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자연이다 - 귀농 부부 장영란·김광화의 아이와 함께 크는 교육 이야기
장영란.김광화 지음 / 돌베개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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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란과 김광화 부부가 서울을 떠나 무주에 귀농하여 아이들을 키우면서 체험하고 깨달은
삶과 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부부가 함께 쓴 책이다. 
 
모든 생명은  자기 삶을 충실하게 살고자 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한 생명 본성이 살아 있는 아이들은 스스로 찾아 공부하고, 자기의 빛깔을 지닌 사람으로 성장한다. 생명본성과 아이들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되기까지 고민하고 갈등하는 부모의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내 아이를 한 생명으로 섬기고 있는가? 그리고 학교에서 교사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을 나의 틀에 억지로 맞추려 하는 것은 아닌지, 우리는 생명의 본성을 되찾게 해주는 교육을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지 되돌아 본다. 한편 아내와 남편이라는 서로 다른 입장에서 각 각 쓴 글들을 읽다 보면 서로 배려하고 이해하는 따뜻한 가족의 모습에 가슴이 훈훈해진다. 

  
   '병아리는 내게 잠자던 생명 본성을 일깨웠다. 우리 아이들도 자라는 생명이다. 병아리도 잘 하는데 우리 아이들이라고 못하란 법이 있겠나. 공부를 하는 이유도 다 잘 살자고 하는 것 아닌가. 잘 살자면 잘 배워야 하리라. 잘 배운다는 것은 뭔가. 바로 생명 본성에 충실한 배움이 아닐까. 맑은 눈빛을 촉촉이 적시는 배움, 싱싱한 배움, 아이 자신에게 가장 소중하면서도 절실한 배움. 거기서 새로 시작하자.' ( 53쪽 우리에게 절실한 배움/김광화 글 중에서)
 
'국가수준 성취도 평가' 라는 것 때문에 지쳐 늘어진 아이들을 보면서 우리 아이들에게 싱싱하고 소중하면서도 절실한 배움이 되도록 하려면 어찌해야 할 것인지... 길이 멀고 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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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죽음 - 오래된 숲에서 펼쳐지는 소멸과 탄생의 위대한 드라마
차윤정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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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해 부터 나무에 관한 책들을 조금씩 읽는 중이다. 우종영의 <나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와 고규홍의 <이 땅의 큰나무>,  정동주의 <느티나무가 있는 풍경> 이 그 동안 읽은 책이다. 지금까지 읽은 책들이 인간의 삶과 얽혀있는 나무에 관한 이야기였다면 이번에 읽은 차윤정의 <나무의 죽음>은 나무 자체가 가진, 인간으로서 미처 보지 못한 나무의 눈으로 본 새로운 세상를 보여주었다. 책장을 막 덮은 지금 오래된 숲의 나무에 기댄 생명의  거대한 대 서사시 한편을 읽은 느낌이다. 

 

  '죽음은 생명이 끝나는 것이지 관계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잊히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친밀한 사랑의 감정을 기억하는 한 잊히지 않는 죽음을 죽을 수 있다'라는 모리 선생의 말을 인용하여 위대한 사람의 사상은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삶의 지평을 넓혀주는 등불이 된다는 말로 시작된다. 저자는 나무의 죽음은 관계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나무의 죽음'은 성장의 끝점이자 소멸의 시작점이라고 한다.  그러나 결코 끝나지 않은 죽음이다. 나무의 소멸은 흙으로의 환원이다. 흙으로 돌아가기까지 나무가 살아온 시간보다 더 오래고 긴 시간에 걸쳐 소멸되는 과정은 숲의 생태계를 유지시키며, 숲 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 있는 것들과 공생의 관계를 철저히 보여줌과 동시에 서로 다른 생명으로 환생하는 삶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생명의 순환고리 속에서 그 누구도 우세하거나 열등하지 않고 공평하다.

  

 '우리에게 나무는 웅장한 줄기와 풍성한 수관에 온갖 생물이 깃들어 조잘거리는 살아 있는 생명으로만 기억됩니다. 죽은 나무는 단순히 목재로만 기억될 뿐입니다. 그러나 나무의 일생에서 이것은 반쪽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나무는 죽는 순간부터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지 결코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숲을 다양하고 풍부하게 만드는 일을 진행시켰습니다. 죽은 나무가 없었다면 딱따구리도 장수하늘소도 아름다운 버섯도 없습니다. 나무는 죽었으나 절대 죽은 상태로만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세계는 죽어 있는 세계를 토대로 세워집니다. 숲이 성장하고 오래될수록 나무의 죽음 이후는 중요해집니다. 살아 있는 숲은 죽은 나무에게 감사함을 전합니다. 이 경이로운 생태 드라마는 오래된 숲이 아니면 경험할 수 없습니다.'

