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죄의 메아리
샤를로테 링크 지음, 강명순 옮김 / 밝은세상 / 2015년 10월
평점 :
절판
물질적으로 풍요로울대로 풍요로워진 요즘이지만, 삭막해졌다는 이야기를 흔히 한다. 무한 경쟁시대의 이면에 퇴적된 단면들이 반인륜적인 범죄로 드러나는 일을 드물지않게 발견하기 때문이다. 불특정다수를 상대로 한 매스 미디어 ( mass media)의 대중문화로서의 순기능이 쇠퇴하고, 익명성을 무기로 한 SNS가 파격적으로 확장된 원인이 크다 할 수 있다.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마땅한 역할부여를 받는 대신 낙오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반사회적인 현상이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 과연 내 소중한 가족에게 그런 끔찍한 일이 생긴다면, 어떻게 처신할 수 있으며, 극복할 수 있던가?" 떠올리기도 조차 가슴 막막해지는 무거운 주제앞에 독일작가 샤를로테 링크는 <죄의 메아리>라는 책속에 정교한 묘사로 담아내고 있다. 10대 때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는 그녀의 엄청한 스팩트럼은 이 책에도 고스란히 담겨있다. '일확천금'을 향한 형제간 친구간의 반목, 출생의 비밀을 주류로 삼고있는 통속적인 우리 세태의 소설과는 기본맥락을 달리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해볼 점이다. 가장 인간적인 내면을 이해하기 위해 '철학'의 학문이 존재한다. 이 정통학문을 이야기할때 빼놓을 수 없는 나라가 바로 독일이다. 보통 장편소설의 깊이는 200자 원고지로 환산되지 않지만, 300매 이상의 기술일때 인정된다. <죄의 메아리>는 무려 500페이지가 넘는다. 책으로 편집된 용적이 이 정도이니, 원고지에 써내려간 깊이는 가늠하기 힘들 정도이다. 과히 독일 국민작가로 불릴 만한 각인요소이다.
책은 철저하게 과거- 현재를 넘나들며 복선적인 전개와 함께 여러 인물을 오가는 치밀한 심리묘사로 이뤄져있다. 1995년 시점으로 거슬러올라가 삶에 지친 한 남자의 꿈이야기 에서부터 전개한다.
꿈속, 그의 눈앞에 소년의 모습이 보였다. 초롱초롱한 눈망울, 환한 미소, 이빨이 몇 개 빠진 자리들, 겨울에는 잘 드러나 보이지 않다가 봄이 되면 따스한 봄볕을 받아 짙어지던 주근깨들, 제멋대로 뻗친 덥수룩한 검은머리.
- 프롤로그 p7 中 -
비록 꿈속이지만 소년의 머리카락에 코를 들이대는 순간 가슴이 저리도록 그리움이 밀려왔다. 다음 순간 소년의 모습이 희미해지며 끔찍한 장면들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회색빛 아스팔트가 깔려 있는 도로,...
-프롤로그 p7 中 -
온몸이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고, 심장이 요란하게 뛰고 있었다. 그가 숨을 헐떡이고 있는 동안 옆에 누운 여자는 세상모르고 잠에 빠져들어 있었다. 사고가 발생한 이후 그가 매일 밤 악몽에 시달리는동안 그녀는 신기하게도 잠을 잘 잤다.
-프롤로그 p8 中 -
서두에서부터 앞으로 전개될 소설의 단면이 결코 밝지 않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워하면서도 끔찍한 고통으로 반응할 수 밖에 없는 남자 vs 이미 체념해버린 여자의 모습을 통해 이 시대의 단절적인 자화상의 모습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일상의 고단함을 해소할 가장 아늑해져야 할 공간이 보이지않는 숨막히는 벽으로 변해간 것이다.
11년이 흐른 시점으로 이동한 본격적인 전개는 여덟살 소녀 레이첼에서 시작한다.
레이첼 커닝햄은 큰길에서 막다른 골목으로 막 꺾어져 걷고 있을때 그 남자를 보았다. 그 골목 끝에 성당이 있었고, 거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교구회관 건물이 있었다. 남자는 신문지를 겨드랑이에 끼고 나무그늘 아래에 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 1부 p11 中 -
"그래, 낯선 사람에게 속마음을 쉽게 털어놓아서는 안 되지. 혹시 성당에 왔니? 미사시간에 많이 늦었구나?"
