하면서 말이다.

p. 165








마지막 에피소드는 취연의 겨울 MT 장소인 후쿠이에서 일어난다.

아버지의 계획에 휘말려 따라 나선 조코는 하마터면 처음 보는 기요카와 약혼할 뻔한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좋아하던 여성 도모미가 있었고, 어떤 계기로 그녀에게 큰 오해를 사 버렸다.

그리고 그 오해의 원인과 해결을 모두 미키지마 선배가 제공한다.




이 편에서는 작가의 애거서 크리스티 사랑이 살짝 드러난다.

어쩌면 그도 나와 같은 취향인 걸까?



가지고 온 애거서 크리스티의 [오리엔트 특급살인] 을 옆으로 누워 읽고 있노라니, 기모노로 갈아입은 아빠가 싱긋 웃음을 지었다.

p. 207








이 소설은 매우 흥미롭다. 그리고 여성 독자들이 읽기에 충분히 매력적이다.

우선 모든 에피소드에서는 '로맨스' 가 사건의 결정적인 소재이다.


에리카 실종사건에서 그녀는 절친 조코에게 입맞춤하며 자신의 마음을 드러냈고,

우치노는 '고독인가 연애인가'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고 있으며,

자루카와는 연인의 전 남친에 대한 질투심으로 가득 차 있고,

총장은 자신이 좋아하는 나호때문에 취연에 대한 태도를 돌연 바꾸는 가 하면,

연인이었던 기요카와 도모미는 작은 오해때문에 가슴 아파한다.





 





모든 사건은 봄에서 겨울로의 시간의 흐름에 따라 동아리 취연의 행적과 함께 일어난다.

그리고 계절이 바뀌면서 연애 감정이 더욱 샘솟는다.



절망적일 정도로 지루한 9월이 끝나가고 있었다. 

골든위크가 끝났을 때도 그랬다만, 여름방학이 끝나자 또다시 갑자기 연애 관계로 발전한 남녀가 대학 캠퍼스 도처에서 눈에 띄게 되어, 이대로라면 연애를 하지 않는 사람이 희귀종이 되어 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기우가 들 정도였다.

p. 145







 






계절이 바뀜에 따라 미키지마 선배에 대한 조코의 마음 역시 무르익게 된다.




4월의 그녀는 이랬다.


개의치 않고 선배는 내 팔을 끌고 간다. 차가운 손의 촉감에 약간 심박수가 높아졌다.

p. 31




5월의 그녀는 선배를 조금 더 좋아하게 된다.


귀에 미키지마 선배의 숨결이 와 닿았다. 그걸 의식하지 않으려고 할수록 왜인지 묘하게 신경이 쓰였고, 그러고 있노라니 주변의 환호성은 시끄러울 터인데도 꽤나 멀리에서 울리는 것처럼 들렸다. 귀는 어떤 소리를 우선시할 건지를 자유자재로 정했다. 어떤 스피커보다도 뛰어났다. 

그리고 익숙해지니, 이상하게도 미키지마 선배의 목소리만이 귀에 들어오도록 조정이 되었다.

p. 72




여름에는 그녀도, 미키지마 선배도 조금씩 마음을 드러내게 되고, 이제는 주변사람들까지 눈치채게 된다.


보아하니, 내 눈 앞에 미키지마 선배가 등을 내밀고 있었다.

"이제 이동할 거니까. 업혀."

'그렇게 차라도 되는 것처럼 간단하게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라고 생각하면서도, 내 얼굴에 열이 오르는 건 어떻게 해도 멈출 수가 없었다.

p. 102



"너희들, 사귀니?"

"아니, 그게, 저, 그냥 후배...... 같은 느낌인데요."

나는 내 의지와는 달리 달아오르는 얼굴을 태양 탓으로 돌리기로 했다.

"흐음, 그래도, 너는 좋아하는 모양이구나."

"그렇지...... 않아요!"

미우 선배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좋은 거 알려 줄게. 그 사람, 바위 그늘에 있을 때부터 너만 보고 있었어."

p. 119



그래도 결국 묻고 말았다.

"미우 선배랑 헤어진 이유가 뭔가요?"

긴 침묵이 흘렀다.

p. 126



나는 서서히 내 감정에 눈뜨기 시작한 것이다. 내 교만함의 모순에. 더 이상 유명 아역 배우도 뭣도 아닌 내가, 지금 취하게 만들고 싶은 건 단 한 사람뿐인지도 몰랐다.

p. 141





9월. 

조코는 미키지마 선배를 위해 총장 앞에 자신이 회장이라고 나서고, 

그를 몰래 보던 걸 들키지 않기 위해 자신의 모습이 찍힌 포스터를 훔치기도 한다.


