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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과거시제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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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과거시제_ 그 말은 강은신이 겪은 '그 일'이, 은경도 기억할 수 있는 과거가 아닌, 은경만은 절대 기억해서는 안 되는 미래에 일어난 일이라는 뜻이었다. _117p.

표제작 「미래과거시제」는 튀르키예어의 시제 어미라는 독특한 소재가 특히나 돋보이는 작품이다. ㅡ이미 겪은 일을 서술할 때만큼이나 확신을 가지고 미래의 일을 입에 담다.ㅡ 은경의 이러한 생각들과 '-암-/-엄-'이라는 어미를 만들어 쓰던 '그'와의 경험들이 곧 「미래과거시제」를 만들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은경은 그의 각별했던 언어와 텍스트의 흔적을 연구하는 과정 속에서 '그', 강은신이 다른 시간대의 인물이었음을 깨닫는다. 은신의 문장이 이미 과거를 내다보고 있을 때, 그 특이한 말버릇이 함께 쓰이던 것이다. 텍스트와 시간 여행의 요소가 다각도로 넘나들며, 마치 추리소설을 보는 듯한 재미를 느끼게 해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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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 어웨이_ "홈팀 유니폼이 하얀색이잖아. 그게 원정팀이 며칠간 집을 떠나 있는 상황이라, 운동복 더러워진 거 세탁하기가 어려워서 그런 거래. ... 흰옷 빠는 건 홈팀이 유리하잖아." _281p.

먼지가 추천해준 글쓰기 애플리케이션은 첫 화면에서 흰 유니폼, 하늘색 유니폼 선택에 따라 상반된 오디오를 재생한다. 홈팀을 뜻하는 흰 유니폼을 선택하면 텍스트를 적을 때마다 관객들의 환호성이 들리지만, 원정팀을 뜻하는 하늘색 유니폼을 선택하면 무엇을 적더라도 독한 야유가 들려온다. 먼지의 한마디로 유니폼의 의미도 모른 채 흰 유니폼을 선택했던 '나'가 슬럼프를 극복한 뒤, 자신에게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있던 소희에게도 이를 추천한다. 다만 유니폼 뜻을 알려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채고, 이후에 나온 소희의 작품은 ㅡ지옥의 원정 경기를 승리로 장식하고 돌아온 자만이 품을 수 있는 맹독ㅡ(284p.)을 머금고 있었다.

슬럼프를 극복하는 상반된 방식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 같다. 무조건적인 칭찬과 격려보다는 집요하고 날카로운 지적이 원동력이 되기도 하니까. 작가 노트에 따르면 팬데믹으로 멈춘 창작과 이후의 회복을 다루었다고 한다. 작가와 독자의 거리를 오디언스를 포함한 애플리케이션으로 좁힌 것도 참신했고, '문학에도 이러한 추임새를 도입하면 어떨까?'싶은 발상이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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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눈사람
최승호 지음, 이지희 그림 / 상상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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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주인공은 작가 또한 언급했듯이 눈사람이다. 때문에 더욱이 최승호 시인의 대표작인 「눈사람 자살 사건」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매순간 김서린 생애만 붙잡았던 눈사람이 삶의 마지막만큼은 따뜻하길 소망하는 그 작품이 대중들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 시기가 있었다. 다만 『마지막 눈사람』은 순식간에 찾아온 빙하기에 홀로 남겨진 눈사람의 시점으로 시작한다. 모든 생명이 스러지는 순간에 눈사람만큼은 오히려 눈송이가 불어나 살이 찐다.
여전히 눈보라가 치는 종말 가운데 눈사람은 자괴파괴적인 생각까지 도달한다. 그 다음 장에 배치된 시가 「눈사람 자살 사건」이다. 스스로 따뜻한 물을 튼 뒤 욕조에서 잠이 든 눈사람과는 달리, 「마지막 눈사람」에서의 눈사람은 차라리 자살 같은 추락사를 원하고 있다. 빌딩 붕괴로 부서진 눈사람을 과연 '자살'했다고 판명할 수 있을까. 그것이 타살이든, 사고사든 그저 눈사람은 이 저주같은 고독을 '능동적으로' 끝맺기를 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요란한 고요를 스스로 멈추고 끝내 눈감기를 조용히 바라고 있다.