 

  나무의 죽음은 관계의 끝이 아니라 생명의 시작이었다. 나무의 구조나 조직에 대한 낯설은 용어들과 수없이 등장하는 나무에 기댄 생명체들의 이름들이  책을 읽는데 다소 어려움을 느끼게 한 점도 있었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각종 미생물과 이끼, 곤충, 동 식물의 시선으로 섬세하게, 그리고 가슴으로 쓴 저자의 나무와 숲 이야기는 나무와 숲에 대한 상상력을 유발하였다. 오래된 숲이 아니라도 당장 주변의 나무 밑에 떨어져 있는 나뭇잎을 들어 그것에 깃들여 있는 잘 보이지 않는 생명체들을 찾아보고 싶어졌다. 나무와 숲에 대한 공부 뿐만 아니라 주변의 사물에 대한 상상력을 한껏 촉발시키고, 이 땅의 생명 있는 것들에 대한  존귀함을 느끼게 하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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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의 생활사
차윤정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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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차윤정의 나무와 숲에 관한 이야기에 푹 빠져 있다. <나무의 죽음>, <신갈나무 투쟁기>에 이어 <숲의 생활사>를 읽었다. 대개는 한 저자의 책을 연속해서 읽는 일은 지루해지게 마련인데 그이의 이야기는 계속 빠져들게 하는 매력이 있다. 숲에 대해 따로 공부를 하고자 한 것도 아니었는데 이유가 무엇일까?

 

   그이의 나무와 숲에 관한 이야기를 읽다 보면 세상 모든 것들이 경이로워진다. 우리를 감싸고 있는 공기가, 무심히 내리쬐는 햇빛 한줌이, 이름 모르는 풀꽃 한 송이가, 나뭇잎을 간질이는 바람 한 점이 예사롭지 않는 것이 없다. 식물이라는 말에서 풍기는 수동적이고 정적인 느낌을 확 걷어가 버리기도 한다. 이 세상에 나 이외에 수없이 많은 생명체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생명 있는 것들에 대하여 저절로 경의를 표하고 싶어진다. 숲을 이루는 풀과 덤불과 나무 하나하나가 씨앗에서 싹을 틔워 잎을 피우고 줄기를 키워 열매를 맺는 일이 자연의 순리라고만 하기엔 아쉬운 무엇인가가 있다. 그 모든 것들이, 그 모든 일들이, 그 모든 순간이 치열하게 살아가는 일인 것이다. 이름도 없는 풀과 미생물에서부터 몇 백 년씩 살면서 거대한 몸짓을 키우는 나무에 이르기 까지 삶을 위한 투쟁 아닌 것이 없으면서도 공존의 세상을 이루는 숲!

 

   숲에게 사계절은 생활이다. 봄에는 생명 있는 것들이 기지개를 켜고 땅과 대기가 녹아 분주한 생활이 시작된다. 마른 대지를 날아온 바람이 대지의 따스한 열을 받아 부드럽게 부풀어 올라 씨앗도, 사람도 설레이며 바람이 난다 한다. 그 바람으로 은밀하게 피어나는 꽃들과 깨어나는 나무들. 식물에게 꽃을 피우는 일은 혁명과도 같은 사건이란다. 여름은 격정적인 성장의 계절이다. 여름의 숲은 뜨거운 열기만큼이나 강한 욕구와 치열함이 들끓는 곳이다. 공기와 빛과 물을 이용해 10톤 이상의 물질을 생산해 내고, 폭풍 속에서 세력이 재편되며, 때론 무모한 욕망으로 맞이하게 되는 죽음마저도 다른 생명을 품는 일이 된다. 가을은 겨울을 준비하라는 자연이 베풀어준 관용이라고 한다. 왕성한 생장을 도모했던 나무는 세포 속의 물질들을 분해하고 정리한다. 뜨거운 욕망을 부추기던 여름의 강렬한 햇빛에 비하여 집착이 사그라든 빛과 열은 숲을 가볍고 헐거운 공간으로 변화시킨다. 그리하여 우리는 무언가에 애정을 품게 되고 사색을 하게 한다고. 한편 치열했던 여름의 결실로 맺어진 열매들은 영토 확장의 꿈을 품고 새로운 시작을 위한 여행을 떠난다. 바람이 숲을 방랑하는 계절, 겨울에 나무는 전설의 기억을 간직하고 겨울을 난다. 봄이면 바람이 방문했던 기억과 산새들이 재잘거렸던 수다와 가슴을 울렸던 소쩍새의 전설을 기억하면서 다시금 봄을 준비한다.