"잠시 기다려 주세요! 도, 동아리 회장은 접니다!"

아아, 입은 화의 근원.

p.177



그날, 나는 미키지마 선배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때 오른편에 그 커다란 까마귀가 있었고, 시계단 위의 시곗바늘은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만일 포스터를 미키지마 선배가 봐 버린다면, 그리고 미키지마 선배가 시계단의 상태를 기억하고 있다면, 그날 내가 미키지마 선배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단 걸 들키고 만다.

p. 186





겨울.

그는 그녀를 알고 있었다.

그녀가 기억하기 아주 오래 전부터.


"나는 그 영화, 개봉 첫날에 보러 갔었어. 네가 나온다고 생각해서."

...... (중략)

그런데도 , 왜 이렇게 가슴이 설레는 걸까.

더웠다.

p. 248







 







 이 소설은 추리소설일까? 그렇다. 한 번도 시체가 나온 적은 없지만, '시체' 라는 표현은 많이 나온다. 

벚나무 아래에서 시체처럼 누워 있던 에리카가 그랬고, 연애병에 걸려 시체처럼 다니는 우치노가 그랬다. 자루카와에게 당해서 시체처럼 뻗어 있던 오야마, 거기에 조코의 훌륭한 연기력에 전원이 시체가 되어 버린 추연 멤버들까지.






 






겉만 보면 대학교 술 동아리의 소소한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듯 한 이 소설은,

사실 알고 보면 모든 사건은 로맨스였고,

그 사건의 전말을 대단한 추리력으로 파악해 내는 한 인물이 있으며,

그 안에서 주인공의 로맨스는 무르익어 간다.

정말 독특한 소설 아닌가?

'블랙 로맨스 클럽' 에 정말 잘 어울리는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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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키 선생님 9
다케토미 겐지 지음, 안은별 옮김 / 세미콜론 / 2016년 2월
평점 :
절판


대망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스즈키 선생님 9~11권이다.

1권에서 시작해서 만화책치고 절대 긴편은 아니지만, 이야기가 있는 도서로 본다면 장편에 해당하겠지.

스즈키 선생님이 스스로 '모르는 사이에 성장했다.' 라고 느낀 것처럼 

도서 스즈키 선생님을 읽는 나의 속도도 성장하였다.

이제는 한 권에 30분 정도면 거뜬히 읽을 수 있을 정도이다.

만화책인데 당연하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스즈키 선생님은 대사가 많고 거의 '썰전' 에서 얘기하는 수준의 대화가 나와서 막 읽고 넘기기가 힘든 것들이 많다.





빅 이슈 셋 중 그 포문을 여는 첫번째는 학생회장선거이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어마어마하다.

간다 마리는 말도 안 되는 인기투표 소동을 일으킨 주범이나, 제법 어른스럽게 연설을 한다.


나카무라는 학생회장 선거 연설에서 긴장했으나 인기는 많았고,

 나중에 자신의 반에 연극 '반짝이끼' 를 가져올 수 있도록 가위바위보 승리의 주역이 된다.

니시 가즈야는 단순히 투표율을 높이기 위한 진지한 의견없는 적당주의식 선거방식 자체에 의문을 품는다. 

그가 하는 말이 모두 옳고 이성적인가?

전교생 앞에서 공공연하게 오카다 선생님과 말다툼하는 니시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건 '말 꼬투리 잡고 늘어지기' 일 뿐이다.

 어불성설인 내용이 그만큼 많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여기에 더해서, 학생회장 선거를 부정하는 니시조차도 오가와 소미에게는 한 표 선사하려한다는 거.

이러쿵 저러쿵 자신의 의견을 개진한다고 해봤자, 결국 미숙한 중학생이자 여자에게 끌리는 한 남자에 불과했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전교회장으로 니시가 당선되게 되고, 그는 또 그 역할을 맡는다.

여러 아이들과 선생님들의 격려와 지지가 있었지만, 그가 학생회장을 한다는 자체가 모순이지 않은가?





우리나라 학교의 풍경과 선거유세부분만 많이 닮은 - 선거 포스터 만들기, 점심시간에 각 반 돌아다니며 유세하기 등 - 

일본 학교의 학생회장 선거를 보고 있자니, 얼마남지 않은 우리나라의 국회의원선거가 생각난다.

만화책 속 히가시 초등학교에서는 기명투표를 실시하여 장난스러운 투표를 막으려고 했다.

그래서 그에 불만을 품은 학생들이 중학교 때 적당한 보복을 하려고 한다.