-1부 p12 中-
대체 어린이미사를 좋아해 담당신부를 흠모하기까지 하는 여덟살 소녀에게 어떤 일이 전개되는걸까? 소설은 앞으로의 전개가 어떻게 될 지 복선적인 암시를 하고 있다. 전체적인 내용은 부유한 은행가의 후손이자, 정치 야심가의 아내 버지니아 쿠엔틴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속은 모른다."
물의 깊이는 측량 가능하나, 사람의 마음은 모른다 의미이다. 태어날 때부터 근원적으로 '희소성'에 직면하는 인간이기에 욕망을 채우기위해 타협없는 경쟁을 하게된다. 경제적으로 성취해 물질적으로 풍요로울수록 정작 정신은 빈곤해지는 '풍요속의 빈곤'의 원인이다. 버지니아는 경제적으로 아쉬울것없이 여유로운 자본가의 아내이다. 별장에 머무르는동안 알게된 독일인 부부의 안타까운 침몰소식을 접하고 기꺼이 도움을 자청한다. 하지만 도움을 받은 나탄은 이를 이용해 탐욕을 꾀한다. 낯선 남자는 제 집 처럼 드나들며 은혜를 입은 사람으로서 해서는 안될 일까지도 아무런 죄의식없이 행한다. 한창 젊은 시절의 깊은 상처감에 주눅든 버지니아는 결국 본능에 타협하며 유혹에 빠져든다. 하지만 종적을 알기 힘든 수상한 남자의 행각은 이어지고...그러는 동안 뉴스에선 안타까운 소녀들의 끔찍한 희생소식이 전해진다.
버지니아는 서서히 마음속에서 분노가 되살아났다.
" 당장 여기서 나가요. 이제 나와 내 가족들을 제발 좀 가만히 내버려둬요."
나탄이 두 손을 높이 올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은 나를 증오하는군요. 나도 내가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모르겠어요."
-p520 中 -
철저하게 전지적 작가시점으로 전개하는 이 소설은 끝까지도 이성적인 감정자체를 유보시키고 있다. 후속 시리즈를 기획하는것인지 소설가 '나탄'을 등장시킨 개연적인 이유가 확실치않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을 통해 작가가 쏟아내고 싶은 메세지를 나탄을 통해 쏟아내고 있는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현대생활의 맹점중 하나가 자신의 본성을 감춘체 지위,조직역할에 강요되어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가면의 실체...페르소나에 둘러싸여 온전히 자신이 아닌, 남의 시선을 의식한체 자아는 수축되어가고 있는것이다. 그러다보니 조직속에 활동할때는 왕성하던 모습이 급격하게 약육강식의 먹이감으로 도퇴되고 마는 것이다. 소설에서도 버지니아의 모습을 통해 욕망과 현실앞에 좌절하는 청춘의 모습을 그려가고 있고, 주변인에게서 벌어진 일련의 범죄를 통해 자성적으로 극복하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물론 끝까지도 애증에 가까운 남자에 대한 결코 가져서는 안될 감정은 잠시 미뤄두고 있다. 소름끼치게 정교한 묘사를 통해 우린 경각심을 일깨워갈 수 있고, 좀더 냉철한 판단을 할 지혜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사실상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의 역사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전쟁'과 일맥상통한다. 영토쟁탈전의 명분으로 수없이 칼,총의 무기가 등장했고, 이에 대한 통치유지수단으로 법이 등장한 것이다. 따지고 보면 끔찍한 범죄는 여느때에도 있어왔지만,분명한건 과거로 갈수록 처벌이 억울할 정도로 과감했다는데에 있다.
갈수록 교묘하게 지능화되어가는 범죄들앞에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방어할 수 있는 체력과 현혹되지 않을 지혜를 갖출 수 밖에 없다. " 잘 알고 따지는게 힘이다. " 한권의 책을 통해 고양할 수 있는 값진 수확이라 할 수 있다. 삶의 지혜로 옹골지게 매듭짓지 못할수록 현란하게 뛰는놈앞에 당해낼 재간은 없어지기 때문이다. 엄벌백계하는 시스템이 갖춰지자면 일반인들의 지혜의 저변이 확대되어야 한다. 두꺼운 페이지의 종이책을 넘길때마다 넘실대는 향기는 내 머릿속이 알아게 채워지는 행복한 향기일 것이다.