그리하여 이렇게 밤의 옥상 위에서 고독만이 나의 뼈라고 생각하면서, 강물이 흐르고 새들이 지저귀는 먼 봄을 마냥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_130p.

슬픈 모순이다. 생명력이 움트는 봄을 기다리는 이유가 오직 자신의 죽음이라는 점에서 굵직한 매듭이 풀리지 않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최승호 시인이 눈사람을 큰 상징물로 삼는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다. 모두가 죽어서야 자신이 살이 찌고, 모두가 살아날 때에 비로소 자신은 사라진다. 영원히 멈추지 못하는 고독 속에서 눈사람은 사는 것 같지도, 죽지도 못하는 삶을 이어 나갈 것이다. 자살 같은 생각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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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와 프로파일러 - FBI 프로파일링 기법의 설계자 앤 버지스의 인간 심연에 대한 보고서
앤 울버트 버지스.스티븐 매슈 콘스턴틴 지음, 김승진 옮김 / 북하우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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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리아의 마음을 편안하게 달래주고 곁에 있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마리아에게는 그렇게 가까이에서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내가 폭력범과 다를 바 없었다. _25p.

호의를 기반한 접촉이 타인에게 폭력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일종의 상호작용을 알게 된 이 책의 저자가 사건 파악을 위해서는 피해자뿐만이 아니라 가해자의 영역 또한 파고들어야 함을 깨닫게 된 계기다. 이 작은 계기는 뜻이 모아지면서 앞으로의 범행 연구의 발전 가능성을 톡톡히 보여주고 있다.
추리 소설에 재미 붙였던 적이 있어서 프로파일링에 대한 내용이 특히 흥미로웠다. 프로파일링에서 범죄자 분석 방식 중 하나는 ㅡ행동을 예측하는 데 성격을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성격을 예측하는 데 행동을 활용ㅡ(101p.)한다는 점이다. 그들의 불규칙적이고 본능적인 것처럼 보이는 행동은 모두 정교화하여 새롭게 범주화가 가능하다. 표면적으로 찾기 힘든 그들 사이 공통 분모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점은 앞으로도 프로파일링이 절실히 필요함을 시사한다.

전체적으로 저자의 박사 과정으로부터 시작되는 프로파일링 일지를 읽는 듯한 기분이었다. 경험을 통해 얻은 자그마한 통찰이 나중에 큰 시사점을 도출해내는 과정은 빈틈없이 모두 다 연쇄적으로 짜 맞춰져있다. 특히 원초적이고 날것의 무언가로 뒤덮인 듯한, 대중에게는 그저 '정신이상자'(42p.)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게 여겨지는 살인자들의 속성과 동인을 체계적으로 분석하는 데 힘을 쏟는 모습과 용기를 보다 보면,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방식과 연구로 세상을 바꾸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을 마음 속 깊이 알 수 있었다.

첫 장에 경고 문구가 있다. 적나라한 워딩에 트리거를 가지고 있다면 정말 주의해야 한다. 시신의 상태, 훼손한 정도, 참혹한 피해 상태를 여러 문장으로 직접 마주하다보면 직접적 트리거가 없더라도 문장을 전부 읽기 힘들 정도가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게 그저 소설이나 판타지가 아니라, 지극한 현실이라는 사실에 또 한번 머리가 아파온다.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살아 있고 숨쉬는 사람들'(389p.)의 생명을 찢어버린 살인자들의 심리와 행동 특성, 그외의 것들이 잘 정리되고 잡혀 있음으로써 우리는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또다른 피해자가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시작이에요. 자, 그럼 연쇄살인범을 찾으러 가시죠." _41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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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안녕 샘터어린이문고 71
박주혜 지음, 김승혜 그림 / 샘터사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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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 동물 실험을 통해 화장품을 만드는 회사 직원의 매몰찬 대답 중 일부분이다. 사람을 위해 동물을 희생시키는, 그리고 그게 당연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모두 씨는 단호하게 대답한다. "그래. 괜찮지 않지. 이건 아니잖아." (14p.) 마지막 실험 대상이었던 토끼 한 마리를 데리고 '동물실험자'를 상징하는 흰 가운을 벗어 던진 모두 씨는 목적지가 없는 여정을 떠나며 많은 것들을 깨닫는다.
우연히 찾아온 동네에서 모두 씨는 칙칙한 잿빛같던 세상에서 벗어나, 자신이 데려온 토끼 '안녕'이와 함께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인공적인, 수없이 희생된 동물들의 피가 맺힌 화장품을 만들어왔던 모두 씨는 빵집을 개업하고 자연을 만끽할 수 있게 된다. 자연만을 담아 만든 빵은 손님들에게 큰 행복과 여운을 가져다 준다. 모두 씨가 각 손님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빵 한 조각에 풍족히 담아주기 때문이다.