우스꽝스럽게도 보복의 중심인 아이가 자신이 반대하는 체제의 핵심이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결코 기명투표가 옳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초등학생 때라면, 적어도 자신의 투표권 행사가 어떤 건지 가르쳐질 나이라면, 

한 번쯤은 당당하게 이름을 쓰고 투표해도 나쁘지 않다고 본다.

단, 선거개표위원이 학생 대신 모두 교사라는 조건 하에.


우리나라에서 투표 독려시 항상 나오는 말이 있다.

'국민의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시오.'

'정치를 비판하려거든 먼저 투표하시오.'


투표로 나라의 법과 정치가 바뀌는 국회의원선거에서 기명투표는 말도 안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투표권을 포기하는 것도 말이 안 된다.

다만 자신의 소신껏, 혹여 맘에 드는 후보가 없다면 스즈키 선생님에서처럼 무효투표를 하면 된다.

물론 정당의 정책과 후보자의 공약을 보고 선택하는 게 정상적인 것이고 그렇게 하도록 노력해야한다.






학생선거 다음으로 나온 이슈는 문화제이고, 그 속에서의 연극 발표이다.

2-A반의 연극을 담당한 스즈키 선생님은 중학생을 상대로 거의 대학생급의 수업을 진행한다.

아이들에게 유재석을 연상시키는 말발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설득시키는 그는,

모두가 즐겁자고 하는 문화제 연극임에도 불구, 지나칠 정도로 진지하게 아이들을 겁준다.

처음에 아이들 배역을 정해놓지 않고 모든 내용을 숙지하게 한 후 오디션과 같은 테스트로 가장 적당한 배역을 배정하는가 하면, 

서로간의 신뢰훈련부터 발성훈련, 끝말잇기 놀이까지 연극 강사 자격증이 있나 싶을 정도로 전문적이다.

그러면서 기시에게는 연극 '반짝이끼' 의 주인공 선장 대역을 거의 강요하다시피한다.

그 이유는 기시가 선장 배역에 타고났다는 것이고, 이에 대해 말도 안 되는 이유라고 한 학생에게 항의받지만,

언제나 그랬고 앞으로도 늘 그랬듯이 자신의 언변을 십분 활용하여 항의를 거뜬히 물리쳐 버린다.


연극으로 단단히 뭉쳐지고 하나가 된 2-A반 아이들은 

어느 사회 부적응자의 오가와 소미 강간/살해 위협 사건에서도 의외로 침착하게 대응한다. 

늘 감정과잉에 치닫은 모습만 보다가 정말 위급한 상황이 닥쳤을 때 차분한 태도를 보이니 어지러울 지경이다. 
이것이 연극으로 다져진 아이들의 내공이란 말인가?






마지막 이슈는 미쓰루의 어머니 폭행과 그와 연관해서 엉뚱한 곳에서 복수를 노리는 가쓰노 유지의 오가와 소미 강간/살해 위협 사건이다.

세계 어느 나라든 거동이 수상한 자는 수사를 받을 수도 있고, 시민이 이를 보고 신고할 수도 있다.

남자 둘이 늘 공원 벤치에 앉아 음울한 분위기로 있는데 이걸 보고 그냥 넘어간다고 해도 암묵적 방관이라고 욕할 거 아닌가.

자신과 미쓰루가 어떠했는지 전혀 생각하지 않고 피해를 보았다고만 느낀 후 (이거야말로 열폭)

 미쓰루에 대한 복수를 한답시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 한다. 

왜 살인을 하려다가 여중생 강간으로 바뀌는 건데? 

그런데 결과적으로 드러난 이유가 참 어이없다.

미쓰루 사건과는 전혀 관계없이 그동안 자신이 가져 온 불만족스러운 여자 관계에 대한 보상으로 강간을 원했던 것이다.

여기에 가쓰노 유지가 평생 사회 부적응자로 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놓여 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합리화를 위해 인과관계가 없는 별개의 두 사건을 연결지으려 했던 그.

합리적이지도 않을 뿐더러 외부인의 시선으로 보기엔 웃음거리일 뿐이다.


트위터를 통해 강간/살해 장면을 실시간 중계하려고 하는 가쓰노 유지의 계획을 중단시킨 건 다름아닌 납치된 장본인 오가와 소미이다.

그녀가 전혀 중학생답지 않은 자세로 가쓰노 유지의 말을 모두 들어주고, 냉철한 비판의 말도 해 가며,

장기적으로 그의 갱생을 생각하여 일부러 살짝 목을 찔려 주어 피가 나게 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날라차기 두 번으로 가쓰노 유지를 제압한 후 옥상에서 반대편으로 뛰어 탈출한다.

