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율 사회에서 성과 사회를 거쳐 도핑 사회라니. 서늘하다. 한편, 나의 불안과 무력함과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줄어드는 자신감은 개인적인 문제만은 아니었다는 데 위로를 받는다. 반쯤은 이해했고 반쯤은 뭔소린가 하면서 읽었다. 두꺼웠으면 절대 끝까지 못 읽었을거다.
전에 읽다가 포기했던 적이 있었다. 올 겨울에 문득 다시 읽고 싶은 마음이 들어 다시 책을 펼쳤을 때, 그 첫 문장에서부터 마음을 빼앗겼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자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섰다.˝눈이 가득한 고장. 그 고요하고 서정적인 분위기. 아름다운 문장들. 아름다운 그 풍경이 눈 앞에 펼쳐지는 듯 했다. 밤새 눈이 내려 흰 눈이 소복하게 쌓인 들판. 첫 새벽에 아직 그 누구의 발자국도 남지 않은 깨끗한 눈 위를 한 발짝씩 조심스럽게 내딛는 기분이었다. 기분좋은 뽀드득하는 소리와 차가운 공기, 코끝에서 느껴지는 시원한 기운. 책을 읽는 내내 눈의 나라에 있는 것 같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를 좋아한다. 당연한 것이겠지만 그의 글은 그의 영화와 닮았다. 책을 읽는 동안 마음이 잔잔해지는 걸 느낀다. 그리고 조용하게 느껴지는 온기.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이 몹시도 다시 보고 싶어졌다. 덧붙임. 책을 읽으면서 자꾸만 하루키가 겹쳐진 건 무엇때문일까? 어쩌면 이 둘은 비슷한 성향인 걸까? 어쨌든 하루키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즐거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