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과 함께한 선교사, 언더우드 다문화 인물시리즈 8
길진봉 지음 / 작가와비평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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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예배가 멈추고, 온라인 예배로 전환되기 전까지 늘 교회에 가서 기도를 드리던 장소가 있었는데, 그곳의 이름이 언더우드선교사님의 이름을 따온 언더우드 홀이었다. 주변 고등학교에는 아펜젤러선교사님과 관련이 있었고, 이전부터 토마스선교사님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들었지만, ‘언더우드선교사님의 이야기는 가고 싶었던 대학교에 동상이 세워져 있다는 것 외에는 알지 못했다.


언더우드선교사는 어려서부터 종교인을 꿈꾸었다. 그래서 인도로 선교를 나가고 싶었고, 인도의 의료 시설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의료 공부를 하였다. 친한 동료로부터 먼 곳에 있는 조선 땅에 대해 듣게 되었고, 기도 하던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따라서 조선으로 선교를 하러 오게 된다. 처음부터 선교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공부하였던 의료 기술을 가지고 광혜원에서 일을 하였고, 이 일을 통해서 조선어를 배우고 점차 한국인들이 가지고 있던 서양인들에 대한 거부감을 줄여나갔다. ‘언더우드선교사님이 일하던 광혜원은 제중원으로 변하였고, 그리고 그 정신은 훗날 세브란스 병원의 모태가 되었다. 또한, 조선인들을 위해서 한영사전을 편찬하고 고아원도 설립하였다. 이러한 언더우드선교사님의 진심에 감동하여 한 사람, 한 사람 기독교를 믿게 되었다. 특히, 호튼 여사와 결혼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도 주고 새문안교회를 세우기도 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고종 황제에게 더욱 신뢰를 주어서 고종 황제의 친구이자, 통역관이 되었고 호튼 여사는 명성황후의 주치의가 되었다. 이후에도 YMCA를 도입하여 스포츠를 통해 선교도 하고,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학교를 세워서 일제가 지배하는 속에서도 교육을 위해 노력하였다. 병으로 인해 미국에 갔다가 숨을 거두었는데, 조선을 사랑한 마음이 컸고, 그 마음으로 결국 이장되어 대한민국의 땅에 묻히게 되었다.


타국인으로서, 타국에 몸과 마음을 바쳤던 언더우드선교사의 삶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다문화 시대에 국가란 개념이 많이 흐려지고, 세계는 지구촌이라는 이름으로 정말 가까워져 있다. 그러나 언더우드선교사처럼 같은 국가의 국민이 형제였기보다 개개인의 마음에 품고 있는 나라, 그것이 바로 우리의 조국이고 마음의 고향이 될 수 있음도 기억하고 사람들을 단순히 국적으로 차별하지 않는 것이 다문화시대의 마음가짐이지 않을까 싶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우리나라 국민이지만 이제는 국적도 잃고, 오직 그들의 선조의 기억 속에 남아있지만 그리워하는 고려인들이 생각나면서, 우리가 다문화 시대에 다른 사람들을 잘 대해주어야 다른 나라 사람들도 고려인들을 잘 대해주지 않을까 하는 역지사지의 마음가짐도 가져야겠다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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