대. 단. 하. 다.

가능할 수도 있지만, 가능한가?








만화라서 그런가, 아니면 정말 일본에서는 그러한가?

학생회장선거 후보연설에서 그렇게 길고 진지하게 전교생 앞에서 말할 지 정말 궁금하다.


스즈키 선생님을 만든 다케토미 겐지의 프롤로그를 보면 

거의 미드 CSI급의 사건들이 줄줄이 터지는 만화책 속 이야기가 TV에서 나온 사건, 사고를 바탕으로 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일어났던 학교에서의 사건들을 스즈키가 몸 담고 있는 학교로 모조리 옮긴 것이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만약 이렇게 대응했다면... 이라는 가정을 바탕으로 이야기가 개진되었다.


또한 생각지도 못한 건, 그가 독자들에게 자극적이고 오락적인 즐거움을 주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이다.

충분히 자극적이긴 했지만, 결코 유쾌한 자극은 아니었기에 일본 독자들에게 얼마나 오락적인 즐거움을 주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와 엄연히 가치관과 사고방식이 다른 그들이라면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즐거워' 했을 수도 있겠다.





 





그래서 내게 스즈키 선생님은 

재미난 만화책과 진지한 만화책 둘 사이에서 어느 쪽으로 가야할 지 갈팡질팡했다는 느낌이다.


그리고 스즈키가 여학생을 보는 그런 음흉한 마음을 계속 품는다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서라도 교사를 그만두었으면 한다.

만약 정상적인 현대인 수준의 양심을 지녔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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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화 - 1940, 세 소녀 이야기
권비영 지음 / 북폴리오 / 2016년 3월
평점 :
품절



1940년, 영실, 은화, 정인 세 소녀가 만나 만드는 이야기.

일제 강점기에 각기 다른 가정형편과 상황에서 만나 다른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세 소녀.

어쩌면 지금 얼마 남지 않은 위안부 할머니들의 어릴 적 이야기.

그리고 일본이 묵인하고 부인하는 이야기.


영실, 은화, 정인은 서로 다른 출신으로 만나 우정을 키운다.

이모집에 와서 일하며 근근히 먹고 사는 영실.

기생집에서 태어나 자신도 기생일을 해야 한다며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은화.

일본인 앞잡이 노릇을 하는 아버지덕에 부자로 살지만 그게 싫은 정인.

지금과는 사뭇 다른 시대이지만 그들의 우정은 지금과 그렇게 다르지 않다.

 

 

 

 

 

영실


세 명의 소녀 중에서도 이야기의 흐름을 쥐고 있는 소녀가 바로 영실이다.

그녀는 일본순사를 패고 만주로 달아난 아버지, 그리고 그런 아버지를 찾아 나서는 어머니로 인해 

이모가 일하는 국밥집에서 이모의 아들인 철부지 동수를 돌보며 일한다.


교복입은 친구들이 그렇게 부럽다며 배움에 한이 있는 그녀는 나의 할머니를 떠올리게 한다.

할머니는 영실과는 정반대로 동네이장집 딸로 부유하게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지지배들은 중학교까지 갈 필요가 없다는 생각으로 인해 집안일을 도왔다고 한다.

요즘에도 배움에 대한 뜻을 품고 노인복지회관에 다니는 할머니를 보면,

은화가 가져온 책을 열심히 읽는 영실, 정인이 버리듯 준 책을 읽는 영실의 모습이 겹쳐지는 듯하다.


아버지가 한 일을 알아서인지, 아니면 독립군의 유전자가 흐르는 건지는 몰라도 

영실은 유독 짧게 본 독립군 기호오빠에 대한 생각을 떨치지 못한다.

아버지가 계시는 탄광에서도, 자신을 좋아하는 듯 하지만 맥아리없이 줏대없는 태일오빠를 보면서도,

영실이 머릿 속에 그리는 건 오직 기호오빠뿐이고, 어쩌면 기호오빠란 존재는 그녀에게 상징적인 남성으로 남았는지도 모르겠다.

민족의 독립을 위해 제 한 몸 희생하길 마다 않는 기호오빠와 달리 멀끔한 외모의 태일은 그저 기생오라비일뿐이다.


 

 

 

 

영실이모


자신이 언니와 한 약속, 영실을 제대로 돌보고 중학교에 보내야겠다고 하는 생각은 그녀로 햐여금 엉뚱한 행동을 하도록 이끈다.

아니, 오히려 그 시대에 가장 잘 맞는 행동이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자신을 소위 '장사꾼' 일 뿐이라고 칭하는 일본수사 나카무라와 붙어다니며 그의 정부 노릇을 톡톡히 하는 그녀.