  

   대상에 대한 따뜻하고 섬세한 시선으로 그려낸 <숲의 생활사>는 숲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자연 현상에 대한 풍부한 감성과 통찰의 눈을 길러주는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꽃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식물에게 저마다의 꽃을 피워내는 일은 자신의 생명을 발현시키는 일이기도 하면서 또 다른 생명을 만들어내고 키우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나는 살면서 어떤 꽃을 피워낼까? 내가 피워낸 꽃은 어떤 열매를 맺어낼 것이며, 다른 존재에게 무엇이 되어 줄 수 있을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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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터 -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선물
글렌 벡 지음, 김지현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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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살아 있는 것은 흔들리면서 / 튼튼한 줄기를 얻고 / 잎은 흔들려서 스스로 / 살아 있는 몸인 것을 증명한다 // 바람은 오늘도 분다 / 수만의 잎은 제각기 / 몸을 엮는 하루를 가누고 / 들판의 슬픔 하나 들판의 고독 하나 / 들판의 고통 하나로 / 다른 곳에서 바람에 쓸리며 / 자기를 헤집고 있다 // 피하지 마라 / 빈 들에 가서 깨닫는 그것 / 우리가 늘 흔들리고 있음을. - 오규원의 시 <살아 있는 것은 흔들리면서>

 

내가 근무하는 학교는 하의도(荷衣島)에 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배와 열차를 타고 집에 다녀온다. 집에 갔다 오는 길에 글렌 벡의 <세상에서 가장 따듯한 선물, 스웨터>를 읽게 되었다. 책을 읽는 내내 우리 반 OO 생각이 났다. 그래서 이 책을 진주에게 선물해야지 하고 학교에 왔는데 OO는 토요일 하의도에서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내가 너무 늦은 것일까?

 

열두 살 소년 에디는 크리스마스에 원하는 빨간 허피 자전거를 받지 못하고 엄마가 손수 뜨개질한 스웨터를 선물 받는다. 그러나 에디에게 그 선물은 구차한 생활의 증거일 뿐이었다.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위해 온 할아버지 댁에서 평소 좋아했던 할아버지의 유머도, 할머니의 다정함도 위로가 되지 못하였다. 급기야는 엄마에게 심통을 부리며 자고 가자는 엄마의 부탁을 뿌리치고 밤길을 나섰다. 그런데 그만 엄마가 교통사고로 죽었다. 자신 때문에 엄마 마저 잃었다는 죄책감으로 에디는 마음의 문을 걸어 닫아버린다. 함께 살게 된 할아버지 할머니의 따뜻한 사랑을 알면서도 한번 엇나가기 시작한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자신을 점점 거칠고 험한 폭풍 속으로 몰아가는데 · · ·.

 

“모든 일에는 다 그 일이 일어나는 이유가 있는 법이지. 하지만 그 이유를 찾아내고, 거기서 뭔가를 배우고, 그리고 거기서 끝내는 게 아니라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방법을 구하는 건 전적으로 너한테 달려 있어. 사는 게 고단하고 힘들다고 불평만 하며 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삶을 책임지는 사람은 너야.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 행복하게 살겠다. 불행하게 살겠다. 그 마음을 정하고 나면 아무것도, 그러니까 네가 스웨터를 갖게 되든 자전거를 갖게 되든, 바뀌는 건 없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엄마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다.

 

OO는 오월에 우리 학교로 전학을 왔다. 하의도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생활한다. 다섯 명이던 우리 반에 새로운 구성원이 왔는데 반가움보다 걱정이 앞섰다. 그 아이 보다 먼저 도착한  이력과 함께, 교사를 대하는 당돌한 태도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였다. 한 달이 지나서 OO의 집에 우리 반 아이들과 함께 다녀오던 날 처음으로 아이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그럼에도 나는 OO에게 정말로 마음을 열지 않았던 모양이다. 책을 OO에게 선물해야겠다고 생각한 속내에는 ‘선택은 너의 몫이니 삶은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고 아이를 가르치고 싶었던 것이다.