마음이 계속 커졌으면 좋겠어요. 먼저 손 내밀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73p.

모두 씨가 연 빵집이자 이 책 제목인 <모두의 안녕>은 주인공인 모두 씨와 토끼 안녕이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모두'가 '안녕'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지었을 것이다. 약자를 해하거나 괴롭히지 않고, 다같이 걸어나가려는 의지와 용기가 문장마다 배어 있다.
종종 나오는 포근한 그림들이 인상 깊은 동화책이다. 화학물질이 아닌 정성과 애정을 첨가한 빵이 부디 모두 씨와 안녕이에게도 잊을 수 없는 맛으로 남겨졌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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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드라이너
임국영 지음 / 창비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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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셰비키가 왔다』

우선 열일곱스러운 미성숙함, 생각은 좀 짧지만 줏대 있는 성격이 잘 묘사된 점이 흥미로웠다. 남과 다를 바 없는 오빠의 장례식장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나'는 오빠의 지인들, 같이 록을 한 밴드 '볼셰비키' 멤버들을 통해 생일마저 모르던 오빠에 대해 점점 알아간다. 독특한 점은, 그로울링과 비슷한 행위가 반복되어 나타난다. 그건 하나의 퍼포먼스이기도, 혹은 모든 걸 쏟아내려는 발악인 것도 같다. 그에 따라 의문이 계속 쌓여가는 소설이다. 토사물을 게워내지 못해 떠나간 혁태와, 절정에서 끝내 참지 못하고 빈소 안쪽으로 들어와 토를 쏟아낸 '나'는 어떤 연결점을 가지고 있는 걸까. 상복을 입은 채 뺨을 맞아 부어오른 볼을 사진으로 남기고자 한 '나'는 어떤 마음을 품고 그런 결정을 한 걸까.

『악당에 관하여』

서평 명목으로 스토리의 진행과 묘사에 대한 진중하고 깊은 감상을 적어내고 싶었는데, 이 소설은 그저 ㅡ재밌다ㅡ는 말로 정리하고 싶을 정도로 재미있었다. 소설은 한 번 읽을 때의 임팩트가 강하거나, 여러 번 읽을수록 진하게 와닿는 부류로 나뉜다고 생각한다. 『악당에 관하여』는 후자에 해당한다. 염색체 끝부분을 의미하는 텔로미어가 짧아짐으로써 노화 진행이 이루어지지만, 이와 달리 암세포는 텔로미어가 줄어들지 않는다. 이 암세포는 마치 '나'를 완전히 장악해버린 것만 같았다. 스스로를 갉아먹는 암세포에 취한 '나'는 A의 민낯을 들추기 위해 추할 정도로 A를 비난하기에 이른다. 작가와 편집자의 경계, 주인공과 악당의 경계를 너무나 명확히 그음으로써 자신의 작품의 정당성을 합리화하고자 한다. 전설의 편집자로 이름을 떨치던 A의 피어오르는 허망감, '나'의 자기 파괴적 태도를 그저 '술자리'라는 단순한 배경 속에서 첨예하게 대립시키는 묘사가 굉장히 흥미진진했다. 자신의 의견이 철저히 묵살된 '나'는 홀로 남은 곳에서 마치 텔로미어처럼 단번에 쪼개지는 게 아니라, 점점 썩어가듯 닳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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