결국엔 뜻대로 영실을 일본에 있는 학교에 보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아들 동수에 관해선 그렇지 않다.

동수가 거지처럼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사탕을 얻는 와중에도 그저 지 살 길은 알아서 찾는 거라며 방관한다.

그런 그녀를 두고, 모범적이지 않은 어머니라고 욕할 수도 없고, 훌륭한 이모라고 칭찬할 수도 없다.

그냥 시대가 그러했고,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나름의 최선을 다한 것 뿐이다.

 

 

 

 

 

 

은화


하얗고 예쁜 외모를 소유한 은화는 기생이 되지 않기 위해 애쓰지만 동시에 기생이 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세 소녀 중 가장 책도 많이 읽고 주관도 뚜렷한 그녀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앞엔 가혹한 운명이 기다린다.

독립심도 셋 중 가장 강해서 결국엔 자신을 먹여주고 길러준 기생집을 탈출하게 되지만, 

그녀의 출신, 일제 강점기, 여린 소녀라는 세 가지 사실은 그녀가 원한대로 상황을 흐르게 하지 않는다.

가장 안쓰러우면서 가장 가슴 아프게 한 캐릭터이다. 







정인


아버지의 일본 앞잡이 노릇덕에 부자로 살아가는 자신의 삶을 비관하고, 새어머니를 증오하며, 오빠인 정태처럼 어긋나는 캐릭터이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은화처럼 자신은 결국 아버지의 뜻대로 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살아가는 소녀이다.

친구들과 함께 있는 와중에도 제 멋대로 소리지르거나 음악에 맞춰 춤추는 모습은 순수함과 제멋대로임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게 친구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라는 걸 모르는 그녀.

세 소녀 중 어느 하나를 택하라면 나는 당연히 정인이 되고자 한다.

어찌됐든 그 시대를 가장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건 바로 정인이었으니까.


 

 

 

 

 

 

 

일본


이 소설은 세 소녀의 우정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일본에 의해 그 우정이 깨어지기때문에 시대소설이기도 하다.

태일, 기호, 정태, 칠복이라는 남성 캐릭터들보다 더욱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다름아닌 일본이라는 거대한 대상이다.

일본때문에 집안이 풍비박산난 영실, 일본덕분에 부잣집으로 사는 정인, 일본때문에 만신창이가 된 은화.

그 셋을 이어주었다가 갈라 놓는 것 역시 일본이 한다.
그리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아니 우리가 열심히 '몽화' 를 읽는 동안에도 그들은 자신이 한 일을 지워버리려 애쓴다는 걸.

내가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깨닫고 반성하고 발전하는 동안에, 그들은 묻고, 거짓말하고, 화낸다는 걸.


 

 

 

 

 

 

 

 

숙명, 운명


소설 전반을 지배하는 건 숙명이다.

영실, 은화, 정인 세 소녀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게 만드는 운명의 굴레가 전체적으로 깔려 있다.

직업에서부터 만나서 사는 남자까지 어쩜 그리 자신을 똑 닮았는지 인정하기 싫을 정도이다.


영실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추억 속의 기호오빠는 없는 존재이다. 죽었건 살았건 그녀와는 만나지 못하는 존재이다.

그녀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아버지는 없는 존재이다. 이번에는 실로 없는 존재이다.

그리고 그렇게 싫어했던 일본에서 공부를 하게 된다. 

그런 영실 곁에 있는 남자는 이모네 국밥집에서 식모처럼 일했던 영실같이 정인네 집에서 머슴으로 일했던 칠복이다.


기생집에서 길러져 자신도 언젠가는 기생이 될 거라는 두려움에 몸부림치다가 탈출한 은화.

 그녀의 몸뚱아리는 일본군에게 있어서 한낱 기생의 그것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것을 포기한 그녀에게 다가온 존재는 그녀처럼 똘똘뭉친 독립심으로 살아가는 정한우이다.


정인은 술도 마시고 친구들과 모의도 하며 반항하다가 아버지의 강압에 못 이겨 프랑스 유학길에 떠난다.

그리고 그 곳에서의 생활에 어느 정도 만족하며 살다 돌아와서는, 아버지가 정한 10살 많은 남자와 결혼하기로 한다.

사랑은 없지만 둘이 함께 사는 미국 생활은 그런대로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몽화를 읽고 난 기분은 허무하고 슬프다.

아무리 자신의 운명을 바꿔 놓으려 해도 할 수 없는 소녀들의 이야기이다.

그래도 게 중에 가장 자신의 의지를 펼친 소녀가 영실이라서 그녀를 주인공격으로 둔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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