 

자전거는 이미 에디를 위해 준비되어 있었지만 어른들은 가르치기 위해 선물 주는 것을 미룬다. 그 순간에 일이 빗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자전거보다 스웨터가 더 소중한 선물이라는 것을 아이가 깨닫도록 어떻게 했어야 할까?

 

“가족은 네가 살아가면서 만날 수밖에 없는 폭풍 속에서 쉴 곳을 마련해주는 사람들이야.”

가족은 짐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할아버지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선물이 될 기회를 잃어버린 자전거를 타고 집을 떠난다. 무서운 폭풍 속에서 에디는 러셀 할아버지를 만난다. 러셀 할아버지는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고 위로받고 싶었던 에디가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이다. 무엇이 되는가 보다 어떤 사람이 되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말을 해 주었던 사람이다. 아이들에게 어떤 사람이 되는가보다 무엇을 되라고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강요하지는 않았는지. 나는 아이에게 어떤 사람이었을까?

 

폭풍 속에서 러셀 할아버지는 말한다. 네 자신을 믿는 일이 중요하다고. 살아가면서 누구나 한번쯤은 폭풍을 만난다. 그 폭풍을 헤쳐 나가야 하는 것도 자신의 문제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아이가 그럴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비롯될까? 네 문제라고 방관은 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마음에 걸린다.

 

내게도 중학교 1학년인 딸이 있다. 주말에 집에 갔더니 야영수련회 갔다 와서 온 몸이 아프단다. 온갖 엄살을 떨면서 밥을 침대에서 먹고 싶다고 하였다. 어이가 없었지만 그래, 네가 많이 위로받고 싶구나 생각했다. 아이의 야영 때 있었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 반 아이들이 생각났다. 우리 반 일학년 세 명은 모두 조부모와 생활하고 있다. 내 아이가 이럴진대 그 아이들은 누구에게 이렇게 응석을 부릴까? 출근하면 아이들에게 따뜻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 해야겠다 생각했는데...

 

OO를 만나면 단단한 방어벽이 느껴졌다. 왜 그래야 하는지 잘 따지고 학교의 규칙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래도 개학을 한 후 가끔 내 손을 잡아 오기도 해서 안심을 했었다. 그런데 아직 OO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나 보다. 연락이 닿지 않은 OO를 기다리면서 답답해서 바람을 쐬러 가고 싶다던 그 아이의 말이 가슴에 걸려 아프다.

 

아침 자율학습 시간 우리 반 교실에서 오규원의 <살아 있는 것은 흔들리면서>를 아이들과 함께 읽었다. OO는 흔들리지만 살아 있다고 몸짓을 하고 있는 거라고, OO도 지금 힘들고 마음 아플 거라고, OO가 오면 따뜻하게 맞이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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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열쇠
A. J. 크로닌 지음, 황관순 옮김 / 상서각(책동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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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내렸습니다.

   저 이름 없는 풀포기 아래, 돌멩이 밑에 잠 못 이루며 흐느끼는 귀뚜라미의 울음소리(귀뚜라미 울음, 민영의 시) 가까이 들립니다. 선생님, 건강하신지요?

   얼마 전 <교실밖 교사커뮤니티(이하 교컴)>에서 선물 받은  A.J.크로닌의『천국의 열쇠』를 읽었습니다. 한 신부의 삶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어떤 사람인가? 교사로서 나는 아이들에게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를 묻는 책이었습니다.

   소설의 내용은 프랜치스 치셤 신부의 일대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정직하고 순수한 영혼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느님에게 성실하고 충성하는 사제이면서도 인간적입니다. 잘 나가는 친구에 대하여 질투하고, 고위 성직자들의 위선에 분노하고, 자신에게 매달려 있는 약한 사람들을 책임져야 될 때 불안해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에 대한 믿음,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은 고난을 견뎌내게 하는 힘입니다. 세상의 성공을 좇지 않고 자신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일에 집중하는 그의 삶은 진정으로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였습니다. 

   비록 소설 속에서지만 한 사람의 삶이 이렇게 감동을 준 것은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맑고 고귀한 영혼이 내뿜는 향기로 함께 맑아지는 느낌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독서모임 회원이며, 선배 동료교사로 함께 근무했던 지난 일년 동안의 일들이 떠올랐습니다.

