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의 열쇠
A. J. 크로닌 지음, 황관순 옮김 / 상서각(책동네)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내렸습니다.

   저 이름 없는 풀포기 아래, 돌멩이 밑에 잠 못 이루며 흐느끼는 귀뚜라미의 울음소리(귀뚜라미 울음, 민영의 시) 가까이 들립니다. 선생님, 건강하신지요?

   얼마 전 <교실밖 교사커뮤니티(이하 교컴)>에서 선물 받은  A.J.크로닌의『천국의 열쇠』를 읽었습니다. 한 신부의 삶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어떤 사람인가? 교사로서 나는 아이들에게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를 묻는 책이었습니다.

   소설의 내용은 프랜치스 치셤 신부의 일대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정직하고 순수한 영혼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느님에게 성실하고 충성하는 사제이면서도 인간적입니다. 잘 나가는 친구에 대하여 질투하고, 고위 성직자들의 위선에 분노하고, 자신에게 매달려 있는 약한 사람들을 책임져야 될 때 불안해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에 대한 믿음,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은 고난을 견뎌내게 하는 힘입니다. 세상의 성공을 좇지 않고 자신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일에 집중하는 그의 삶은 진정으로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였습니다. 

   비록 소설 속에서지만 한 사람의 삶이 이렇게 감동을 준 것은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맑고 고귀한 영혼이 내뿜는 향기로 함께 맑아지는 느낌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독서모임 회원이며, 선배 동료교사로 함께 근무했던 지난 일년 동안의 일들이 떠올랐습니다.

   지난해 하의도에 발령 받아 처음 오던 날, 세 시간 동안 배를 타고 올 때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하는 생각에 착잡했습니다. 제가 섬에서 근무하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치셤 신부가 중국의 오지 파이탄으로 해외 선교를 떠날 때 그러하였을까요?

   하의중·고등학교. 교사와 학생을 모두 합해 오십 명도 되지 않은 작은 학교입니다. 그래서 아이들과 알콩 달콩 즐겁게 살 수 있으리라는 꿈을 꾸기도 했지요. 그런데 복식 학급에 야간 자율학습, 쏟아지는 공문, 형식에 치우친 교육과정 운영으로 인한 학생과 수업의 소외는 대한민국 교육의 폐해는 모조리 모아놓은 듯 했지요. 거기다 관리자들의 권위만을 내세운 억압적 분위기, 승진을 향한 보이지 않는 암투, 교사들의 냉소적인 태도와 의사소통의 부재는 더욱 숨 막히게 하였지요. 아이들은 순박하였지만 결손가정이 많았으며 학교의 억압적인 분위기 때문인지 학습 능력은 낮고 자존감도 약했습니다. 섬은 그야말로 유배의 땅이었습니다.

  그렇게 무기력한 채로 시간을 견디고만 있던 어느 날, 선생님께서 에밀리 디킨슨의 시 <만약 내가>를  수업시간에 아이들에게 읽어주신 거라면서 저에게 주셨습니다.

만약 내가 한 사람의 가슴앓이를 / 멈추게 할 수 있다면,/ 나 헛되이 사는 것은 아니리. / 만약 내가 누군가의 아픔을 / 쓰다듬어 줄 수 있다면, / 혹은 고통 하나를 가라앉힐 수 있다면, / 혹은 기진맥진 지친 한 마리 울새를 / 둥지로 되돌아가게 할 수 있다면, / 나 헛되이 사는 것은 아니리.

   내가 살면서 단 한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아픔을 위로하고 따뜻하게 해 줄 수 있다면 헛된 삶은 아닐 거라고 하시면서, 교사는 아이들에게 그와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지요. 그래야 아이들이 세상에 나가서 자존감을 가지고 따뜻함을 나누어 주는 사람이 된다면서요. 

  프랜치스 치셤의 곁에도 따뜻한 사람들이 있었지요. 다정하고 따뜻한 폴리 아줌마, 무신론자이지만 박애주의를 실천하는 의사 친구인 윌리 탈록, 신학교 시절에 치셤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여준 맥납 교장 선생님, 사고방식은 다르나 정직하고 이웃에 대해 헌신적인 마리아 베로니까 수녀, 중국에서 해외 선교를 할 때 이방인에 대해서 관용과 아량을 베푼 챠씨와 치셤을 믿고 신뢰하며 따르던 요셉 등이 그러한 사람들입니다. 그가 국가나 민족을 넘어, 종파를 초월하여 인간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그들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었을까요?

  하느님의 사랑을 전파하고자 고향을 떠나 수십년간 생활한 이국 땅에서 그가 찾은 천국의 열쇠는 마음을 쏟아 일을 하고, 그 기쁨과 대지에 호흡을 맞추어 소박하게 살아가는 삶이라 하였습니다. 내가 마음을 쏟고 호흡을 맞추어 살아가야 할 대지는 무엇일까요?

  지금까지 오로지 내 기준으로 세상을 판단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칼질을 해 대던 저에게, 부드러운 것이 강하다는 것을 가르쳐주시고, 아이들에게 내 마음을 쏟아야 됨을 깨닫게 해 주셨던 분이 바로 선생님이셨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공부하는 교사가 되어야 한다고, 그 공부가 사람을 따뜻하게 품는 일이어야 하며,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이 자신을 성찰하며 세상 보는 안목을 깊게 하는 일이라 말씀해 주시던 그 때가 그립습니다.  

  선생님께서 저희 학교를 떠난 뒤에 우리 학교에 신규 선생님들이 네 분이나 오셨습니다. 그들을 보면서 다시 선생님의 자리를 돌아봅니다. 선생님으로부터 받았던 것들을 이제는 내가 후배들에게 돌려주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한 사람의 아픔을 어루만져주거나 고통을 대신하지 못할지라도, 이름없는 풀벌레 소리에 귀 기울이듯 내가 아이들과 동료교사,  그리고 주변의 이웃에게 마음을 기울이는 가을이기를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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