   지난해 하의도에 발령 받아 처음 오던 날, 세 시간 동안 배를 타고 올 때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하는 생각에 착잡했습니다. 제가 섬에서 근무하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치셤 신부가 중국의 오지 파이탄으로 해외 선교를 떠날 때 그러하였을까요?

   하의중·고등학교. 교사와 학생을 모두 합해 오십 명도 되지 않은 작은 학교입니다. 그래서 아이들과 알콩 달콩 즐겁게 살 수 있으리라는 꿈을 꾸기도 했지요. 그런데 복식 학급에 야간 자율학습, 쏟아지는 공문, 형식에 치우친 교육과정 운영으로 인한 학생과 수업의 소외는 대한민국 교육의 폐해는 모조리 모아놓은 듯 했지요. 거기다 관리자들의 권위만을 내세운 억압적 분위기, 승진을 향한 보이지 않는 암투, 교사들의 냉소적인 태도와 의사소통의 부재는 더욱 숨 막히게 하였지요. 아이들은 순박하였지만 결손가정이 많았으며 학교의 억압적인 분위기 때문인지 학습 능력은 낮고 자존감도 약했습니다. 섬은 그야말로 유배의 땅이었습니다.

  그렇게 무기력한 채로 시간을 견디고만 있던 어느 날, 선생님께서 에밀리 디킨슨의 시 <만약 내가>를  수업시간에 아이들에게 읽어주신 거라면서 저에게 주셨습니다.

만약 내가 한 사람의 가슴앓이를 / 멈추게 할 수 있다면,/ 나 헛되이 사는 것은 아니리. / 만약 내가 누군가의 아픔을 / 쓰다듬어 줄 수 있다면, / 혹은 고통 하나를 가라앉힐 수 있다면, / 혹은 기진맥진 지친 한 마리 울새를 / 둥지로 되돌아가게 할 수 있다면, / 나 헛되이 사는 것은 아니리.

   내가 살면서 단 한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아픔을 위로하고 따뜻하게 해 줄 수 있다면 헛된 삶은 아닐 거라고 하시면서, 교사는 아이들에게 그와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지요. 그래야 아이들이 세상에 나가서 자존감을 가지고 따뜻함을 나누어 주는 사람이 된다면서요. 

  프랜치스 치셤의 곁에도 따뜻한 사람들이 있었지요. 다정하고 따뜻한 폴리 아줌마, 무신론자이지만 박애주의를 실천하는 의사 친구인 윌리 탈록, 신학교 시절에 치셤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여준 맥납 교장 선생님, 사고방식은 다르나 정직하고 이웃에 대해 헌신적인 마리아 베로니까 수녀, 중국에서 해외 선교를 할 때 이방인에 대해서 관용과 아량을 베푼 챠씨와 치셤을 믿고 신뢰하며 따르던 요셉 등이 그러한 사람들입니다. 그가 국가나 민족을 넘어, 종파를 초월하여 인간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그들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었을까요?

  하느님의 사랑을 전파하고자 고향을 떠나 수십년간 생활한 이국 땅에서 그가 찾은 천국의 열쇠는 마음을 쏟아 일을 하고, 그 기쁨과 대지에 호흡을 맞추어 소박하게 살아가는 삶이라 하였습니다. 내가 마음을 쏟고 호흡을 맞추어 살아가야 할 대지는 무엇일까요?

  지금까지 오로지 내 기준으로 세상을 판단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칼질을 해 대던 저에게, 부드러운 것이 강하다는 것을 가르쳐주시고, 아이들에게 내 마음을 쏟아야 됨을 깨닫게 해 주셨던 분이 바로 선생님이셨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공부하는 교사가 되어야 한다고, 그 공부가 사람을 따뜻하게 품는 일이어야 하며,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이 자신을 성찰하며 세상 보는 안목을 깊게 하는 일이라 말씀해 주시던 그 때가 그립습니다.  

  선생님께서 저희 학교를 떠난 뒤에 우리 학교에 신규 선생님들이 네 분이나 오셨습니다. 그들을 보면서 다시 선생님의 자리를 돌아봅니다. 선생님으로부터 받았던 것들을 이제는 내가 후배들에게 돌려주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한 사람의 아픔을 어루만져주거나 고통을 대신하지 못할지라도, 이름없는 풀벌레 소리에 귀 기울이듯 내가 아이들과 동료교사,  그리고 주변의 이웃에게 마음을 기울이는 가을이기를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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